문청시절부터 꽤 오랜 동안을 나는 이한주 시인을 알고 지냈다. 사람이 너무 여리고 물러터져서, 나는 그가 ‘시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 힘들게 참은 말들을 갈고 닦아 벼려낸 시어들이지만 각진 데 없이 편안하다. 사람이 그 모양이니 시들도 그 모양인 것이다. ― 시인 김명환
그의 철길은 한때는 “멈추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는 길로 표상되었다. 하지만 딸의 길을 상상하면서 비로소 시인은 “다시 되돌아온다 해도/ 네 발길 오간만큼/ 새 길은 다져지고 넓어지는 법”을 깨닫는다. 낯선 길이고 지도에도 없는 길이지만 길 아닌 곳에서 또 다른 길이 시작된다고 믿으면서 시인은 길을 걷는 그 걸음이 “네 안의 너”를 찾는 발견의 길이기를 바란다. ― 문학평론가 조정환 (「이한주 시에서 ‘길 이미지’의 진화」 중에서)
출간의 의미
<마이노리티 시선> 서른여덟 번째 책으로 이한주 시집 『비로소 웃다』가 출간되었다. 1965년 서울 태생인 시인은 1992년 윤상원문학상과 1993년 임수경통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청계피복노조>의 조합활동의 하나였던 청계문화학교”에서 강사로 일했고, 현재 전동차 1호선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철도노동자 시인이다.
문학평론가 조정환은 해제 「이한주 시에서 ‘길 이미지’의 진화」에서 이한주의 시들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길 이미지’의 변화 궤적을 좇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대의 변화, 주체성의 변화, 혁명의 변화를 읽어 낸다.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던 ‘비탈길’이 ‘철길’로, 그리고 “오직 나의 발걸음과 더불어서만 열리고 닫힐 내재의 길”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시인의 초기 시들에서는 “도시적 삶이 가하는 설움과 긴장의 공간”인 흑석동과 창신동의 비탈길이 자주 등장한다. 이 비탈길에 서려 있는 것은 “노동과 그 고통”이다. “적대와 희망의 색채”를 띤 창신동의 비탈길은 “싸움으로 폭발”하는데, 그 싸움은 “재단칼에 베인 동료들의 절망을/ 눈물샘 가득 동여매 주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사랑”이나 “잠들어 있을 동료들을 위해/내일 아침 찬거리를 준비하는/ 작은 바스락거림”(「애시당초 너는」) 같이 “비탈의 겨울을 물리치고 봄을 피워내는 햇살”과 같다.
오늘날 시인이 올라서 있는 자갈밭의 철길은 비탈길과 다른가? 시인은 “비탈길에서의 ‘열시간 노동’이 ‘스물네 시간 맞교대 노동’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통찰한다. 198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나 2000년대의 철길 위에서나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쉼 없이 노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정환은, ‘비탈길’과 ‘철길’의 차이는 싸움의 주체, 그리고 혁명의 의미에 있다고 본다. 이제 싸움은 “뒤로 한발 물러설 곳 없는 卒들”, “눈길 한번 받아 보지 못한 못난 놈들”(「장기」)에 의해 치러진다. 혁명은 더이상 비장하거나 엄숙한 것이 아니라 “웃고 즐기며 기념하는 시간”이 되었다.
“해법수학, 피아노, 영어, 한자 등 공식적인 길들의 틈새에서 마치 숨구멍처럼 열린”(「그래도 숨 쉴 시간은 있어요」) 딸의 길을 결정적인 계기로 이한주의 ‘길 이미지’는 마침내 내재의 길로 진화한다. 이 길은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고, 비탈길이나 철길처럼 “멈추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는 직선길이 아니라 “네 안의 너”를 찾는 구불구불한 발견의 길이다. 이 시집은 새로운 혁명의 길을 모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서문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詩語들을 다시 불러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누가 뭐래도 사람답게 사는 게 좋은 시다. 그래서 두렵다.
시인 소개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2년 윤상원문학상과 1993년 임수경통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 시집 『평화시장』(갈무리)과 2006년 시산문집 『너희들 키만큼 내 마음도 자랐을까』(삶이 보이는 창)를 펴 냈다. <내림> 동인과 <일과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1호선 전동차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appob@hanmail.net
추천사
김명환 (시인)
문청시절부터 꽤 오랜 동안을 나는 이한주 시인을 알고 지냈다. 사람이 너무 여리고 물러터져서, 나는 그가 ‘시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는 게 바로 시’인 사람이 왜? 힘들게 시를 쓸까?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게 궁금했다. 시집 『비로소 웃다』를 읽으며 비로소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앞니가 없었던 것이다.
“틈이 벌어진 앞니 사이로/ 침이 튀고/ 말이 새는 게 부끄러워/ 말수를 줄이고/ 입을 가리”고 그는 묵묵히 시를 썼던 것이다. 힘들게 참은 말들을 갈고 닦아 벼려낸 시어들이지만 각진 데 없이 편안하다. 사람이 그 모양이니 시들도 그 모양인 것이다.
해제 발췌문 : 이한주 시에서 ‘길 이미지’의 진화 ― 조정환 · 문학평론가
흑석동 계단을 숨차게 오르던 내 스무 살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천안-청량리 간 지하철 1호선 운전실에 잘 있습니다”(「저 잘 있습니다」)라는 구절은 이한주 시인의 삶만이 아니라 그의 시의 주조음까지 요약하는 시구다. 숨차게 오르던 계단길, 그 ‘비탈길’은 그의 초기 시편들이 숨가쁘게 그려냈던 이미지다. 이것이 과거의 주조 이미지라면, 숨차게 달리는 지하철 1호선의 ‘철길’은 그의 시적 사유가 운동하고 있는 현재의 주조 이미지다. 이 두 이미지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로 연결된다. 길은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인 이미지다. 이한주 시인은 여러 시편들에서 반복되는 ‘길’의 이미지를 통해 그가 속한 삶의 그때그때의 리듬을 드러낸다. 비탈길, 그 비스듬한 사선이 어떻게 철길의 저 수평선과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연결될 수 있을까? 분명히 다른 이 두 삶의 선이 어떻게 같은 선, 변함없는 선으로 지각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해제글을 통해 내가 묻고자 하는 질문이다.
1. 비탈길
“미끄럼 타듯/ 겨울이/ 엉덩방아 찧는 동네 어귀”(「산 24번지」). 비탈은 여기서 엉덩방아를 찧는 전도(顚倒)의 위상공간으로 제시된다. 넘어질 듯한 이 비탈은 “서울살이 설움”(「금의환향」), “서울살이 설움보따리”(「어머니의 기차」), “달그락거리는 서울살이”(「내판역」), “빡빡한 서울살이”(「할머니 제삿날」) 등에서 보이듯이 도시적 삶이 가하는 설움과 긴장의 공간이다. 그곳은 또 수치의 공간이기도 하다. “얼큰한 콩나물국과 함께/ 아버지의 피곤이 국자로 퍼 올려지는 저녁”이 되어, “내”가 “어머니의 밥그릇과 나란히/ 삼사분기 고지서를 꺼내놓을 때마다” 아버지는 “식욕을 돋구기도 전에/ 수저를 놓으시고”, 열일곱 살 “나”는 “벽지를 타고 스며드는 장마에/ 흥건해진 걸레를 쥐어짜면서/ …… 공납금 인상분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버지의 오십 평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가난을 또래들의 여유와 비교하며 부끄러워했다(「가난이 불편하기보다는 부끄러워」).
숨차게 오르던 비탈진 길은 흑석동 산동네 계단만이 아니다. 시인이 그리고 있는 청계천 평화시장 옆 노동자 주거지인 창신동은 도처에 비탈길이다. 그곳은 “가난보다/ 서너 발짝 앞서오는 겨울이/ 발을 뻗”(「겨울」)는 곳이다. 모임에 간 아내를 기다리다 내가 깜빡 잠든 사이, “창신동 비탈을 오르던 달빛은/ 잠시 멈춰 서서/ 저어기/ 모임에 지친 아내의 손을 잡아”(「신혼일기」) 준다. 이한주 시인의 첫 시집 『평화시장』의 발문에서 민종덕 <전태일기념사업회> 전 상임이사는, 이한주 시인이 1980년대 후반에 <청계피복노조>의 조합활동의 하나였던 청계문화학교에서 강사로 일했다고 쓰고 있다. 그 문화학교로 가는 길도 어김없이 “천원에 열개 귤을 담아 들고/ 덤 하나 별 하나 호호 담아들고/ 쿵 쾅 쿵 쾅”(「문화학교 가는 길」) 올라야 하는 계단길이다.
흑석동 비탈길과 창신동 비탈길, 이 두 개의 비탈길을 잇고 있는 선분이 있다. 노동과 그 고통이 그것이다. 흑석동 비탈길이 감추고 있는 것은, “도망치고 싶었던 동네 뒷산”에서 서울의 산동네로 이주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동과 아픔, 그리고 희생이다. 아버지는 “자라는 것이 암덩어린 줄도 모르고/ 몸 속에서 피가 줄줄 새는 줄도 모르고/ 휘청 휘청거리는 건/ 나이 탓이라고/ 세상 탓이라고/ 안성에서 인천까지/ 저승에서 이승까지/ 시속 150을 넘나드는 앰블런스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아버지」)았다. 어머니는 “파 한단/ 김치 한접시/ 뻔한 살림에/이 주머니 저 주머니 뒤져/ 잔소리 한 줌이라도/ 식지 않게 달려와서 쥐어”(「어머니」) 주었다. 그 노동, 아픔, 희생은 이제 창신동 비탈길을 무대로 전개되는 나와 그 동료들의 고된 노동으로 대물림된다. 그것은 “청계의 새벽이/ 실밥보다 촘촘히 박음질되는/ 열시간 노동”이며 “열여섯 눈물 많은 꿈들이 모여/밤새 숨죽여/ 흐느끼던 빗물들이 모여/ 미싱바늘에 찔리고/ 재단칼에 베이며/ 피범벅 군복을/ 무지개빛 작업복으로 박음질하던”(「청계」) 노동이며, “아이롱에 데고 바늘에 찔리면서/ 죽은피를 죽 죽 뽑아내던 스물둘”(「애시당초 너는」)의 노동이다.
이렇게 흑석동 비탈길과 창신동 비탈길에서의 삶과 노동은 서로 다른 색채로 나타난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흑석동 비탈길은 주로 위험과 부끄러움의 색채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창신동의 비탈길은 적대와 희망의 색채로 나타난다. 「한가족」에서 시인은 사장과 노동자 사이에 놓인 적대의 선을 드러낸다. “지난 밤/ 흑싸리 한장 붙지 않아/ 주머니 털고 일어섰다던 사장님과/ 색색가지 먼지만큼/ 하루종일 쿠사리를 먹고도/ 자리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없는/ 우리 사이에 흐르는 실핏줄이/ 물보다 진하긴 한가요”(「한가족」). 이 적대의 감정은 「한 지붕 두 가족」에서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끝내 열리지 않는 문”에 대한 분노로 발전한다. 청소아주머니가 억울하게 일자리를 떠나는 날, 복도, 숙직방, 세면대, 대걸레, 휴지통, 변기통 등의 사물들이 송별을 안타까워하여 덜썩대는 것과는 달리, “사무소 창단멤버 한솥밥 10년/ 마루가 닳도록 쓸고 닦고 걸레질해도/ 작업복 색깔이 다르다고 끝내 열리지 않는 문”의 비정함을 통해서는 ‘한 지붕 두 가족’의 실상이 확인될 뿐이다.
시다에서 시작하지만 오야가 되겠다는 상경의 꿈과 다짐이 “주머니 속 만지작거리던 회수권마냥/ 자꾸 자꾸 구겨지”(「서울」)기가 반복되면서, 비탈의 운동은 싸움으로 폭발한다. 여기서 ‘폭발’이란 말이 다소 부적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은, “재단칼에 베인 동료들의 절망을/ 눈물샘 가득 동여매 주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사랑”이거나 “잠들어 있을 동료들을 위해/내일 아침 찬거리를 준비하는/ 작은 바스락거림”(「애시당초 너는」)이며, 때로는, “붙잡힐 거라는 예감에/ 동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수첩 대신/ 빗이며/ 거울이며/ 빨간 립스틱을/ 핸드백 가득 담아온/ 첫 가투”(「첫 가투」)이거나 천원에 열개 귤을 담아들고 쿵쾅쿵쾅 계단을 올라 “휴/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문을 열”(「문화학교 가는 길」)어 젖히는 벅찬 만남이기 때문이다.
(…… 중략 ……)
딸의 길은 해법수학, 피아노, 영어, 한자 등 사회가 요구하는 공식적인 길들의 틈새에서 마치 숨구멍처럼 열린다. 시식코너, 버디버디, 마법전사 마르가온 등이 그것이다(「그래도 숨 쉴 시간은 있어요」). 그 틈새길이 어디로 뚫릴 것인가? 시인은 조바심을 갖지만 경험으로 접근할 수 없는 그 길은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접근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새로운 세대가 걸어갈 길에 대한 상상적 교술(敎述)이 많이 눈에 띈다. “손을 내밀면/ 네 손을 잡고 누군가는 일어서고/ 또 누군가는 네 손목을 이끌어/ 함께 가자고 할 것이다/ 먼저 내딛는 앞 발자국 따라/ 뒷발이 힘을 얻어가는 길/ 앞서거니 뒤서거니/ 네 발걸음 따라 피어나는 들꽃/ 막아서는 게 있으면/ 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라/ 손길 머무는/ 비와 바람과 구름도/ 목청껏 너를 응원할 것이니”(「길 위에서」). 아들 용우에게 보내는 이 편지시는 권고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열여덟 딸에게 보내는 편지시는 어떤 권고도 없이 그녀가 걸을 길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열여덟이 써내려간 발걸음에/ 오답이 어디 있으랴// 낯선 길/ 길을 잃으면/ 네 자신을 믿어라/ 새로운 길은 아직 지도에 없는 법/ 길이 아닌 곳에서 또 다른 길이 시작된다/ 청춘을 가둘 수 있는 철조망이 어디 있으랴/ 네 발걸음이 길이다/ 설령 다시 되돌아온다 해도/ 네 발길 오간만큼/ 새 길은 다져지고 넓어지는 법// 열여덟 답안지에 정답은 없다/ 네 발걸음이 답이다 ―「열여덟 딸에게」 전문
그의 철길은 한때는 “멈추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는 길로 표상되었다. 하지만 딸의 길을 상상하면서 비로소 시인은 “다시 되돌아온다 해도/ 네 발길 오간만큼/ 새 길은 다져지고 넓어지는 법”을 깨닫는다. 낯선 길이고 지도에도 없는 길이지만 길 아닌 곳에서 또 다른 길이 시작된다고 믿으면서 시인은 길을 걷는 그 걸음이 “네 안의 너”를 찾는 발견의 길이기를 바란다.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처럼/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마음처럼/ 어려움은 늘 예기치 않게 다가오리니/ 그땐 네 온몸이/ 판초우의가 되고 손전등이 되고/ 바늘이 되고 실이 되어 가라/ 길을 가다보면 어찌 바람뿐이랴/ 낯선 풍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어쩌면 네 안의 너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Buen Camino」 일부
이제 길은 비탈에 있지도 않고, 자갈밭에 있지도 않다. 지금까지 나의 밖으로 나 있었던 길은 이제 나의 안으로 나기 시작하며 오직 나의 발걸음과 더불어서만 열리고 닫힐 내재적인 길로 된다. 이 길은 판초우의나 작은 전등이나 바늘과 실만으로는 충분히 걸을 수 없는 길이며 나의 온몸이 만들어 나가야 할 길이다. 흑석동 계단의 비탈길과 천안-청량리간 철길 사이에 변함이 없다면 이미 길이 내 안에 들어와 ‘내 속의 나’(「거울」)로서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풋내 풀풀 풍기던 詩語들”, “담배연기에 자욱이 가려졌던 革命”(「저 잘 있습니다」)이 잘 지내고 있다면, 딸이 걸어갈 저 미래의 길에 대한 상상을 통해 그리기 시작한 저 ‘내재’의 길 위에서일 것이다.
* 『비로소 웃다』 133~148 중에서. 「해제」전문은 시집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시
「비로소 웃다」
나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누렇고 성긴 내 이빨만 보았다
틈이 벌어진 앞니 사이로
침이 튀고
말이 새는 게 부끄러워
말수를 줄이고
입을 가리며 웃다가
그들처럼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새하얀 가짜 이빨 덧대놓으니
가지런한 웃음이 싱그럽다
그깟
사과쯤 베어먹지 못하면 어떠랴
「저 잘 있습니다」
흑석동 계단을 숨차게 오르던 내 스무 살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천안-청량리 간 지하철 1호선 운전실에 잘 있습니다
결혼도 하고
나를 닮아 걱정인 아이도 둘
천하태평 뱃살처럼
덕분에 다 잘 있습니다
써클룸 쓰레기통을 넘나들며
풋내 풀풀 풍기던 詩語들도
뒷배란다 먼지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성제兄 말씀 3장 16절이 낭독되던 그때
비타민이 아닌 사과가 되고 싶었던 초롱초롱 눈빛과
써클룸 탁자 위에 넘쳐났던 소주병과 새우깡
그리고 담배연기에 자욱이 가려졌던 革命
뭐 그런 거 다 잘 있습니까?
책 정보
2013.7.7 출간 l 128x210mm, 무선제본 l 마이노리티시선38
정가 7,000원 | 쪽수 148쪽 | ISBN 978-89-61950-68-8
구입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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