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맑고 고운 심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고운 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거칠기만 하다. 거친 세상의 지친 삶들을 그는 외면하지 않고 어루만진다.
그 어루만짐이 거친 세상의 물결에 대응하는 그와 이웃들을 단단하게 엮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리라고 믿는다. ― 시인 김명환
야구를 하듯이 온몸으로 쓰는 그의 시는 목소리가 높지 않아도 울림이 크다.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려는 자본의 변화구에 속지 않으려고 공을 끝까지 살피는 그의 시가,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 시인 이한주 (「날마다 시가 되는 8번 타자의 꿈」 중에서)
출간의 의미
<마이노리티 시선> 서른아홉 번째 책으로 오진엽 시집 『아내의 시』가 출간되었다.
1969년 전주 태생인 시인은 2005년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재 전동차 1호선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철도노동자 시인이다.
“1시간 30분짜리 청량리 한탕”을 타고 오는 동안 “한 평 남짓한 전동차 운전실”에서 그의 시들은 태어났다. 달리는 전동차 운전실에서 그는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여행한다. 형편이 어려워 “김밥 못 싸/ 빈 배낭에 신문쪼가리 넣고”(「소풍가는 날」) 소풍 가던 어린 시절, “밤마다 엄마 품 그리워 파고드는 동생을” “옛날 이야기로 토닥거려주었”(「형」)던 형에 대한 추억은 그 따뜻함에 미소를 짓게 한다.
다른 한편 “내일은 낮잠 자지 말고/ 놀아주마 다짐하지만/ … 퇴근하면 어김없이 칙칙 폭폭/ 코를 고는/ 우리는 24시간 맞교대/ 대한민국 철도원”(「철도원 부부」)의 고단한 일상, “재활용되는 우유팩”을 부러워하는 “내일이면/ 유통기간 다 되어/ 버려질”(「계약직」) 계약직 노동자들의 고통, “아등바등 가지 끝/ 발버둥 치던 홍시/세상의 끈을 놓는다”(「신자유주의」)에 표현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 등은 2013년의 철도노동자가 놓인 구체적 시공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묵직하고 날카로운 고발이다.
어려운 형편에 쉴 새 없이 노동하며 “우리를 먹여 살”린 아버지의 애환을 “담장을 넘기고 싶어도/ 한방이 없으니/ … 번트라도 대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야구선수의 처지에 빗대고(「희생번트」),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고층아파트/ 한가닥 줄에” 매달린 페인트공을 거미에 비유하며(「거미」), “콩나물 800원/ 두부 한모 500원/ 마지막 연에/ 두줄로 지운/ 파마 35000원”(「아내의 시」)를 그 어떤 뛰어난 은유법보다 울림이 큰 “아내의 시”로 읽는 오진엽 시인의 노래는 “목소리가 높지 않아도 울림이 크다.” 오진엽의 시집은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려는 자본의 변화구에 속지 않으려고 공을 끝까지 살피는” 오늘날의 정직한 사람들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 아내의 詩
다음날 노동을 생각하며 끄응 돌아눕는 게 익숙한 어느덧 결혼 15호봉 차. 아내는 시인이 되어갑니다.
아까부터 무언가 끄적끄적 거리던 아내가 볼펜을 쥔 채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아내 머리맡에 쓰다만 공책을 가만히 펼쳐 봅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콩나물 1,000원, 파 한 단에 3,000원, 아이들 교재비 35,000원 남편 약값 120,000원…….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는 쓰다가 두 줄로 지운 파마 35,000원.
두 줄로 지운 꾹꾹 눌러 쓴 볼펜자국을 보니 몇 번이고 망설였을 아내의 고심한 흔적이 여지없이 엿보입니다. 그 은유법 하나 없는 아내의 시 한 줄. 그렇지만 세상 어떤 名詩보다 제게 큰 울림을 줍니다.
한참을 아내의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미처 갈무리 못한 것 때문일까요. 곤한 아내가 뒤척뒤척 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아내는 꿈속에서도 끙끙 시를 쓰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날 아침녘에도 온몸을 다해 시를 쓰는 아내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잠결에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문틈으로 내다보니 이른 아침부터 낑낑- 아내가 쓰레기봉투 머리끄덩이를 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쓰레기봉투 금방이라도 목이 졸려 질식할 것만 같은데 아내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테이프로 꽁꽁 입막음까지 하였지요.
그렇게 아내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그 신통한 요술을 넋 놓고 보면서 그때는 기껏 그 봉투 값이 얼마 길래 저리 청승인가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내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요술로, 그 시 한 줄로 저와 우리 아이들이 살고 있음을. 그래 내가 이만큼 사는 것임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언제나 빠듯한 살림살이 원망 한 번 없이 오늘도 아내는 가족을 위해 끙끙 시를 쓰겠지요.
아내의 손끝에서 신묘하게 빚어지는 저 애틋한 시 한 줄로 내 노동이 반짝반짝 빛남을.
추신- 첫 시집을 세상에 내 놓을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아내 덕분입니다.
또한 김명환·이한주 시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시집은 없었음을.
하늘은 저에게 어린 시절 가장 소중한 사람 ‘어머니’를 떼어 놓은 게 맘에 걸렸나 봅니다.
그래서 분에 넘치는 아내와 김명환·이한주 시인을 동아줄처럼 저에게 내려 보내주셨으리라.
시인 소개
196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2005년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리얼리스트100>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전동차 1호선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oh0037@naver.com
추천사
김명환 (시인)
세상을 잘 사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좋은 자식으로, 아빠로, 남편으로, 이웃으로 사는 사람. 그리고 세상의 물결과 부딪치며 맞서기도, 흐름을 타기도 하는 사람.
오진엽 시인은 두 부류 모두의 심성을 가슴에 지니고 있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의 시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맑고 고운 심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고운 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거칠기만 하다. 거친 세상의 지친 삶들을 그는 외면하지 않고 어루만진다.
그 어루만짐이 거친 세상의 물결에 대응하는 그와 이웃들을 단단하게 엮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리라고 믿는다.
발문 발췌문 : 날마다 시가 되는 8번 타자의 꿈 ― 이한주 · 시인
시를 좋아한다면서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던 친구들이 간혹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좋고요, 조금 더 쓰시면 시가 더 좋아지겠네요.”라고 말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내게 시를 보여 줬던 친구들은 습작을 계속하기보다는 시를 여전히 좋아하는 좋은 독자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나 가치를 부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가 시작된다고 믿는 나는, 그들이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주춤주춤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진엽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오진엽은 때론 아련하게 때론 의뭉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뜻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서 약간 들떠 있던 그의 시가 비로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중략 ……)
그의 이야기는 늘 그 다음날 시가 되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매번 후회를 하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건네주는 그의 습작들을 내려놓지 못했다. 감수성의 촉수가 어떻게 기지개를 펴고 또 얼마만큼 확장될 수 있는지를 날 것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뉘라서 마다할 수 있었을까.
그는 열병을 앓듯이 시를 썼다. 1시간 30분짜리 청량리 한탕을 타고 오는 동안 뚝딱 시 한편을 만들어 왔다. 그의 작업실은 한 평 남짓한 전동차 운전실이었다. 오감을 활짝 열어 놓고, 말랑말랑 만져지던 “형의 바지춤 속”(「형」)과 “아내의 옷 벗는 소리”(「아내의 옷 벗는 소리가 무섭다」)와 “사진마다/ 웃음 가득한 아이들”(「사진첩을 보며」)이 살아 숨 쉬도록 그는 또박또박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그를 보면 까맣게 잊혀졌던 내가 보였다. 시에 대한 설렘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던 내 젊은 날이 게으르기만 한 나를 꾸짖는 듯했다. 무뎌지던 열정과 감성을 흔들어 깨운 그는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중년이 참 좋은 시인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덤이었다.
유통기간 지난 우유/ 버리지 못하고/ 훌훌/ 빈 껍데기는 재활용 통에// 내일이면/ 유통기간 다 되어/ 버려질 내가/ 재활용되는 우유팩 부러워지는 오늘// 나는 / 재활용되고 싶다
―「계약직」(2005년 제14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전문
15년 전 처음 구로열차사무소에서 처음 만난 이후 오진엽 시인과는 여러 갈래에서 자주 만났다.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소식지와 <철도노조>의 노보를 함께 만들기도 했고, 매주 수요일마다 사회인 야구도 같이 하고 있다. 시를 쓰는 것은 내가 조금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면, 야구를 하는 데 있어서는 그가 한참 앞에서 내 손을 잡아줬다.
그는 17년 전부터 사회인 야구 주말리그 선수로 뛰고 있다. 24시간 맞교대를 하는 당시 철도의 노동조건에서 주말마다 야구를 한다는 것은 만용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17년 동안 단 한 번도 경기에 빠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야구는 세상을 보는 창이 되었다. 야구 그라운드에서 “번트라도 대고/ 앞만 보고 달려야 했”(「희생번트」)던 아버지들을 이해하게 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큰돈을 받고 들어온 젊은 에이스” 대신 먼저 교체를 당할(「백업포수」) 수밖에 없는 백업포수에 감정이입이 되기도 한다. 복숭아뼈에 정통으로 공을 맞고도 “절뚝이지 말고” 뛰쳐나가(「8번 타자」) “오래도록 야구장에 남고 싶은” 작은 꿈(「야구공이야기」)이 이루어지는 이 땅의 8번 타자들과 야구를 통해 연대하는 법도 배웠다.
집을 나가서/ 정해진 순서대로/ 1루 2루 3루 거쳐/ 집으로 돌아와야만 된다// 2루쯤에서/ 올망졸망 아이들 떠올리며/ 입을 앙다물지만/ 3루는커녕/ 구조조정 견제구에/ 비명횡사 할까봐/ 바짝 엎드리면서 내민 손/ 배냇 아이처럼 2루베이스/ 꽉 움켜쥐고// 대학졸업 십년 만에 막내동생/ 겨우 1루에 다다랐지만/ 언제 대주자로 바뀔지 몰라/ 전전 긍긍/ 옆집 혜원이 아빠/ 타석에 들어서기만을 기다리는/ 쭈빗쭈빗 대타인생// 아이들과 아내의 응원이/ 서럽지 않도록/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1루 2루 3루 돌아/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귀가」 전문
철도랩터스의 1번 타자이자 유격수인 그는 이번 주 수요일에도 야구하러 갈 것이다. 안타가 아닌 땅볼을 치고도 그는 1루까지 전력질주를 하고, 무르팍이 까지는 것쯤 아랑곳하지 않고 슬라이딩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야구를 하듯이 온몸으로 쓰는 그의 시는 목소리가 높지 않아도 울림이 크다.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려는 자본의 변화구에 속지 않으려고 공을 끝까지 살피는 그의 시가,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날마다 시가 되는 8번 타자의 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나를 비롯한 몇몇의 운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이제 오진엽 시인의 시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어 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
* 『아내의 시』 103~109쪽 중에서. 「발문」 전문은 시집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시
「아내의 시」
잠든 머리맡
쓰다만 공책에
은유법 하나 없는
아내의 시
콩나물 800원
두부 한모 500원
마지막 연에
두줄로 지운
파마 35000원
뒤척뒤척
아내는 꿈속에서도
끙끙
시를 쓰나보다
「1호선 떠돌이 배우」
노량진에서 올라탄 그가
고혈압에 딱이라며
약 선전으로 달아오른 얼굴
혈압으로 쓰러질 듯
기우뚱기우뚱
따분한 하품들
야유처럼 쏟아져도
혼신의 마무리 연기
막 절정으로 치닫는데
고구마 줄기 뽑히듯 줄줄
신도림역 환승방송에
1인극이 마임으로 바뀌고
배우보다
관객들 먼저 퇴장해도
절찬리에 매진될
다음 무대 꿈꾸며
오늘도 그가
구로역 4번 홈에서
캐스팅을 기다린다
책 정보
2013.7.7 출간 l 128x210mm, 무선제본 l 마이노리티시선39
정가 7,000원 | 쪽수 112쪽 | ISBN 978-89-61950-69-5
구입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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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기사
[대자보] 은유법 하나 없는 ‘아내의 시’, 8번타자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