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란트 단체초상화

자경단 시대의 예술의욕

Das holländische Gruppenporträt :
Das Kunstwollen im Zeitalter der Miliz

알로이스 리글 지음
정유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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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란트 단체초상화』는 리글이 당대를 특징짓는 것으로 여긴 유아론에 대한 비판이다. 이 책은 재현적 미술조차도 재현의 문제를 어떻게 초월할 수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단순히 세계를 재현하는 데 기여하는 대신 미술은 관람자와 더불어 세계를 공유하기를 열망할 수 있었다. ― 매거릿 올린

 

알로이스 리글과 더불어 빈 학파의 저자들은 로마 말기와 비잔틴 시대의 산업을 분석하면서 예술적 실천에 내포된 역능과 사회적 모델의 총체를 해명하고 이것들의 존재론적인 다원결정을 파악한다. 이들은 예술의욕(Kunstwollen), 즉 예술을 실천하려는 특별한 의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예술의욕은 자신의 시대를 혁신하는 지향성이다. ― 안또니오 네그리

 

 

간략한 소개

 

빈학파를 대표하는 미술사가 알로이스 리글의 『홀란트 단체초상화』는 미술을 개인적 표현이나 자연의 모방으로 설명하는 대신 한 시대의 예술의욕이 시각적 형식으로 조직되는 방식을 탐구한 고전이다. 리글은 장식문양과 공예 같은 ‘순수미술’이 아닌 분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예술을 집합적 역사 경험의 산물로 이해했고, 이 책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된 후기 저작이다.

리글은 이 책에서 17세기 홀란트 단체초상화에 대한 연구로 ‘예술의욕’ (Kunstwollen)이라는 개념을 입증한다. 17세기 홀란트 사회에서는 자경단을 포함한 길드 같은 단체들이 활발하게 결성되었고 그 구성원들을 한 화면에 담은 단체초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리글에 따르면 17세기 홀란트의 단체초상화는 개인의 위신이나 영웅적 서사를 강조하지 않고 병렬적 구성과 공공적 정체성을 시각화함으로써 시민 사회의 미감과 세계관을 형식화했다. 리글은 이 장르야말로 17세기 홀란트의 예술의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역이라고 보았다. 또 『홀란트 단체초상화』는 관람자를 미술사 분석의 핵심 요소로 진지하게 고려한 선구적 작업이기도 하다. 리글이 제시한 ‘주의’(Aufmerksamkeit) 개념은 그림 속 인물들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그림 밖의 관람자와 맺는 시선의 관계를 분석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리글의 관점은 이후 발터 벤야민의 미학과 역사철학, 나아가 안또니오 네그리의 미학, 정치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이 책은 미술사 연구를 넘어, 예술과 사회 및 집단적 삶의 형식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사유하게 만드는 이론적 고전으로 다시 읽히고 있다.

 

 

상세한 소개

 

알로이스 리글과 『홀란트 단체초상화』

알로이스 리글은 1858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린츠에서 태어나 빈에서 학문적 생애 대부분을 보낸 미술사학자이자 문화재 전문가이다. 빈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 고고학을 공부한 그는 1886년부터 10년간 오스트리아 미술공예 박물관에서 재직하며 본격적으로 미술사 연구를 시작했다. 박물관 재직 기간 후반부에 리글은 직물 담당 부서의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경험은 첫 저서 『고대 동방의 양탄자』(Altorientalische Teppiche, 1891)로 이어졌다. 이 시기 리글은 회화나 조각처럼 전통적으로 ‘순수미술’로 분류되는 작품 장식 문양과 공예품을 직접 다루었고, 이러한 실무 경험이 미술사를 보는 그의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897년 빈 대학 교수로 임용된 이후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며 고대, 중세, 근세를 아우르는 야심 찬 이론적 구상을 전개했지만, 1905년 마흔일곱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많은 기획을 미완으로 남겼다. 『홀란트 단체초상화』(1902)는 리글이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저작이다.

리글이 혁신적인 미술사학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한 것은 그의 두 번째 저서인 『양식의 문제: 장식사의 기초』(Stilfragen: Grundlegungen zu einer Geschichte der Ornamentik, 1893)였다. 이 책에서 리글은 장식 문양이 외적 조건에 종속되지 않는, 연속적이며 자율적인 ‘장식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기술하려 했다. 이를 위해 리글은 아라베스크와 같은 특정 장식 모티프들을 고대 ‘근동’에서 고전 고대, 나아가 초기 중세와 이슬람 미술에 이르기까지 추적했으며, 그 과정에서 ‘예술의욕’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예술의욕(Kunstwollen)

알로이스 리글은 예술의욕 개념을 정식화한 미술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예술을 개인 천재의 표현이나 단순한 모방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집합적 의지가 조형적 형식으로 드러난 결과로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리글에게 예술은 특정한 시대와 사회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세계와 관계 맺고자 하는지를 형식으로 조직한 결과이다. 

예술의욕 개념에 대한 가장 분명한 정의는 1901년에 출간된 리글의 『로마 말기의 미술산업』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된다. 그 책에서 리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모든 의욕은 개인의 내부에서 그리고 개인을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형성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조형적 예술의욕은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사물의 외양과 인간의 관계를 규율한다. 시적인 예술의욕은 인간이 사물을 어떻게 상상하고자 하는지를 드러내듯이 미술은 사물의 형상과 색채를 인간이 어떻게 보고자 하는지를 표현한다. 인간은 단지 수동적인 감각적 수용자에 그치지 않고, 욕망을 지닌 능동적 존재로서, 세계를 자신의 욕망에 가장 명확하고도 순응적으로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이러한 해석 방식은 민족, 지역,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의욕의 성격은 우리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세계관이라 부르는 것 속에 담겨 있다. 즉 종교, 철학, 과학, 나아가 국가 운영과 법에까지 담겨 있다.”(위키피디아) 다시 말해서 예술의욕은 곧 세계관이 미적 형식으로 드러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단체초상화가 보여주는 17세기 홀란트의 예술의욕

알로이스 리글은 『홀란트 단체초상화』 서문의 24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술 작품에서 현대의 취향에 들어맞는 요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탄생시키고 바로 이와 같이 만들어 낸 예술의욕을 규명하는 것이 미술사의 과제임을 인식하는 즉시, 우리는 단체초상화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홀란트의 예술의욕을 드러내는 고유한 성격에 가장 적절한 영역임을 깨닫는다.” 『홀란트 단체초상화』에서 리글은 예술의욕의 규명을 미술사의 과제로 규정하면서 단체초상화야말로 홀란트의 예술의욕을 잘 보여준다고 보았다.

17세기 홀란트에서 단체초상화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배경에는 정치, 종교, 사회 조건의 급격한 변화가 놓여 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독립 전쟁과 종교개혁 이후 형성된 네덜란드 공화국은 군주나 귀족이 아닌 시민 공동체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였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였던 서부 연안 지역, 즉 역사적으로 ‘홀란트’라 불린 지역에서 암스테르담과 하를럼은 상업과 행정, 시민 조직이 밀집된 도시로 기능했으며, 공공적 단체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단체초상화는 바로 이러한 시민 사회의 구조 속에서 등장한 시각적 형식이었다.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부제는 “자경단 시대의 예술의욕”이다. 자경단은 17세기 홀란트에서 흔한 단체 형태였다. 자경단은 정규군과 달리 도시의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방위 조직으로, 17세기 홀란트에서는 주로 상업과 행정을 담당하던 부르주아 계층의 남성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사비로 무기를 마련하고 단복을 갖추었으며 평상시에는 도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다가 필요할 때 치안 유지와 방위를 맡았다.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가 공공의 책임을 스스로 수행한다는 자치적 시민의식의 표현이었고 리글에 따르면 이러한 성격은 단체초상화에서 평등한 병렬 구성과 집단적 정체성의 시각화로 나타난다.

단체초상화 속 인물들은 가족이나 사적 친분으로 묶인 존재들이 아니라, 자경단이나 길드, 자선 기관과 같은 공공적 목적을 지닌 조직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각자 독립적인 개인이면서도, 특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결합한 집단으로서 재현된다. 따라서 단체초상화는 개인초상화처럼 한 인물의 위신이나 개성을 강조하지도, 역사화처럼 영웅적 서사를 중심에 두지도 않는다. 시선과 몸짓은 과도한 서사적 행위를 지양한 채, 서로를 의식하거나 관람자를 향해 열려 있는 상태를 취한다. 단체초상화는 17세기 홀란트의 시민 사회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이미지다. 이러한 이유에서 리글은 단체초상화를 17세기 홀란트 예술의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르로 평가했다.

 

리글과 현대 사상가들 : 발터 벤야민, 안또니오 네그리

리글의 예술의욕 개념은 이후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많은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리글이 이른바 ‘데카당스’나 ‘야만주의’로 폄하되던 영역을 예술 발전론의 틀에서 해방시킨 점에 주목했다. 벤야민의 초기작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리글의 영향이 거론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벤야민에게 리글은 중심에서 밀려난 형식과 장르를 통해 근대 이전의 세계관과 정동을 사유할 수 있게 한 선구적 이론가였으며, 이는 벤야민 자신의 역사철학과 미학적 방법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프린스턴 대학교 독일어과 부교수 토머스 레빈에 따르면 “리글의 작업 중에서도 특히 예술의욕이라는 개념은 벤야민의 초기 저작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리글과 마찬가지로, 벤야민 역시 자신의 작업을 ‘예술작품을 하나의 시대가 지닌 종교적, 형이상학적, 정치적, 경제적 경향들의 완전한 표현으로 간주하는 분석을 촉진하려는 시도로 이해했으며, 따라서 그러한 분석은 특정한 학문 분야로 한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 후기 로마 공예에 대한 리글의 재평가는, 이전까지 폄하되었던 17세기 독일 비애극 장르를 벤야민이 재평가하는 작업의 하나의 유비로 기능했다.”(레빈의 논문)

이러한 계보는 21세기에 이르러 안또니오 네그리에게서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네그리는 리글의 “예술의욕” 개념이 “예술을 만들어내는 특이한 의지”(네그리의 글)를 포착했다고 본다. 네그리는 저서 『예술과 다중』에서 리글의 예술의욕 개념을 직접 언급하며 다중의 생산성과 창조력이 조직되는 방식이자 사회적 힘과 정치적 가능성이 응축된 장으로 해석한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에 따르면 네그리는 예술의욕이 “기존의 형식들을 초과하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을 일관되고 지속적인 기획으로 조직하면서, 그때그때의 예술사적 문턱과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예술활동의 양식을 창출하는 구성적 힘”이라고 말한다(228쪽). 

 

주의와 관람자 : 시선이 만드는 관계

『홀란트 단체초상화』에서 리글은 ‘주의’(Aufmerksamkeit) 개념을 제시했다. 리글의 ‘주의’ 개념은 그의 미술사 이론에서 의지(Wille)와 감정(Gefühl) 사이에 놓인 제3의 심적 상태를 가리킨다. 의지가 서사적 행위와 지배, 종속의 관계를 조직하는 힘이라면, 감정은 인물들 사이의 정서적 결속을 강조한다. 주의는 이 둘의 극단을 피하면서, 과도한 행위나 정서에 치우치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집중하되 무관심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상태다. 리글은 이 개념을 통해 단체초상화가 왜 영웅적 서사도, 친밀한 감정극도 아닌 독자적 장르가 되는지를 설명한다.

단체초상화에서 주의는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자세로 가시화된다. 인물들은 하나의 공적 목적 아래 모여 있으되, 각자의 초상적 자율성을 잃지 않는다.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만 누구도 중심적 주인공으로 돌출되지 않으며, 행위는 중단된 듯 고요하다. 이 균형이 바로 17세기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미학적 핵심이다. 주의는 인물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도 집단의 통일성을 성립시키는 원리로 작동한다.

이 개념은 관람자와 대상의 관계로 확장된다. 주의는 그림 속 인물들 사이에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 밖의 관람자를 향해 열리는 시선을 통해 외적 통일성도 만든다. 관람자는 극적 사건을 ‘보는’ 대신, 인물들이 유지하는 고요한 집중의 장에 ‘초대’된다. 이 점에서 주의는 이후의 수용미학이나 시선 이론과 연결될 여지를 갖는다. 단체초상화는 관람자를 배제하지도, 감정적으로 끌어들이지도 않으면서, 작품과 관람자 사이에 지속적인 주의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장르로 이해될 수 있다.

단체초상화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인물-관람자-공간이라는 삼자 관계를 조직하는 이미지로 이해되며, 이는 이후 수용미학이나 시선 이론에서 본격화될 문제의식을 선취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될 수 있다.

 

* 책에 수록된 모든 도판의 고해상도 컬러 파일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_av--ULk10ISFNnLxIEmP7aammg6qAS_?usp=drive_link

 

 

역자 인터뷰 

 

Q. 부제 “자경단 시대의 예술의욕”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먼저 자경단이 무엇인가요? 자경단 시대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를 말하는지요? 

 

자경단은 정규군과는 달리 시민들이 모여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고자 결성한 단체입니다. 기본적으로는 특정한 무기를 다루는 사수들의 길드 형태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책에 등장하는 그림들을 통해 보듯 궁병단, 석궁병단, 총병단 등 구체적인 무기가 명칭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비로 무장하고 단복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 부르주아 계층의 남성들이었고, 특히 단체의 대장은 도시 공동체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런 형태의 사수단 길드는 중세부터 존재했지만, 리글은 이들이 단체초상화를 의뢰하여 제작하는 관습이 17세기, 특히 홀란트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여기에는 스페인 지배하에 있던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과 종교개혁이라는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매우 복잡한 역사입니다만 네덜란드가 80년에 걸친 전쟁 끝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을 성취했으며, 이 독립전쟁의 이면에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를 관용한 네덜란드에 대한 스페인 왕실의 억압이 한 가지 큰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스페인 치하에 남아있던 남부 네덜란드가 가톨릭 전통을 유지한 반면 독립한 네덜란드 공화국은 개신교 윤리를 따랐으며, 특히 역사적으로 홀란트라 불린 지역, 그중에서도 암스테르담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리글은 당시 홀란트의 여러 도시 가운데 암스테르담을 해당 맥락에 대한 일종의 모델 도시로 취급하는데, 그것은 이 도시에서 종교개혁과 더불어 일어난 변화가 매우 의미심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자경단은 교회에 소속된 일종의 형제회였지만, 암스테르담의 자경단은 교회에서 시청으로 관리 주체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리글은 단체초상화라는 장르를 통해 종교개혁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두 가지 큰 사건 속에서 17세기 홀란트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던 자경단 길드 조직과 조직원들 사이에 일어난 구체적 변화들을 읽어내고자 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그의 미술사 이론의 핵심이라 할 예술의욕 개념의 좋은 사례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Q. 리글의 핵심 개념인 ‘예술의욕’(Kunstwollen)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됩니다. 이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벤야민 등 다른 후대의 이론가들이 이 개념을 활용한 사례들도 알려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리글은 모든 시기, 모든 지역의 미술에 고유한 예술의욕이 반영된다고 여겼습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이나 예술의욕 개념에 대한 평가, 그리고 후대 연구자들이 이 개념을 활용해 전개한 후속 연구 등은 미술사에서 꽤 논쟁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쟁적’이라는 말은 종종 해당 주제에 관한 격렬한 비판이 들끓은 상황을 정리하는 표현인데, 실제로 리글의 미술사에 대한 후대의 반응이 그러했습니다. 저 유명한 곰브리치도 비판적인 진영에 섰던 인물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러한 비판이 온당한 것이냐에 대한 반론과 리글 미술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별개로 리글이 받은 비난 중에 일정 부분은 그의 방법론을 계승한 보링거나 제들마이어에 대한 반감에서 소급된 측면도 있습니다. 어쨌든 리글의 문제의식이나 관점은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와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시공간적 지평 위에 형성된 것이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리글 연구의 지향점과 가치는 그가 예술의욕 개념을 제시하면서 선택한 주제들의 성격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는 고대와 중세 건축의 장식 모티프를 연구했고, 고대 로마 말기 미술을 공예 중심으로 탐구했으며, 17세기 홀란트의 단체초상화를 다뤘습니다. 이 주제들의 공통점은 시기와 지역, 장르 면에서 리글이 활동한 시대 주류 미술사학의 변방에 위치하거나 거의 존재조차 없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술의욕 개념을 통해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나아가 모든 장르 미술에서 고유한 의미와 의의를 인정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리글과 프란츠 비크호프 등으로 대표되는 빈 학파 미술사학의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리글 방법론의 가치를 알아본 인물로 발터 벤야민을 들 수 있습니다. 벤야민의 초기작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부터 리글의 영향이 거론되는 경우가 있는데, 방금 한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리글이 소위 ‘데카당’, 혹은 ‘야만주의’로 폄하되던 영역을 예술 발전론의 틀에서 해방시킨 것에 공감했다고 합니다. 독일 비애극이라는 주제가 벤야민에게 갖는 의미도 이와 관련해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Q. 리글은 왜 단체초상화를 연구했을까요? 이 책이 리글의 이론 여정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입니까? 이 책이 『양식의 문제』, 『로마 말기의 미술산업』 등과 비교할 때 리글의 미술사 연구에서 어떤 전환점을 이루고 있나요?

 

리글의 연구 주제는 그가 비교적 초창기의 미술사학자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한층 이례적입니다. 앞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양식의 문제』는 고대와 중세 건축에서 나타나는 장식 모티프의 양식적 변천을 다룹니다. 『로마 말기의 미술산업』은 말 그대로 미술 ‘산업’, 즉 공예 영역을 주제로 삼은 데다가 시기적으로도 이른바 고전고대의 끝물이라 할 로마 말기를 선택했죠. 고대가 저물고 기독교 미술이 부상하는 전환기입니다. 물론 당시 리글이 접근할 수 있던 연구 대상의 한계 등을 이유로 해당 시기의 건축, 조각, 회화를 모두 다룬 책이 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제목에서 굳이 ‘미술 산업’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예술의욕이라는 것이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사회·정치적 환경 속에서 매우 폭넓고 심층적으로 작동한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따라서 건축물의 장식 모티프라든지 공예품과 같이 제작자의 예술가적 자의식보다는 사회 구성원의 미감을 어느 정도 습관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드러내는 소재에 주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 그가 회화에 속해있고 렘브란트나 할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의 대표작들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회화 장르의 전통적 위계상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에 위치하는 단체초상화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은 한편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위계라는 것은 회화를 세분하는 하위 장르 가운데 역사화를 가장 고상한 것으로 보고 그 아래로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와 정물화 등 소재에 따른 소위 급을 나누는 관습을 말합니다. 역사화에는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기록화적 성격도 있지만 어느 시점까지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 속 주제나 기독교 성서의 일화를 그린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초상화라는 것은 고위성직자로부터 왕족, 근세 이후로 부르주아 계급에 이르기까지 일정 정도 이상의 사회적 신분 혹은 부를 지닌 개인이 화가에게 의뢰하여 그려 받는 그림이었습니다. 풍속화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그림의 목적인 일상의 흥미로운 단편을 구성하는 장삼이사입니다. 제대로 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풍경과 정물이 그 아래로 놓이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논리입니다. 흥미롭게도 리글은 단체초상화라는 독특한 장르가 이 사다리의 어느 지점에 자리하는지를 구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단체초상화는 단순히 복수의 등장인물이 그려진 초상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초상화나 부부초상화, 혹은 우정초상화까지도 리글이 설명하려는 단체초상화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사적 관계에서 오는 어떤 동일성이 이들 초상화들을 단체초상화와 구분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단체초상화는 특정한 공동의 목적을 위해 모인 다양한 구성원들의 ‘단체’를 소재로 합니다. 이 단체는 가장 많은 경우 자경단 길드였고, 리글의 주장에 따르면 단체초상화라는 장르는 17세기 홀란트 지역, 그중에서도 암스테르담과 하를럼에서 거의 배타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자경단 길드 이전에는 성지순례를 위한 형제단이 있었고 나중에는 의사들의 모임이나 상업 조합, 구호기관의 간부진 등 몇 가지 다른 사례들도 등장합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경우에 그림에 등장하는 구성원들이 공공의 목적성을 가진 ‘단체’로서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기록하여 남기고자 이러한 초상화들을 의뢰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단체초상화의 등장인물들은 풍속화에 등장하는 갑남을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역사화의 영웅은커녕 일반적인 초상화의 유력자들처럼 독보적인 개인으로도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공통의 목적 아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동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화와 풍속화 사이에 존재하는 단체초상화라는 장르가 공예 미술이나 장식 모티프 등의 주제와 연속성을 갖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Q. 리글은 단체초상화의 핵심 개념으로 의지와 감정 사이의 평형 상태인 ‘주의’(Aufmerksamkeit)를 제시합니다. 이 ‘주의’ 개념은 오늘날의 관람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개념일까요? 아니면 17세기 홀란트라는 특수한 맥락에 강하게 묶여 있는 개념일까요?

 

리글은 미술작품의 구성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심적 삶의 현현을 의지와 감정, 주의의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는 이 세 요소를 일종의 변증법적 구도 안에서 꽤 도식적으로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것들은 상대적 개념일 수밖에 없으므로 책의 여러 부분에서 그다지 엄밀하고 일관되게 논의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기본적인 도식은 이렇습니다. 의지는 그림에 재현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서사적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조형적 요소들 사이에 종속적 질서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순수한 능동성을 보인다고 설명됩니다. 반면 감정은 외부 세계와의 조우를 통해 발생하는 파토스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수동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이렇듯 능동성과 수동성의 양극단에 위치하는 의지와 감정 사이에, 양자의 중도적 성격을 가진 주의가 있다는 것이죠. 주의에는 ‘무관심적’이라는 특성이 결부됩니다. 리글은 서양미술사의 초기 단계부터 이 세 요소가 모두 관찰된다고 말하면서도 의지를 로만적 특성, 감정을 인도 게르만적 특성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종속에 근거해 구성된 의지의 회화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대표된다는 점입니다. 의지의 회화만큼 빈번히 거론되지 않는 감정의 회화는 종종 ‘알프스 이북’으로 표현되는 지역의 기독교 중세 전통에 느슨하게 연합됩니다. 알프스 이남의 고전주의와 알프스 이북의 고딕 전통은 서양미술사를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인 대립항입니다. 리글이 이 둘을 의지와 감정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은 둘 중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세 번째 개념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만적인 것과 게르만적인 것의 대비로부터 전개되는 이 도식 전체에서 헤겔 이후 미학의 흔적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도식과 별개로, ‘주의’ 개념은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여러모로 영감을 주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것이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관련된 개념이라는 점, 특히 그림 속에서 그림 바깥의 관람자를 향해 던져지는 특정한 종류의 시선을 다룬다는 점에 착안해 리글의 주의를 로라 멀비의 ‘응시’ 이론과 연결하는 연구도 이뤄진 바 있습니다. 물론 미술사적으로 그림 속의 한 인물이 관람자를 바라봄으로써 그림 속 사건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장치는 단체초상화의 등장보다 훨씬 이전부터 즐겨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리글은 이 주의 개념을 단체초상화라는, 현대 단체사진의 전신과도 같은 특수한 장르의 맥락에서 읽어냈고 이러한 점이 사진 이론과의 연속성을 형성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Q. 단체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요즘 사람들이 가족사진, 단체사진을 찍는 것과 유사해서 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시각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구나, 라는 생각에 약간 코믹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왜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단체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화가를 고용해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는 물론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한 계층에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초상화는 무엇보다 훗날의 사진이 수행하게 되는 기능을 대신했기 때문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고 기억하고자 남기는 특별한 기록물이기도 했죠.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에서 보듯 부르주아 계층 남녀의 혼인 서약을 기록한 그림이 그런 예입니다. 단체초상화 역시 ‘사회적 관습에 부응하는 대외적 이미지’를 영구적으로 기록하기 원했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초상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 경우 의뢰인들은 특수한 사회적 목적 아래 작동하는 단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림에 표현되기를 원했습니다. 때로는 술잔을 나누고 동료애를 담은 시선과 몸짓을 교환하는 만찬 장면을 통해, 때로는 모두가 진지하게 공통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현장을 통해, 혹은 현대의 단체사진처럼 구성원들이 도열한 상태로 말입니다. 단체초상화를 의뢰받은 화가들은 많은 수의 인물을 하나의 단체로서 기록하고 선보여야 하는 과제를 수행했습니다. 홀란트 단체초상화에는 길드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 동료에 대한 신뢰와 우애, 경우에 따라 직업의식 등이 담겼으며 그중에서도 자경단 초상화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킨다는 공동체 의식과 그 능동적 위상에 대한 자부심 등이 나타납니다. 리글은 종교개혁과 독립전쟁을 둘러싼 17세기 홀란트의 지정학적 맥락에서 이런 종류의 각성을 심지어 민주주의적 시민의식의 발로로까지 평가했습니다. 특히 자경단 대장과 부관의 우월적 지위에 따른 종속적 구성이 아니라 인물들 간에 대등한 병렬적 구성이 두드러진 그림들에서 17세기 홀란트의, 암스테르담의 예술의욕을 읽어내고자 했죠. 

 

 

지은이 

 

알로이스 리글 Alois Riegl, 1858-1905

 

미술사학자이자 문화재 전문가인 리글은 1858년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태어나 1905년에 빈에서 사망했다. 빈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과 역사학, 미술사학을 공부한 뒤 오스트리아 장식미술 박물관과 오스트리아 미술공예 박물관에서 큐레이터 업무를 배우고 수행했다. 1894년에 모교인 빈 대학 정원 외 교수가 되었으며, 3년 후에 정교수로 취임했다. 미술사학에서 리글은 동료이던 프란츠 비크호프와 더불어 제1차 빈 학파의 대표 학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당대 주류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시대인 로마 후기에 주목했으며, 역시나 하위 장르로 구분되는 공예 작품들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리글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저서인 『홀란트 단체초상화』(1902 ; 2025)는 17세기 홀란트라는 한정된 시공간의 ‘예술의욕’을 단체초상화라는 특수한 장르의 그림들을 통해 규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존의 양식론적 형식 분석의 방법론에 작품의 내용에 관한 관점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 밖의 저서로 Altorientalische Teppiche (1891), Die spätrömische Kunst-Industrie nach den Funden in Österreich-Ungarn (1901), 『기념물의 현대적 숭배 : 그 기원과 특질』(1903 ; 2013), Die Entstehung der Barockkunst in Rom (1908), 그리고 리글이 1897~98년, 그리고 1899년에 각각 남긴 수고와 강의록을 정리하여 사후 출간된 저작 『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1966 ; 2020)이 있다.

 

 

옮긴이 

 

정유경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2』(2015, 공저), 역서로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건축강의』(2015), 브라이언 마수미의 『가상과 사건』(2016), 알로이스 리글의 『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2020) 등이 있다.

 

 

추천사

 

『홀란트 단체초상화』는 리글이 당대를 특징짓는 것으로 여긴 유아론에 대한 비판이다. 이 책은 재현적 미술조차도 재현의 문제를 어떻게 초월할 수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단순히 세계를 재현하는 데 기여하는 대신 미술은 관람자와 더불어 세계를 공유하기를 열망할 수 있었다. ― 매거릿 올린 『알로이스 리글의 미술 이론에서 재현의 형식』

 

『홀란트 단체초상화』 전반에 걸쳐 리글은 관람자와 묘사의 권력관계를 주제화한다. 그는 지배와 종속, 능동성과 수동성, 자기중심적인 권력의 주장과 그에 복종하는 이들의 관계들을 관찰한다. 리글의 관람자에 대한 관심은 상당 부분 그가 관람자/묘사 관계에 부여한 정교한 역학에 기대고 있다. ― 매거릿 아이버슨 『알로이스 리글, 미술사와 이론』

 

벤야민과 리글 미술사의 조우는 20세기 문화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벤야민은 리글의 관념들을 자신의 작품에 포함시키고, 맞추고, 그 안에서 변형시켰다. 벤야민의 전체 저술 전반에 걸쳐서, 이 오스트리아 미술사가의 저작에 대한 명확한 참조가 나타난다. 『로마 말기의 미술 산업』과 『홀란트 단체초상화』는 “[예술 작품의] 의미-내용은 그 재료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리글의 기본적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마이클 굽저 『시간의 가시적 표면』

 

 

책 속에서

 

단체초상화를 거부하는 태도가 어디에 근거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현대의 관람자가 피상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단체초상화의 인물들은 서사적 행위를 하지 않고, 설령 서사적 행위가 나타나더라도 중도에 멈춘 듯 단편적일 뿐이다. 그런 그림은 종종 반쯤 지루하고 동기가 없어 보이며 따라서 솔직히 천한 그림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서문, 20

 

홀란트 회화는 역사화에도 가능한 한 서사적 행위가 없을 것을 요구했다. 역사화가 하나의 회화 장르로서 환영받을수록, 서사적 행위는 처음부터 그저 요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모든 서사적 행위는 한편으로 일정하게 형태를 왜곡하는 효과를 낳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 또한 이것이 주된 이유인데 ― 관람자의 주의를 인물 자체에서 떼어냄으로써 초상으로서의 효과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 I. 전 단계, 51

 

때때로 거의 동물적인 헐벗은 삶의 의지로 떨어질 지경이던 초기 초상화의 무감한 주의는 디르크 야콥스의 이 성숙한 말기 작품들에서 극복된 것으로 보인다고 자신 있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주의 깊은 공감의 회화, 해학의 회화, 진심으로 몰아적인 참여의 회화가 시작되었다. ― 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1기 (1529~1566), 164

 

관찰하는 주체를 전제하는 것은 이제 새로운 요소가 아니었고, 홀란트 대중의 표상에 이미 일반적으로 폭넓게 편입되었으므로 그 점을 강렬하게 구체화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제스처의 소멸은 풍속화적 모티프의 도입과 마찬가지로 주관주의적 구상의 증대를, 대상의 주관화를 통한 바로크적 이원론의 극복을 향한 늘어난 경향을 보여주는 두 번째 징후이다. ― 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1기 (1529~1566), 175

 

시골 사람들의 우둔함은 도시인들에게 불필요하고 불쾌한 것,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브뤼헐은 이 농부들을 묘사하면서 관람자들에게 그들이 그런 식으로밖에는 처신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가피한 인상을 주는 법을 알았으므로, 저 불쾌하고 낯선 것은 조화롭고 명료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고 관람자가 예술작품에서 얻고자 하는 구원의 효과를 전달했다. 그리하여 오로지 특별한 것을 통해서만 영원한 것을 구체화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과거의 역사화와는 달리, 풍속화는 일상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고양했다. ― 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1기 (1529~1566), 189

 

우리는 미술사에서 예술의욕이 근본적으로 고립을 지향하는 경우에 사선을 찾아볼 수 없다. 고대 오리엔트 미술, 로마 말기 미술, 중세 미술이 그러한 예이다. 반면 평행면에서 사물들의 접속을 추구하는 미술은 사선을 원한다. 그에 따라 사선은 그리스 고대를 전체적으로 장악했고, 구성에 관한 한 이 시대 미술의 성격을 규정했다. ― I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2기 (1580~1624), 213

 

활발한 상호소통을 선보이는 것은 인물들에게 상응하는 외적 움직임을 부여할 능력이 있을 경우에 가능했다. 코르넬리스 코르넬리스는 당시에 이미 이것을 상당한 수준에서 해낼 수 있었고, 그리하여 판 만데르는 자신이 이에 대해 경탄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물론 거기에 이탈리아 화가들의 유려한 우아함과 장엄함은 없지만, 사수들의 거친, 거의 투박하다시피 한 유형은 현대의 관람자가 보기에는 그만큼 더 자연에 충실한 것, 즉 주관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보일 뿐이다. ― I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2기 (1580~1624), 252

 

초기 초상화 속 인물들과 그림 외부의 능동적 소통은 눈의 언어에 국한된 탓에 (그것이 화가의 의도에 따라 순수한 심적 소통을 지속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관람자에게는 단절되어 보이므로, 이 그림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다 보면 그것이 현대의 단체사진과 치명적으로 유사하게 여겨질 수 있다. 단체사진은 주지하다시피 예술적 목적이 아니라 소위 기억술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얼굴을 두루 살펴보는 수고를 해 본 사람이라면 곧, 거기서 최성숙기의 그리고 (바로 내적 통일성이 상대적으로 억제된 덕분으로) 가장 전형적인 홀란트적 미술작품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 IV.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3기 (1624~1662), 315

 

렘브란트가 말년에 그린 네 번째 단체초상화는 간부진 그림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당연한 질문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회화 영역에서 자신의 예술적 문제를 지칠 줄 모르고 해결해 나간 다재다능한 렘브란트가, 이 테마를 받아들이는 데는 왜 그렇게 뜸을 들였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간부진 그림은 그의 청년기부터 계속해서 인기가 올라갔고, 능력 있는 신사들을 그렸을 경우 후한 사례를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화가가 이 테마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 IV.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3기 (1624~1662), 370

 

불가항력으로 주어지는 것은 미술 장르 자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심적인 요소와 물리적인 요소를 분리된 것 또는 결합된 것으로 보고 미술작품에서 그와 같이 재현하고자 하는 최상위의 예술의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예술의욕은 그때마다 그것에 들어맞는 미술 장르를 욕구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창조하고 선택한다. ― IV.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3기 (1624~1662), 460

 

모든 생명은 개별자인 나와 주변 세계의, 즉 주체와 대상의 부단한 투쟁이다. 문화인은 대상 세계에 대하여 순수하게 수동적인 역할, 즉 대상 세계를 통해 자신이 조건 지어지는 역할을 참을 수 없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대상 세계의 이면에서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이 대상 세계에 대한 관계를 자립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통제하고자 한다. 이 또 다른 세계는 (가장 넓은 의미의) 예술을 통한 그의 자유로운 창조로서, 그가 개입하지 않은 채 생겨나는 자연의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게 된다. ― IV.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3기 (1624~1662), 494

 

이전에는 적당히 자연스럽다고 평가되던 우발적으로 나란히 놓이고 연속되는 이미지들, 내적 맥락 없는 실물들의 집적으로 여겨지던 것에 대해 리글은 홀란트 미술품의 유기적 통일성을 그저 막연히 느낄 뿐 아니라 명료하게 인식하고 이 미술이 고유성을 위해 벌인 극적인 투쟁사를 의식적으로 추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일구어냈다. ― 편집자 후기, 503~504

 

 

목차

 

옮긴이 해제  8

발행인 머리말  17

서문  19

 

I. 전 단계  29

종교적인 역사화와 관련된 최초의 단체초상화 :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헤르트헨 판 하를럼의 세례자 설화 그림에 등장하는 요한 기사수도회원들  31

종교 단체의 독립적 단체초상화 가운데 최초인 예루살렘 순례자 초상  57

얀 판 스코럴이 그린 하를럼의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59

얀 판 스코럴이 그린 세 점의 위트레흐트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63

안토니스 모르의 위트레흐트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72

베네치아의 단체초상화  75

플란데런의 단체초상화  82

 

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1기 1529~1566  85

디르크 야콥스의 1529년 작 사수단 그림  87

작자미상의 1531년 작 사수단 그림  102

코르넬리스 토이니센의 1533년 작 사수단 그림  109

디르크 야콥스의 1532년 작 사수단 그림  124

작자미상의 1534년 작 사수단 그림  130

1554년~1566년 사이, 상징주의적인 첫 번째 시기 단체초상화의 두 번째 계열  134

작자미상의 1554년 작 사수단 그림  136

작자미상의 1557년 작 사수단 그림  146

첫 번째 상징주의적 시기 후반에 그려진 디르크 야콥스의 사수단 그림  153

디르크 야콥스의 1563년 작 사수단 그림  157

디르크 바렌츠  169

디르크 바렌츠의 1562년 작 사수단 그림  172

디르크 바렌츠의 1566년 작 사수단 그림  180

홀란트 미술에서 풍속화적인 것의 도래와 의미  187

 

I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2기 1580~1624  197

코르넬리스 케텔이 그린 디르크 야콥스 로제크란스 대장의 분대  201

피터르 이삭스의 1596년 작 사수단 그림  220

아르트 피터르스  228

아르트 피터르스의 1599년 작 사수단 그림  230

해부학 교실과 간부진 그림의 등장  236

아르트 피터르스의 <세바스티안 에흐베르츠 박사의 해부학 수업>  237

대 피터르 피터르스의 1599년 작 간부진 그림  241

하를럼 단체초상화의 시초  246

코르넬리스 코르넬리스의 1583년 작 사수단 그림  248

코르넬리스 코르넬리스의 1599년 작 사수단 그림  259

프란스 피터르스 드 흐레버가 1619년에 그린 사수단 그림  267

암스테르담 단체초상화에서 공간과 시간의 외적 통일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법  272

코르넬리스 판 데르 포르트의 1618년 작 간부진 그림  276

일명 피터르 하설라르 소위의 분대  282

랜스의 숲이 보이는 사수단 그림  283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  288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의 1624년 작 간부진 그림  289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의 1625년 작 사수단 그림  294

니콜라스 엘리아스의 1628년 작 간부진 그림  298

 

IV.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3기 1624~1662  303

토마스 드 케이저  304

드 케이저가 1619년에 그린 <세바스티안 에흐베르츠 브레이 박사의 골학 강의>  304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2년 작 사수단 그림  308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3년 작 사수단 그림  313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8년 작 암스테르담 시장들  320

렘브란트  324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326

렘브란트의 음영법  334

<야경>  343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364

<직물 견본 검사관들>  369

바르톨로메우스 판 데르 헬스트  388

대장 룰로프 비커르와 부관 얀 미힐스 블라위의 중대  390

1648년 작 <사수단 만찬>  395

1653년 작 성 세바스티아누스 길드 간부진 그림  400

관학적 경향의 출현  405

호베르트 플링크  409

페르디난트 볼  416

니콜라스 마스  422

1616년~1667년 하를럼의 단체초상화  424

프란스 할스  426

1616년의 성 게오르기우스 사수단 그림  427

하를럼 성 하드리아노 사수단 조합을 그린 1627년 작  434

1627년 작 하를럼의 성 게오르기우스 사수단 그림  438

1633년 작 하를럼의 성 하드리아노 사수단 그림  440

<빈약한 중대>  445

1639년의 하를럼 성 게오르기우스 길드 사수단 그림  449

하를럼에서 간부진 그림의 등장. 하를럼 성 엘리사벳 병원의 간부들  452

1664년 작 <하를럼 양로원의 남성 운영자들>과 <하를럼 양로원의 여성 운영자들>  464

헨드리크 폿의 하를럼 성 하드리아노 길드 사수단 그림  470

하를럼 사수단 그림 말기. 피터르 사우트만  475

하를럼 단체초상화의 마지막 시기  478

이 시기 단체초상화에서 나타나는 노벨라적 성격의 본질  479

얀 드 브레이  482

회고  493

 

편집자 후기  499

편집자 참고문헌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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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2025.12.25 출간 l 신국판 변형 145x210mm, 무선제본 l 카이로스총서121, Cupiditas

정가 32,000원 | 쪽수 528쪽 | 무게 648g | ISBN 9788961954105 93600

도서분류  미술, 서양미술, 네덜란드 회화, 단체 초상화, 17세기 미술,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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