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달빛

표광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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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표광소 시인은 소재나 관점에서의 협소함을 넘어 삶의 힘의 다양한 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포착∙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서로 연관된 경향이 눈에 띈다. 그 하나는 그가 인간과 비(非)인간의 연속성을 시에 구현하기 시작한 점이다.

 

 

해설

 

시인 표광소의 첫 갈무리

 

정남영(경원대 교수, 문학평론가)

 

표광소가 소설도 내고 산문집 같은 것도 내더니 이제서야 시인으로서 첫 갈무리를 한다. 나로서는 이런 그가 시인으로서 진정한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시집해설을 맡았다. 내가 표광소를 처음 만난 것은 10여년 전 그가 ‘노동해방문학실’과 관련하여 활동하던 때이다. 나도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노동해방문학실’의 활동은 온몸을 던지는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시창작에 유리하지 않은 측면을 갖고 있었다. 머지 않은 미래에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성급한 전망에 빠져있었으며, 그래서인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열어놓고 탐구함으로써 활동의 다양성을 지향하기보다는 미리 방향이 정해진 활동을 ‘얼마나 치열하게 하는가’에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작가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미 정해진 것(‘정통 견해’)의 전달자로서 규정되기 쉬웠다.

몇 년 전인가 표광소가 개인적으로 내게 보여준 시들에는 당시 활동의 부정적인 영향이 상당 부분 극복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시집에서는 맨 뒷부분에 있는 네 편의 시들--「풀」, 「문」,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너희가 찾으려는 그것이 아니다」, 「지리산의 달빛」--이 바로 그러한 유형에 해당한다. 「풀」에서 보이는 과도하고 조급한 흥분(“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일어서라/ 최후의 한 순간까지 일어서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일어서라”),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너희가 찾으려는 그것이 아니다」에서의 교설조(“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너희가 지키는/ 모든 생산수단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너희가 강탈해 간/ 우리의 권력이다”)는 이러한 취약점의 전형적인 예이다. 빨치산 투쟁을 다룬 「지리산의 달빛」의 경우 적대의 성격--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을 탐구해 들어가거나 아니면 필사적인 싸움의 상황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어펙트들의 구현에 이르지 못하고 ‘적’을 낮추고("미군정청은 아가리를 벌릴 때마다 예절 바르게/ 세련된 노린 냄새를 뻑뻑 풍기고 있었다") ‘자신’의 투쟁을 비장하게 제시하는 데 치중한다. 맑스가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어 18일」에서 통찰하였듯이, 해방을 위한 싸움이란 “오로지 자신의 상대가 땅에서 새 힘을 받아서 자신의 앞에 전보다 더 크게 일어서도록 하기 위해서 상대를 넘어뜨리는”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진정한 ‘적’은 단순한 욕이나 경시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만일 ‘적’을 낮춘다면 그것은 곧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시들--아마도 표광소가 자신의 충실한 기록을 위하여 실었는지도 모른다--이후에 쓰인 시들은 그가 점차 그러한 영향에서 벗어나서 열려진 삶의 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위의 시들에 바로 이어졌을 ‘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연작들에서 이미 새로운 변화가 엿보인다. 보통 노동현실을 읊는 시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은 노동자가 처한 현실의 비참함에 시야가 국한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노동자들의 삶의 비참함에 압도되어 노동자들을 대상--동정의 대상, 좁은 의미의 ‘정치’의 대상--으로 떨어뜨림으로써 그 자율적 잠재력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비참함에 대한 분노에 압도되어 사태를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 겉흥분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미리 정해진 정치적 해법의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다. 이 해법은 비참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분노를 현실적 행동으로 터뜨릴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권유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연작들은 과도한 흥분이나 자기탐닉적 비장감이 없이 그리고 미리 고정된 해결책의 주장이 없이 한 노동자의 삶이 다가오게 한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싹쓸바람이 쓰레기를 한꺼번에 타도(打倒)한 세상에서만 살고 싶은”(「지붕--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3)」) 간절한 소망이 노동자 구보 씨에게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제 당장 실현될 어떤 것으로 오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열악한 생활현실--지붕을 “구청 철거반원들이 깨뜨린” “누추하고/ 누추한/ 방”(「지붕--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3)」)--과 패배의 현실--“트럭에 실려 쓰레기 더미 위에 버림 당한 노동자 구보 씨”(「섬―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5)」)--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 상황에의 순응이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아니다. 그 “누추하고/ 누추한/ 방”의 깨어진 지붕으로 스며드는 “지리산 원시림처럼 따뜻한/ 겨울 햇살”의 존재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밝은 힘의 잠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아랫도리를 훌렁 벗은 가랑이가 서슴없이 벌어진/ 겨울나무들이/ 간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흙 속에 깊이 숨긴”(「바람소리― 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2)」)과 같은 구절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숨겨진 삶의 힘을 암시한다. 또한 “쓸어도/ 쓸어도/ 쌓이는/ 어두운/ 냄새를/ 쓸고/ 쓸고/ 쓸었다”(「독립문―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1)」)와 같은 구절도 그 뒷부분("쓸고/ 쓸고/ 쓸었다")이 환기하는 끈질김이 결코 범상하지 않다.

이러한 변화에서부터 시작하여 표광소는 소재나 관점에서의 협소함을 넘어 삶의 힘의 다양한 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포착∙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서로 연관된 경향이 눈에 띈다. 그 하나는 그가 인간과 비(非)인간의 연속성을 시에 구현하기 시작한 점이다. 맑스가 그의 「경제철학수고」(1844)에서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다’라는 명제로 통찰하였던 이 연속성은 모든 사물을 자본의 가치화의 한 요소로 환원시키는 부르주아적 사고에서는 배제되어 왔음이 물론이지만, 사회주의적 사고에서도 마찬가지로 잊혀져 왔다. 1875년 독일 노동운동의 두 분파--베벨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과 라살레가 이끄는 독일노동자총연합--가 통합되면서 채택된 ‘고타강령’은 인간의 노동을 모든 부의 원천으로 봄으로써 노동의 존재를 긍정하고 결과적으로 인간의 활동을 노동으로 환원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맑스는 “노동 자체는 자연력의 하나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일 뿐”이라는 사실과 “노동이 사회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의하여 노동이 부와 문화의 원천이 되는 데 비례하여 가난과 궁핍은 노동자들 사이에 성하게 되고 부와 문화는 비노동자들 사이에서 성하게 된다”는 사실, 즉 노동자들에게 노동은 “사회적 저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함으로써 이 강령을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고타강령 비판」, 1875). 이러한 맑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절대화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사회주의적 사고에서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의 절대화는 현실사회주의권에서 ‘생산력주의’로 발전하며 서유럽과는 다른 형태의 자본축적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였다. 발터 벤야민이 그의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1940)에서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을 다시 원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20세기 후반부에 와서 한편으로 환경문제의 심각성이 널리 인식되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이 지구 전체를 자신의 가치화 공간으로 장악하게 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연속성에 대한 깨달음은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표광소의 관심이 좁은 의미의 정치는 물론 좁은 의미의 사회에도 국한되지 않고 인간과 비인간의 연속성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이미 ‘노동자 구보 씨의 일일’ 연작에서 힐끗 모습을 드러낸 이러한 연속성은 다른 시들에서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달래강」, 「바다」, 「새」, 「신탁」 등에서 인간사의 고통스런 일들은 자연과의 이러저러한 연관 속에서 제시되며, 「바닷가 공룡 발자국」에서는 인간의 시간이 장구한 자연의 시간의 한 토막임이 환기되고, 「산」에서는 산과 세간이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장 최근의 시들 중 하나일 「꽃길」에서는 출근하는 노동자 구보 씨가 주위의 자연사물들과 연속체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시들에서 표광소는 자연 그 자체를 낭만주의적 태도로 미화하는 것도 아니며 자연을 단지 인간사의 배경으로 삼거나 인간적 현실의 알레고리로 삼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달래강」에서는 인간사에서의 머묾(부등켜안음)과 떠남이 자연에서의 머묾과 떠남(흐름)과 병치되는데, 양자는 서로 이질적인 벡터로서 공존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위에서부터 덧씌워 하나로 환원하는 일반화된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실상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삶(의 힘)과 죽음(의 힘)을 가르는 일이다. 예의 연속성의 핵심도 단지 소재로서 인간과 자연 양자를 공히 다루는 데 있다기보다는 이 삶의 힘을 다수성의 관점에서 즉 다양한 힘들의 리조움(rhizome)적 결합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서로 다른 힘들을 가로질러 잇는 또 하나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채석장」 같은 시는 힘의 시적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해 볼 수 있다.

 

빛 좋은 바윗장들이 깨어지면서 빛나게/ 웃었다

흩어진 화약냄새의 노란 숲을 헤치고 생동생동/ 웃음소리는/ 바람에 피 묻으며/ 아프게 뼈 부서진/ 깃을 나부끼며/ 공중으로 헤엄쳐 다가왔다

너에게 다가설 때마다/ 불티처럼/ 지워지던 산의 가지런한/ 치열(齒列)이 웃었다

(전문)

 

여기서 시인은 채석장의 모습을 단순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훌쩍 넘어 산의 존재가, 그 힘이 물씬 느껴지도록 하고 있다. 시인은 산이 노동자들처럼 자신의 존재가 깎이는 처절함을 겪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흩어진 화약냄새의 노란 숲,” “바람에 피 묻으며,” “아프게 뼈 부서진”). 그러나 이 처절한 상황은 처절함의 색깔만으로 칠해진 채, 즉 그 처절함에 갇힌 채 전달되지 않는다. 산의 “웃음소리”가 시 전체를 전혀 다른 종류의 힘으로 채워서 산을 역경 속에서도 살아있는 하나의 자율적 힘으로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앞에서 언급한 「꽃길」에서 등장하는 노동자 구보 씨를 다시 주목할 수 있다.

 

봄비에/ 꽃잎/ 진다

나부끼는/ 진달래 꽃잎에/ 입 맞추는/ 바람의/ 떨리는 입술에/ 진달래꽃 빛/ 살 맞추는/ 여자의/ 기다란 목덜미를 쓰다듬는/ 바람의/ 떨리는 꽃빛 손에/ 손 부비며/

출근하는/ 노동자 구보 씨의/ 우산 든/ 오른손/ 가방 든/ 왼손/ (전문)

 

확실히 이는 ‘노동자 맏?씨의 일일’ 연작들에서처럼 현실에 압박된 것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노동자의 처지야 (「방 한 칸」이 보여주듯이 ) 그 사이에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크게 변한 것이 있으랴만 (표광소가 갑자기 노동자의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미화하기 시작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원시림처럼 따뜻한/ 겨울 햇살”이 구보 씨를 실제로 휩싸고 존재하는 힘으로서 시야에 포착된 것이다.

이러한 힘은 정치적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 하나의 중앙의 지도 아래 일사불란한 대오를 갖추고 응집하였던 힘과는 분명히 다르다. 가장 최근의 시인 「꽃」은 이러한 힘의 성격에 대한 탐구로 읽힌다.

 

산산이 산을 허물어다오 산자락을 내닫는 험준한 계곡 푸른 숲을 지나 가마아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천천히 바위를 굴려다오 바람이여, 힘껏 돌을 던져다오 투명한 눈물처럼 흐르는 별똥별보다 더 많이 어둠에서 어둠으로 거듭 추락하는 소나기보다 더 빨리 더 깊이 아으, 적의(敵意)를 던져다오 거듭 던져다오

무너진 산을 깨뜨려다오 구르는 바위를 깨뜨려다오 부서진 돌을 깨뜨려다오 야윈 모래를 깨뜨려다오

부드러운 흙가슴에 씨앗을 깊이 더 깊이 품어다오 떡잎 틔워다오 힘껏 더 힘껏 아으, 꽃 피워다오 시간이여 (전문)

 

이 시가 탐구하는 힘은 산을 허물고 바위를 깨뜨리는 파괴력을 지닌 것이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씨앗을 품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 즉 창조, 성장, 건설, 구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드러운 흙가슴”이 필요하다. 파괴는 파괴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부드러운 흙가슴”을 생성하기 위한 분자화의 과정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이 모색하는 힘은 복합적이다. 이 시의 율동이 보여주는 힘참, 부드러움의 조건을 위한 파괴, 부드러움 그 자체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노랑만병초」는 「꽃」과 보완적으로 읽힐 수 있는 시이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두 다리에 기를 모으고도 흔들리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두 발바닥에 뿌리를 내린/ 한 쌍의 괴석(怪石)처럼/ 노랑만병초는/ 백두산 꼭대기에서/ 뿌리를 내렸다/ 밝은 햇살 가득/ 푸른 싹을 틔우면서/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화산처럼 폭발했다

(전문)

 

「꽃」이 상황을 압도하는 장쾌한 면을 주로 보여주고 있다면 「노랑만병초」는 상황의 거센 압력에 힘들어하는 모습(“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을 포함하고 있다. ‘노랑만병초’는 파괴적인 힘이 이니라 열고 “틔우”는 힘으로써 이 상황을 견뎌내며, 시인은 이러한 견뎌내는 힘을 “화산처럼 폭발했다”라는 구절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경향은 삶의 내재성의 긍정 즉 삶의 가치, 척도, 목적은 삶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이는 우선 삶의 힘의 정점이 기쁨의 어펙트로 표현되는 데서 시사된다. 「우두커니」에서 시인은 매미와 대나무의 삶의 정점--매미의 노래와 대나무의 꽃--을 “비로소 한 걸음씩 기뻐하기 시작한 한 사람”과 연결시킴으로써 “한 걸음씩 기뻐”하는 어찌 보면 조그맣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을 하나의 중대한 성취로 제시하고 있다. 「나무야」 역시 나무의 삶의 정점인 꽃을 기쁨으로서 제시한다(“살다보면 살구나무에 살구 기쁨 한사코 열리고/ 대추나무에 대추 희망 빨갛게 여물까?”). 「기쁨의 원인」에서는 삶에 존재하게 마련인 슬픔 자체를 기쁨의 원인으로 돌리고자 하는 역전(逆轉)의 소망이 제시된다. 이렇게 삶의 기쁨을 삶의 정점으로 삼는 것은 삶의 힘의 가치를 그 힘을 발휘한 데 대한 대가(代價)--예컨대 물질적 이익이나 권력의 획득--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힘의 최고조의 발현 자체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자기가치화의 강력한 긍정을 함축한다.

「자유」에서는 내재성의 문제가 정치적인 맥락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기쁜 일은 뜻밖에 오지 않는다 기쁜 일은 뜻의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바로 당신의 뜻 안에서 온다 해방은, 눈물과 한숨의 시간을 견디며 꾸준히 일하다가 꾸준히 버티다가 세차게 싸우다가 천지가 개벽하게 마련한 바로 당신의 뜻 안에서 비로소 온다 안개가 등대불빛의 가위를 거듭 눌러도 눈물과 한숨을 가뭇없이 티끌처럼 반드시 쓸어내는 항구로 배를 몰아가야 하는 당신은 지금 당신의 벼락바람 뜻밖의 자유를 몰아내야 한다

(전문)

 

미리 정해진 정치적 해법에의 의존은 거부되며(“기쁜 일은 뜻의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바로 당신의 뜻 안에서 온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은 비록 그것이 자유일지라도 몰아내어져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당신은 지금 당신의 벼락바람 뜻밖의 자유를 몰아내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경향들은 앞으로 더욱 발전시켰으면 하는 강점 혹은 잠재력으로서 거론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표광소가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면 하는 몇 가지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염전」, 「가을 은행잎」, 「낙엽」, 「무지개」 같은 시들은 삶의 중요한 문제를 탐구해 들어가기보다는 비유를 통하여 소재의 간결하면서도 재치있게 표현하는 실험을 한 듯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실험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또한 재치 자체도 하나의 성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좋은 시를 낳는 핵심은 단순한 재치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거시적 차원의 탐구를 미시적 탐구와 연결시키는 것, 큰 것과 미세한 것을 연결시키는 것, 큰 것에서 조그만 것을 보고 조그만 것에서 큰 것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재치란 이러한 연결의 한 고리로서 기능을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제시된다면 곧 하나의 상투적 어구로 전락하고 만다.

간결하고 재치있는 비유 이외에 많은 시인들을 유혹하는 미시적인 것은 감각적 요소(특히 시각적 요소)이다. 감각적 요소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하여 내용없는 일반적 어구들을 단지 운율만 맞추어서 배열하는 문제점을 벗어나서 무언가 현실적인 것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 역시 함정을 지닌다. 시는 시 자체의 고유한 시간--내적(內的)인 시간--을 창출함으로써 살아있게 되는 것인데, 감각적 요소의 구현은 외적 시간--시계가 가리키는 물리적 시간--에 종속되기 쉽기 때문에 (즉 사실적 묘사에 머물기 쉽기 때문에) 내적 시간을 창출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문제를 「쑥냄새」를 통해 한번 살펴보자.

 

산을 오르며/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약수를 긷는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물긷는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아이들은 물총을 겨냥한 자세로 쫓고 쫓기는/ 전쟁놀이에 지치고/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은 노인들은/ 살아온 날들의 무용담(武勇談)을 전언(傳言)하기 부산한/ 어스름/ 흑석동 산허리 동네 단칸 신혼방의 문을 잠그고 나란히/ 물터까지 산책 나온 신랑과 각시가 속닥이는/ 입술과 입술에서/ 묻어오는 산들바람 속에서/ 묻어오는 쑥냄새는/ 저마다 하나 이상의 무거운 물통을 채워들고/ 산을 내려가는 개나리 꽃무리 속으로/ 저녁 설거지 물 소리 속으로/ 가파른 골목의 라일락 향기 속으로/ 매화향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전문)

 

이는 마치 약수터를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외적 시간의 경과에 따른 영상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다만 이 시의 제목을 제공한 “쑥냄새”나 “라일락 향기,” “매화향기” 등과 같은 후각적 요소들, “묻어오는”과 같은 촉각적 요소, “속닥이는,” “설거지 물 소리”와 같은 청각적 요소들이 어울린 종합적 감각의 영상이다. 그러한 종합적 감각의 풍경화로서 이 시를 하나의 성취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시에서 정말로 주목할 부분은 감각의 시간과는 상이한 시간을 도입하는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은 노인들은/ 살아온 날들의 무용담(武勇談)을 전언(傳言)하기 부산한/ 어스름”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청각(“부산한”)과 시각(“어스름”)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사회에서의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한 영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이 ‘다른 시간’은 “아이들”과 아마도 곧 아이를 가질 신혼부부와 “노인들”이 이 시에서 명시적으로 거론된 인물들이라는 점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아쉽게도 이 시에서 더 이상 발전되지 않는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실 감각을 순전한 생물학적 능력으로 환원시키는 것 자체가 경직된 고정관념이다. 감각은 그 직접성--감각은 감각기관과 대상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하여 발생한다--으로 인하여 미시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지만, 실제로 ‘인간적’ 감각은 인간의 존재와 활동의 역사의 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간의 실천적 사유와 실천적 활동의 변화는 감각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맑스가 그의 「1844년 경제철학수고」에서 “감각은 그 실천 속에서 직접적으로 이론가가 된다”는 명제로 통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감각의 미시적 섬세함의 문제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이고 삶이란 과연 무엇이며 역사란 또 무엇인가 하는 거시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연결되어 있는 이것을 시가 포착∙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을 연결시키려고 의도하지만 그 방식에서 문제점을 보인 경우도 없지 않다. 「물방울」과 「구름너머」가 그 예이다. 「물방울」의 경우 “남을 정화(淨化)시키고/ 자기의 몸이 오염(汚染) 당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한/ 시간을 넘어,” “먼 하늘과 붉은 땅 사이의/ 그리운 어깨를 걸고” 등의 상투적이거나 밋밋한 구절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서 살아있는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반복되는 “어디로 가나”라는 구절은 기계적인 것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내용의 면에서는 물방울의 존재에 대한 탐구가 느껴지기보다는 물방울의 존재의 신비한 미덕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에 과도하게 탐닉한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취약점이 주는 교훈은 굳어지고 상투화된 인식들(=어구들)을 그대로 연결하는 것으로는 앞에서 말한 리조움적 결합을 구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표광소는 그의 존재 전체에 배어있는 모든 굳어진 것들, 모든 상투어들을 부수어서 그야말로 자신을 시가 피는 “부드러운 흙가슴”으로 만드는 작업을 더욱 치열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진 강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길이다.

물론 이 작업을 해 나가는 가운데 문득 모든 것이 부서진 상태 즉 혼돈의 문턱에 도달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혼돈 자체가 창조는 아니기에 그는 혼돈과도 싸우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예술이 혼돈과 싸움을 한다면 그것은 견해와 싸울 무기를 빌기 위해서, 검증되고 판명된 무기로 견해를 무찌르기 위해서이다”(들뢰즈∙가따리).

표광소의 쉬지 않는 정진을 기대한다.

 

 

시인 소개

 

표광소 시인

 

1961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교 및 환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착을 공부하였다. 1991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신년호에 시 <지리산의 달빛>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표광소 시에서 주목할 경향은 삶의 내재성의 긍정 즉 삶의 가치, 척도, 목적은 삶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이는 우선 삶의 힘의 정점이 기쁨의 어펙트로 표현되는 데서 시사된다. 「우두커니」에서 시인은 매미와 대나무의 삶의 정점--매미의 노래와 대나무의 꽃--을 “비로소 한 걸음씩 기뻐하기 시작한 한 사람”과 연결시킴으로써 “한 걸음씩 기뻐”하는 어찌 보면 조그맣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을 하나의 중대한 성취로 제시하고 있다. 「나무야」 역시 나무의 삶의 정점인 꽃을 기쁨으로서 제시한다(“살다보면 살구나무에 살구 기쁨 한사코 열리고/ 대추나무에 대추 희망 빨갛게 여물까?”). 「기쁨의 원인」에서는 삶에 존재하게 마련인 슬픔 자체를 기쁨의 원인으로 돌리고자 하는 역전(逆轉)의 소망이 제시된다. 이렇게 삶의 기쁨을 삶의 정점으로 삼는 것은 삶의 힘의 가치를 그 힘을 발휘한 데 대한 대가(代價)--예컨대 물질적 이익이나 권력의 획득--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힘의 최고조의 발현 자체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자기가치화의 강력한 긍정을 함축한다. 

 

 

목차

 

서문

 

제1부

꽃 외

 

제2부

잔치 외

 

제3부

노랑만병초 외

 

제4부

인디언 펑크 외

 

제5부

이른 봄 외

 

해설 - 정남영

 

 

책 정보

 

2002.8.27 출간 l 128x210mm, 무선제본 l 마이노리티시선15

정가 5,000원 | 쪽수 128쪽 | ISBN 978898611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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