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소리 26.10.15 | [서평] 전복과 승리를 꿈꾸는 이들을 풀무질하는 책 ‘성, 인종, 그리고 계급’

[민중의소리 2026.10.15] [서평] 전복과 승리를 꿈꾸는 이들을 풀무질하는 책 ‘성, 인종, 그리고 계급’ /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s://vop.co.kr/A00001697164.html 갈무리 출판사에서 셀마 제임스가 쓰고 서창현이 번역한 신간 ‘성, 인종, 그리고 계급’의 서평을 부탁했을 때 덜컥 수락하지 말 걸 그랬다. 대략 10년째 2주에 한 번씩 페미니즘 책을 읽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지만, 고작 그 정도의 공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정도밖에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이야기하면 안 되는 책이다. 이 책의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셀마 제임스의 뜨거운 삶은 페미니즘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연구자나 지금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전달하고 소개하는 편이 훨씬 낫다. 하물며 50대 비전문가 시스젠더 남성이 이 책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수박 겉핥기에 그칠 위험이 크다.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조심 서평을 쓰는 이유다. 이 책은 여성 인권 및 반인종주의 운동가이자 작가인 셀마 제임스가 2012년에 내놓은 책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출판된 셀마 제임스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가 1952년부터 여러 책자를 내놓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참 늦었고, 너무 늦은 편이다. 도나 해러웨이, 리베카 솔닛, 마리아 미즈, 벨 훅스, 실비아 페데리치, 오드리 로드, 앨리슨 케이퍼,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한 해외 페미니즘 연구자와 작가의 책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있는데, 1930년생인 그의 책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이 마중물이 되어 그의 책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총 4부, 500쪽이 넘는 튼실한 책은 그가 1952년부터 2010년대까지 발표한 글과 연설문 등으로 채워져 있다. 운동가이자 작가인 셀마 제임스의 문제의식과 활동이 어떻게 시작해 50여 년간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뒤늦게 셀마 제임스를 만나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의 다양한 면모와 변화 과정을 아울러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첫 책으로 안성맞춤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마다 다른 의제와 문제의식에 주목하게 될 텐데,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두 가지다. 첫째, 셀마 제임스가 여성주의에 반인종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연결했다는 점이고, 둘째, 그가 연구와 집필에만 열중하는 삶을 살았던 게 아니라 운동가로 살아가면서 글을 쓰고 말을 했다는 점이다. 현장의 언어로 기록한 투쟁과 연대의 역사 후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운동가로 살면서 계속 대중을 만나고 선전·선동하고 조직해 왔기 때문인지 그의 언어는 늘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명료하고 맹렬하다. 그의 말과 글이 누구에게나 금세 와닿을 만큼 쉽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언어에는 현장의 고통과 생동감이 배어 있어 활기가 넘친다. 이러한 에너지와 정조를 풍기는 말과 글이 가장 훌륭하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모든 말과 글은 제각각 다른 특성과 스타일이 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씩씩함이 전해진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모든 책은 이성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글쓴이의 말투와 태도로 감성도 함께 움직이게 한다. 이 책은 수십 년을 꿋꿋이 싸워 온 운동가의 활기를 전달함으로써 오늘의 한국 독자를 금세 움직이는 힘이 있다. 실제로 셀마 제임스는 문제투성이인 현실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 갔다. 긍정과 낙관 없이 분노와 각오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셀마 제임스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회상하는 책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흔들림 없이 싸워 가는 모습, 의지와 희망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모습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감동을 준다. 특히 1982년 성 노동자들과 함께 런던 킹스크로스의 홀리 크로스 교회를 점거한 기록은 투쟁하는 이들이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고 싸우고 연대하며 성장하고 승리한 풍부한 경험담이다. 운동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인데, 당사자들이 스스로 운동을 잘 조직하고 운영한 기록은 한국의 수많은 투쟁과 단숨에 연결된다. 셀마 제임스는 이처럼 성·인종·계급과 맞닿은 의제에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참여함으로써 자기 의제 안에 갇히거나 퇴보하지 않으며, 교차하고 확장하는 운동의 길을 연다. 현실의 어려움을 핑계로 쉽게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그의 운동은 지도부나 지식인이 이끄는 운동이 아니라 당사자가 말하고 이끄는 운동이며, 운동의 원칙과 목표를 지켜 가는 운동이다. ‘피착취자의 각 부문이 스스로의 자율적인 힘을 느끼’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운동은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 이처럼 책에 담긴 그의 시선과 태도, 활동은 인종과 계급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사안과 구조를 연결하면서 현장성과 급진성을 지켜 가려는 이들에게 풍부한 울림을 선사할 수 있다. 여성주의와 반인종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잇다 이제 인상적이었던 나머지 부분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셀마 제임스는 여성주의와 반인종주의에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해 쓰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넓게 보고 깊게 본다.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편에서 그들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억눌리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이들을 둘러싼 구조를 파악하고 그 구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혀내는 시선은 셀마 제임스를 특별하게 한다. 지금도 셀마 제임스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셀마 제임스가 수행한 역할 가운데 ‘1972년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와 함께 저술한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을 통해 정립한 가사노동 임금 이론’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여성의 무임금 가사 및 돌봄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인정하고 임금을 요구함으로써, 여성 해방이 단순히 법적 권리 획득을 넘어선 경제적 기반의 근본적인 변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 이론이다. 이 같은 이론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여성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여성의 존재와 현실을 경제구조와 임노동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틀로 분석함으로써 여성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수행하면서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성에 대한 착취가 여성스러움을 강요하고 가부장 이데올로기로 가사노동을 전담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착취 구조의 바탕이 되었음을 폭로한 발견은 싸움의 방향과 슬로건을 탈바꿈하게 했다. 셀마 제임스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의 발견이 없었다면 이후 실비아 페데리치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가사노동 임금 분석이 더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유명한 주장의 원본을 만나게 함으로써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하고, 나아가 지금 여성·노동·반불평등 운동의 목표를 연결해 사유하게 한다. 이 주장이 낯설거나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전적으로 두 사람의 선언 이후 쌓인 투쟁의 역사 때문이다. 1930년에 태어나 여성과 사회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억눌린 이들과 꾸준히 연대한 그의 말과 글은 마르크스주의와 반인종주의, 페미니즘의 역할과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냈다. ‘우리보다 힘이 없는 사람들과 나 자신을 전적으로 일치시키’려는 이들, 낮은 곳에서 ‘새로운 정치적 전략’을 찾아가는 이들, ‘사회를 타도’하고 전복과 승리를 꿈꾸는 이들을 풀무질하는 책의 싱싱한 환희를 놓칠 이유는 없다. 어떤 문제도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지만, 투쟁은 멈추지 않았고 광장의 연대는 커지고 있으니, 우리도 책의 부제처럼 승리를 전망하며 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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