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90호 2026.08.15] 18세기 유럽, 근대화의 물결 뒤에는 ‘활동가’들이 있었다 / 성상민(문화평론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daziwon.com/?page_id=474&mod=document&uid=11493 역사를 말할 때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역사는 굵직굵직한 사건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기억하거나 말하기 쉬운 경향이 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이 제거된 채 도식적인 구도로 언급하기 쉽다는 점이다. 유럽의 근대화 과정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적인 면모와 극심한 폭력은 제거된 채 이야기 되는) ‘대항해시대’의 등장, 국제 무역의 발흥, 유럽 전반을 휘감은 중상주의적 시각, 과학 및 산업 기술의 발전, 그로 인한 산업혁명의 도래…. 이러한 과정들로만 근대를 살펴보면, 유럽의 근대화는 마치 예정되어 있던 흐름처럼 느껴진다. 아무런 저항이나 이의도 없이 유럽이 하나의 거대한 집단체가 되어 당연한 진보를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보이기도 쉽다. 그나마 산업혁명을 말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의 임노동자를 발생시킨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자의 거처를 폭력적으로 몰아내는 지본에 대한 저항이었던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정도만이 언급될 따름이다. 그나마도 모두 산업혁명에 대한 접근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몇 개의 운동을 제외하면, 정말로 유럽의 근대화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의해 흔들림 없이 추동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비록 완벽하게 제국주의로 치닫는 유럽의 폭주를 막지는 못했더라도, 분명하게 이러한 움직임에 문제의식을 느끼며 반대의 깃발을 뒤흔든 이들이 존재했다.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존재를 철저한 사료 조사를 통해 밝혀낸 역사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주류적인 시각의 역사에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거나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빠른 속도로 치달았던 문제적 시대정신에 맞서 저항했던 이들의 발자취를 발굴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졌던 존재는 다름 아닌 ‘해적’이다. 일반적으로 해적을 바라보는 시각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보물섬〉이나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작품으로 낭만화된 대상, 또는 그런 낭만화에 대한 반발로 해적의 포악함이나 무자비함에 초점을 맞추며 소위 ‘현실주의적’인 입장에 근거하여 해적을 바라봐야 한다는 시선. 마커스 레디커는 이 둘의 시선 모두에서 벗어나며 해적을 다시금 바라보기를 시도했다.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나 『히드라』, 『노예선』, 『대서양의 무법자』를 비롯한 일련의 저작에서 그는 대항해시대에서 선원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짚고, 그 지점에서 해적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되묻기 시작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의 선원은 그저 배를 모는 사람에서 그치지 않는다. 선원은 아직 근대적인 공장이 형성되기도 전부터 근대 자본주의 형성에서 중요한 존재였던 ‘해상 무역’을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임금노동자이자 집단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선원은 사회의 일반 질서에서 쉽게 발길을 들일 수 없는 사람들, 주변부에 위치한 존재들을 최대한 받아주었던 하나의 해방구이기도 했다. 억압적인 구조로 인해 형성된 집단이자 하나의 해방구라는 역설이 중첩된 곳에서, 적지 않은 선원들은 고단한 삶 속에서 저마다의 단결을 시도했다. 때로는 탈주하고, 다시 때로는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자칭 타칭 ‘해적’이 되었다. 마커스 레디커는 이러한 해적의 근원과 움직임에 근간하여, 해적을 일종의 급진주의적인 활동가로서 재해석하기에 이른다. 그에게 있어 해적은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직면한 삶의 위협에서 생존을 위해 혁명을 일으키고, 이들이 일하는 장이나 삶의 거처인 배를 하나의 ‘꼬뮌’으로서 만드는 실험을 한 실천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마커스 레디커의 연구와 주장은 18세기 유럽의 흐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의미있는 창이지만, 애석하게도 다수의 연구서가 그렇듯 대중들과는 쉽게 만나지 못했다. 꼼꼼히 시간을 들여 읽으면 당대를 다룬 어느 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점점 책을 읽는 것에 시간을 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연구서는 점차 사람들의 손길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를 어떻게든 타파하려는 노력의 시도였을까. 미국에서 좌파적인 경향을 견지하는 출판사인 ‘비콘 프레스’(Beacon Press)에서 2021년, 그리고 2023년에 걸쳐 마커스 레디커가 그간 내놓은 연구서를 만화가 데이비드 레스터(David Lester)의 손을 거쳐 두 권의 만화로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이 최근 한국에서 갈무리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발매되었다. 바로 『벤저민 레이 : 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과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이다. 마커스 레디커의 18세기 유럽에 대한 새로운 독법, 만화로 재탄생하다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은 앞서 언급했던대로 마커스 레디커가 그간 펼쳐온 선원과 해적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작업된 만화이다. 그렇다면 『벤저민 레이』는 어떤 대상을 다루고 있을까. 마커스 레디커가 지닌 선원에 대한 시선이 한편으로는 해적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조망하는 측면으로 흘렀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선원 출신의 급진적인 영국 퀘이커 교도 벤저민 레이(Benjamin Lay)에 대한 주목으로 흘렀다. 키가 4피트(약 121,9cm)인 저신장 장애인이기도 했던 그는 18세기 유럽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거침없이 내뱉었던 사람이었다. 성별 위계는 물론 인종 간 위계가 공고하게 존재하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간이 생태계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이 빠르게 퍼지던 시기에 그는 모든 종류의 권위를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그가 속한 퀘이커 교파는 여타의 개신교 교파들 중에서도 가장 평등이라는 명제를 실천적으로 고민했던 교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적인 시대정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다른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퀘이커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도 철저하게 남녀의 좌석과 위치를 분리하였으며, 심지어는 노예를 소유하면서도 어떠한 문제 의식도 느끼지 않는 교인도 있었다. 벤저민 레이는 이러한 모순을 모순으로조차 여기지 않는 상황을 몸소 말과 행동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한 명의 ‘활동가’였다. 생물학적 남녀로 분리된 교회 내 좌석에서 몸소 여성 구획에 앉는 것은 물론, 노예를 부리는 퀘이커 교도들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연극을 기습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동시에 벤저민 레이는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다른 존재를 착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 아래 철저히 자급자족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일찌감치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물론,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인도산 찻잎이나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설탕도 거부했다. 막 개척 중이던 아메리카 대륙의 담배도 결코 피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다른 존재들을 착취하며 얻어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마커스 레디커는 이렇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다른 존재에 대한 착취와 희생을 철저히 거부했던 벤저민 레이의 삶이 그가 젊은 시절 선원으로 생활하면서 겪은 경험에 기반해 있는 것에 주목한다. 벤저민 레이는 해적이 되지는 않았으나, 경건한 퀘이커 교도로서 자신이 믿는 신앙의 가르침을 곡해하거나 특정한 존재의 이해에 맞는 방식으로 따르는 대신 ‘모든 존재의 평등’을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해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이렇게 마커스 레디커가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18세기 유럽 해적의 존재, 그리고 벤저민 레이의 삶을 데이비드 레스터는 일종의 전기 만화와 같은 형태로 표현하는 것을 시도한다. 데이비드 레스터의 그림은 주변에서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스타일의 만화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다. 마치 크로키를 그대로 옮겨낸 것처럼 선은 거친 분위기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으며, 작중에서 표현되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모습들 또한 그들이 놓인 상황 속의 감정과 흐름이 반영된 것처럼 요동치는 형태로 묘사된다.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말끔한 선으로 구성된 사물과 캐릭터의 만화에 익숙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낯설지도 모르겠다. 내용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명확한 기승전결, 절정의 순간보다는 담백한 느낌이 좀 더 강하기도 하다. 하지만 데이비드 레스터의 이러한 선택은 마커스 레디커의 연구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만화에 담아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현실의 삶이 그러하듯 실제 역사속 존재의 행적도 픽션과는 거리가 멀다. 매 순간 긴장과 스펙타클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대다수 픽션의 전개와 달리, 현실은 때로는 격동의 순간이 요동치며 다가와도 다시 어떤 순간에는 잔잔한 구석도 함께 산란하고 있다. 비록 그 앞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자 미래에서 바라보는 이들만이 이들이 끝내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는지를 알게 될 따름이다. 거대한 사건 뒤에 가려진, 결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대를 앞서 나갔던 여러 선각자의 존재를 밝히고자 했던 마커스 레디커의 연구 방향처럼, 데이비드 레스터 또한 이들의 존재를 담백한 톤으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서사 자체를 극적으로 재조합하면서 이들을 조망하는 대신, 이들의 행적 자체가 가지는 유의미한 순간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단순히 역사의 흐름을 추적하는 것을 넘어, 분명한 행동을 촉구한다 그러한 경향 아래 제작된 작품은 이전까지 등장한 전기물 장르의 만화와는 또 다른 감각을 낳는다. 『벤저민 레이』를 통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8세기 당시는 물론, 21세기 현재에서 쉽게 비슷한 존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앞서 나갔던 벤저민 레이의 행적을 진득하게 살펴 나아가며 지금의 형국에서 필요한 삶의 자세를 묻는다.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작품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느껴진다. 불합리한 위계와 구조에 놓여있던 이들이 반란을 통해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평등을 추구하고, 비록 정부의 가공할 폭력에 무너지는 결말 속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작품이 무엇을 위해 기획되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된다. 작품에서 그려진 삶의 자세가 지금 이 사회에도 필요하다는, 각자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움직일 필요성을 말하는 권유의 감각이다. 그러한 감각이 누군가에겐 ‘선동’이라고 인식될지도 모르겠다. 중립적인 시선에서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커스 레디커가 오랜 시간 추적하고, 데이비드 레스터가 만화로 다시 그려낸 이들은 이미 실제 역사 속에서도 분명한 문제 의식 속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변화를 위해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만화는 그들이 드러냈던 삶의 자세를 존중하며,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삶을 다시 새롭게 깨닫고 인식하게 되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이 삶의 자세를 현재에 다시금 적용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외치고 있을 따름이다.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이들은 문제적으로 치닫는 유럽 사회에 결코 작지 않은 흠집을 내 수 있었다. 2025년 현재는 이들이 활동했던 18세기의 유럽과 얼마나 다를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형식상으로는 평화의 중요함과 국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우리는 그 이후로도 셀 수 없는 국제 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사이에 너무 무력해진 것일까, 아니면 ‘현실은 어쩔 수 없다’면서 순응해버린 결과일까. 중국이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날이 갈수록 가공할 학살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어깃장을 놓는 움직임이 더욱 두드러진다. 기후 변화가 이미 눈 앞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로 닥쳐오는 상황에서도 공동의 움직임은 이전보다도 쉽게 조직되지 않고 있다. 마커스 레디커와 데이비드 레스터가 펴낸 이 두 편의 만화 작업은 표면적으로는 18세기 유럽의 정세에서 일련의 저항을 시도했던 기록을 다루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현재 어떠한 움직임이 필요한지를 분명한 자세로 외치는 하나의 ‘선전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두 작품에서 다뤄낸 역사 속의 인물들은 불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확실하게 행동하면서 저항에 나선 표상이다. 작가는 이 표상을 과거에 박제하는 대신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금 들여다보며, 지금의 현실에서도 이들처럼 움직여야 함을 명확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를 불편해하는 대신 꼼꼼하게 경청하면서 움직이는 것이 이 두 책이 말하는 메시지에 회답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