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지성 In&Out 2026.06.21] 한국 현대 지성사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 전성욱(동아대·국문학)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773 2017년에 문학평론집 『문학의 역사(들)』을 내고 갈무리 출판사의 사옥 ‘뿔’에서 독자들과의 만남 행사가 있었다. 그날 어느 독자분께서 계획 중인 다음 책이 있다면 무엇인지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동아시아에 관련된 저작이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십여 년이 지나서 다시 같은 출판사에서 바로 그때 예고했던 책을 내게 되었다. 『취약함의 정신사, 숭고함의 서사들 ―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정치적 무의식』(갈무리, 2026)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대략 십여 년 동안의 집필 과정을 거쳐서 나오게 되었다. 그 시간을 온통 이 책의 집필에 바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책과 관련된 것들을 읽고 사유하고 쓰는 일은 내 생활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생활은 어떤 필연과 우연 속에서 온갖 우여곡절의 모습들로 펼쳐진다. 이때 마음의 평정을 깨는 숱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는데, 어느 하나의 일에 집중하고 매진한다는 것은, 그런 예기치 않은 생활의 혼미 가운데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고 챙기는 좋은 방법이 된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 지성사의 문제적 인물들도, 그렇게 오롯이 그들의 집중된 공부 속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학문적 서사를 만들어간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한국의 현대 지성사에 관한 비평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 수록된 몇몇 글은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 논문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대부분은 오직 이 책을 염두에 두고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고 그냥 쓴 것들이다. 그것은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원으로서 논문의 편수가 주는 세속적인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내 공부의 열의와 성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따라서 한 일이었다. 내가 읽고 쓰며 공부한 대상이 바로 그러한 공부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간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 책의 집필은 그 자체가 그런 공부에 대한 자기성찰적 과정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 책은 일종의 메타 비평으로서, 학문에 대한 학문론이면서 공부에 대한 공부론이라고 소개할 수 있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아시아라는 상상의 지리를 매개로 한국의 현대 지성사를 탐구한 작업이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어령, 김용운, 김윤식, 조동일, 김지하, 최원식, 백영서 등 한국의 포스트식민 남성 엘리트들은, 그 식민주의의 트라우마가 남긴 정신사적 결여를 메우기 위하여 막대한 담론의 서사를 구축해야만 했다. 그들은 근대화의 역사적 시간을 통과하며 ‘민족’에 기대어 ‘세계’로 비약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동아시아’는 서구적 근대라는 거대한 역사적 관념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자 방법이었다. 특히 그들은 서구의 변증법적인 사고체계와 비대칭성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해 통합적이고 소통적인 대칭성의 사고형식을 창안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동아시아는 극단의 치우침을 아우를 수 있는 중도의 사상이자 문명 전환의 기획으로서 제기되었다. 바로 그 거대한 아우름의 사상을 서사화한 담론이 곧 그들의 공허한 정신사적 결핍을 채우는 환상, 즉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근대화가 남긴 상처는, 그들이 소망하고 추구했던 탈식민의 서사화를 가로막는 깊고도 어두운 심연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포스트식민 남성 엘리트라고 명명한 학자들은, 대체로 식민지기에 태어나 민족주의에 기반한 탈식민적 흐름 속에서 교육을 받고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전쟁을 겪고 분단 체제 아래의 반민주적 독재와 개발 근대화의 파고를 통과했다. 이들 세대는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집합적 관념이 그들의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도가 다른 어느 세대보다 강력하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런 특징을 결정짓는 것이, 나는 그 세대의 집합적인 정치적 무의식으로서의 식민주의 트라우마라고 보았다. 그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주체들을 역사적인 함의 속에서 호명한 것이 ‘취약함의 정신사’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식민주의의 트라우마, 즉 정신의 취약함을 견뎌내고 이겨내기 위해서 구축해 낸 학술적 담론의 구축물들을 일컬어 ‘숭고함의 서사들’이라고 했다. 그것이 숭고한 이유는, 어떤 결핍의 원체험으로서 그 정신의 취약함이란 결코 해결되거나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 식민 주체들이 평생에 걸쳐 구축한 학문은 학술적 담론의 형식으로 텍스트화되어 있다. 담론은 논의와 탐구의 대상에 어떤 이름(개념)을 지어 붙여서 그것으로 만들어낸 그럴듯한 이야기의 체계(서사)이다. 한국의 지성사에서 식민지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던 취약한 주체들은 ‘민족’이라는 주인기표에 기대어 ‘세계’로 비약하기를 소망했다. 남루한 민족의 특수한 처지를 초월하여 서구적 근대라는 보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라는 이데올로기의 지렛대가 필요했다. 그들은 서구적 근대라는 타자를 소망하고 원망하는 복잡한 정념 속에서, 매혹되거나 미혹당하는 역설을 통과하며 자기의 주체성을 만들어 나갔다. 인정을 갈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싶다는 역설의 욕망은, 변증법의 논리를 타격함으로써 새로운 아우름의 사고 형식을 창안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다시 강조하자면, 한국의 포스트식민 주체들은 온몸으로 식민지 트라우마를 앓으며 그와 같은 역사적 난제 앞에서 그것을 책임지거나 극복하려고 분투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대칭성의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동시에 대칭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의 생애를 오롯하게 걸어야 했다. 이어령의 기호학과 우물 파기, 김윤식의 초인적 읽고 쓰기, 김용운의 원형과 중립, 조동일의 생극과 대등, 최원식의 회통과 겹눈(複眼), 정재서의 해체 신화학, 백영서의 사회인문학, 김종철의 공생공락, 김지하의 화엄 역학과 흰 그늘, 김용옥의 번역(동양학), 정수일의 문명교류학과 범지구적 보편문명,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 함재봉의 전통과 현대의 융합, 김영민의 불이(不二)와 동무는 분열과 파열, 어긋남과 결여라는 그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칭성의 관념적 장치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비대칭성과 대칭성 사이에서 근대의 역설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했다. 그것은 근대화의 대칭성, 즉 난폭한 분리와 순수화를 넘어 비대칭성, 즉 연결과 혼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포스트 식민 남성 주체들이 지향하면서 또 지양하고자 했던 근대, 그 가부장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근대화의 해독은 너무도 깊었다. 그래서 근대화를 가로지르는 생태화의 추구로 탈식민의 길을 내려던 숱한 시도들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서론에서 김혜순이 자신의 그 고유한 여행을 통해 이르려고 했던 ‘아시아여성짐승하기’라는 하나의 전망을 소개하였지만, 그것은 역시 아직 아득하고 먼 하나의 암시일 뿐이다. 나는 독자들이 김영민과 김종철에 대한 내 비평에서, 여성과 생태의 가능성을 통한 탈식민의 길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나는 종장 ‘케이라는 유니버스’에서, 선학들이 온몸으로 돌파하려고 애썼으나 한계로 남은 그 난제들에 대한 내 나름의 생각들을 정리했다.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속에서 갱신하는 주체들’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주체와 사회 간 기쁨의 상호작용의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쯤에서 정리하고 마무리하자면, 그렇게 한국의 현대 지성사를 비평한다는 것은, 포스트 식민 주체들이 남긴 그 막대한 숭고함의 서사를 비판적으로 공부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슬기롭게 대응하기 위한 어떤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성욱 동아대·국문학동아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문예비평가. 계간 『오늘의문예비평』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이 잡지의 편집위원과 편집주간을 맡았다. 지은 책으로 『소설의 핵심―김가경의 소설과 소설의 이론』(2022), 『문학의 역사(들)―소설의 윤리와 변신 가능한 인간의 길』(2017), 『남은 자들의 말―오월 광주의 순수한 현시, 그 무릅씀에 대하여』(2017),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2014), 『바로 그 시간』(2010)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