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88호 2026.01.28] ‘궐위’의 세계성과 민주주의의 미래 ― 계엄을 보는 눈 / 전성곤(한림대학교) 기사 원문 보기 : http://daziwon.com/?page_id=474&mod=document&pageid=1&uid=11262 1. ‘궐위’가 묻는 민주주의 : 인식 세계의 세계화/구조화의 문제 본 저서는 ‘궐위’라는 낯선 낱말이 개념을 생성해 내면서 기존의 개념과 다름으로 ‘익숙해져 가서는 안 되는 시간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이다. ‘궐위’에 채워진 의미들을 다시 비워내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채워가지 않는 방법을 재고하게 해준다. 이는 인식의 상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론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영속적 궐위’로서 ‘주체성의 종속’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레토릭으로 느껴진다. 더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면, ‘궐위’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아니 ‘궐위’가 생긴다는 것은, 독재나 계엄과 연결되어 쌍을 이루는 형태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궐위’ 개념과 내적으로 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다시 말해서 계엄은 다른 의미에서 지속적으로 물음을 갖게 하는 낱말이고, 반대로 그래서 그에 대한 답으로 지배와 통치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용어로 탄생된다. 무엇보다도 계엄령이 어떻게 ‘궐위’와 ‘접속’될 수 있는가는, 치밀한 내용 분석을 제시하는 방법으로서 언어적 정확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국가 사이에 ‘불순물이 없이 육화된다’거나 완전환 일체화라는 역설 상태를 말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계엄과 ‘궐위’를 성찰할 수 있고, 폭력을 감지하는 인지력임을 호소한다. 재량적 통치 공정이라던가 조타라는 용어가 끌어들이는 통치의 완벽성이나 주권과 국가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는 인식 그 자체를 재문한다. 동시에 그 재문 방법까지도 추체험과 연결하고 물음이 존재하고 그 응답의 출발선에 서게 하면서 다시 그것에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물음에 대한 그 자체의 문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홀러웨이가 말한 어긋나는 자들, 비복종자들의 되새김이다. 어긋나는 무리가 계산 가능하게 정형화되어 있거나 유도 가능한 정체성의 응고상태에 있지 않는 한에서 그들 속에는 법치주의적 시스템과 자유/자본주의적 헌정질서 내부로부터 그것을 거스르며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클리나멘의 계기들이 잉태되어 있다”(p.33)는 인용문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낡은 것이 죽어감에도 아직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고 있는 것을 위기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문턱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요의 해방이라는 용어로 설명되어지기도 하지만, ‘궐위 상태’라는 것이 단순하게 단선적이지 않은 ‘위기’인데, 그것이 병적 징후들이 폭발하는 위기적 시간이 ‘궐위’를 관통하고 있음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이는 계엄령을 통해 무엇이 그것을 막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계엄령이라는 순수 지배의 별, 무제약적 통치를 인도하는 이념형으로서의 비상 계엄령. 하달된 명령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엄중히 삼가도록 하는, 알아서 무념이 되게 하고 몰라도 바닥을 기게 하면서 단념하게 만드는 계엄령, 그것은 삶과 생명을 재편성하는 군정적 노모스의 현상을 설명한다. 노모스의 이중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의 각성 자체의 회로를 폐삭(閉削)시키는 논리도 포함한다. 미리 정의된 것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있는 곳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 그것이 ‘궐위상태’란 떠나온 안전지대, 안락의자, 고향으로의 회귀와 그런 고향으로부터의 진정한 어긋남이 충돌하는 시공간이며, 안전을 보장하는 체제로의 귀환도 아니며 그런 체제로부터의 탈구가 상충하는 벡터 간의 전장이자 적대적 토포스들의 관계 체제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이 우리인-나와 나인 우리의 상호 인정을 향해 손을 뻗친다는 것, 궐위 상태 그 속에서 희망과 절망은 반대말이 아니라 절망을 단념하지 않는 것이 포기하지 않는 절망이 희망의 조건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희망을 그려낸다. 본 저서는 이러한 논리적 구조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고, 관통하는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예외 이론의 잘못된 이해 즉 국가의 구제, 구국을 위한 법치중단적 예외상태가 나타나는 레종데타의 단순화를 ‘인식의 잘못된 기입’으로 풀어낸다. 레종대타의 양가성이 사라지고 단편성만 남게 되는 것에 경종을 울려준다. 레종데타와 쿠데타의 상보적 호환성, 일체성의 문제도 함께 고려하게 하는데, 체제의 재생산력으로서 복종 자유 체제의 논리가 가진 구원의 문제 동시에 영속적 지배 논리를 밝혀내 준다. 법어로서 제(除)-외(外)-례(例)의 문제, 직접-민주-내전의 적으로서 ‘국가가 당이 주인이 아니라 국민 한 분 한 분이 주인인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의 커튼에 가려진 탈-국가와 탈-당의 연장선상에서 탈-법을 권하면서 피의 권력과 이윤을 욕망하는 것임을 드러내 보인다. 민주주의가 침몰하는 것들의 구원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으로써의 민주주의의 발현과 실제하는 것을 이어 나가는 사상의 지속성을 호소하는 주장이 아닌 주장으로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2. 다시 궐위의 문제로: 자유와 콘포미즘(conformism) 그리고 가타바시스(catabasis)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주디스 니세 슈클라(Judith Nisse Shklar)를 인용하여 『우연성・아이러니・연대』에서, 리베럴 유토피아론을 전개하는데, 그 키 워드로 아이러니스트 개념을 제시했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어휘로 나타낸 논의는 의념(疑念)을 뒷받침하거나 해소하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아이러니스트가 ‘어휘 사이’의 선택을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메타 어휘 사이에서 (중략) 새로운 어휘를 옛 어휘와 경쟁시키는 것에 의해 (중략) 선택 자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고 했는데, 이는 한 마디로 준안정상태(meta-stable, 메타 안정성)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궐위’라고 여겨진다.(리차드 로티, 김동식, 이유선역, 『우연성, 아리러니, 연대』, 사월의책, 2023년, p154. pp.163-164) 그리고 이는 ‘궐위’가 말하는 예외상태의 재구성에 대한 새로움이다. 즉 “예외상태는 법질서 바깥에 있는 것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이를 정의하는 문제는 진정 하나의 문턱 내부와 외부가 서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식별하지 못하는 구분 불가능한 영역에 놓여있다. 규범의 효력 정지는 규범의 폐지를 의미하지 않으며, 규범의 효력 정지가 만들어내는 아노미의 영역은 법질서와의 관계를 잃지 않는다. (혹은 적어도 잃지 않은 채 하고 있다). (중략) 예외상태를 둘러싼 갈등은 본질적으로 예외상태가 자리하는 장을 둘러싼 논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조르조 아감벤저, 김항역, 『예외상태』, 새물결, 2009년, p.52)으로 연결된다. 즉 예외상태는 이항대립 ‘사이’의 분리의 문제를 드러내고, 규범이라는 것이 어떤 힘에 의해 정지되어 있던 것이었음을 적용-탈/적용되는 구조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또 다른 하나의 공간이 열리는 상황을 설명해 준다. 인식과 현실이 용접된 상황, 그것의 결과로서 적용된 상황들이 예외라는 형태 속에서, 다시 그것 사이의 연관을 상정하게 해 주는데 이것이 바로 『궐위』 속에서 드러난다. 그것이 계엄이라는 것과 ‘궐위’였는데, 이는 달리 표현해 보면, 인식의 배제도 이루어진다. 배제의 형태가 하나의 ‘궐위’로 현전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무의식으로 지배당한 것의 다른 표현이 될 것이다. 이는 세계적 세계성 그 자체에도 응용/확대 가능하다. 유럽의 사상이나 서구적 사상이라는 것이, 세력을 갖게 되면서 만든 법, 국가이며 체제였다. 서구의 국제질서가 확대된 것으로, 이 의미는 세계가 서구가 주도한 지배가 존재했고, 그것이 내부 국민국가에서 활용된 하나의 서구 세계의 개념이었다는 것, 이 이중 구조로서 세계의 질서/국내 질서를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규범적 감각을 재고하게 해 준다. 다시 슈미트가 논한 표상의 문제로 연결해 보면, 슈미트는 ‘고전적 정체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것은 두 개의 대립적 관계가 지탱되는 논리’, 그것을 통해 지탱된 구체제의 질서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을 재현전’이라고 보고, 표현이 다른 것으로 동일한 이 부분법이나 대립의 구도가 나타나거나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적 체제를 재고하게 하는 논리로서 현전과 재현전을 사용한다. 사고 방법 속에 교조주의가 존재한다는 점, 유동하는 현실에 대응하는 탄력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추수(追随)가 작동된다는 점이다. 다른 의미에서 내면적 긴장을 내포한 체계적 사고 방법 속에 빠질 수 있다는 점조차도 각성하게 만들어 준다. 이는 『궐위』가, 그람시의 『옥중 노트』에서 논한 것, 즉 그람시가 포획한 실천이 ‘뒤집다, 뒤바꾸다, 상하를 반대로 하다’라는 단어이다. 이는 계엄이라는 개념을 파편적으로 사용하는 인식의 오류를 재구성하는 것, 동시에 모든 관계를 총체적으로 뒤집거나 변혁한다는 의미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내재하는 인과 법칙, 규칙성이나 규범성, 인식과 현실의 이원일체성 등을 반전(反転)하는 사고로서 궐위에서 도출해 낼 수 있을까를 지속적으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