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25.12.05] 생성과 마주침을 오가는 개입의 여정 / 박미영(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연구전담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0832 요즘 정동(affect)이라는 말은 학문 바깥에서도 자주 들린다. 감정, 감수성, 공감능력 같은 말들과 섞이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철학, 페미니즘, 문화연구, 신경과학까지 정동 연구는 이미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흐름이 됐고, 그만큼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알리 라라 멕시코 푸에블라 자치대 강사가 엮은 『정동 연구 지도제작』은 그 고정된 틀을 벗어나, 이론이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책은 정동을 설명하는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정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지도는 정동을 하나의 방향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스피노자에서 비롯된 정동의 역량, 즉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마주침인 몸들이 서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의 두 흐름이 교차하며 책 전체를 움직인다. 『정동 연구 지도제작』은 바로 이 생성과 마주침 사이, 즉 개체의 잠재력과 관계의 힘이 서로를 변형시키는 지점에서 사고를 전개한다. 이 책의 구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험이다. 이 책은 노동, 인종, 예술, 퀴어, 신경과학 등 서로 다른 영역을 하나의 체계로 묶지 않는다. 대신 각 주제가 서로의 경계를 흔들고 부딪히며 울리는 진동의 언어를 만든다. 한국어판 역자들은 각 장마다 해제를 덧붙여 이 감응의 언어를 자신의 담론 현장으로 옮긴다. 단순한 해설이 아니라, 정동의 한국적 번역과 재맥락화가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창작 행위다. 그래서 『정동 연구 지도제작』은 단지 외국 이론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번역과 편집 자체를 사유의 실천으로 만든 시도로 읽힌다. 각 장은 노동의 피로에서 인종의 감응성으로, 예술의 과잉과 퀴어의 퇴보성, 그리고 신경적 비의식으로 이어지면서 독립된 논문이라기보다, 서로 연결되고 반응하는 감응의 회로처럼 읽힌다. 2장 「정동과 노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이 어떻게 자본의 자원이 되는지를 다룬다. 이 장이 흥미로운 점은, 그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돌봄과 연대의 양가적인 감응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정동은 착취의 원천이면서도, 체계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힘이기도 하다. 3장 「정동과 인종·흑인성」은 정동이 인종 문제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색한다. 흑인성은 단지 억압된 정체성이 아니라, 감응이 사회적으로 분배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장치다. 이 장은 정동이 인종화된 신체 위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질서를 드러내며, 감정의 위계가 곧 사회적 권력 구조임을 보여준다. 4장 「정동 이론과 문학·예술―재현 사이와 재현 너머」는 예술을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예술이 언어나 이미지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감정의 과잉, 재현을 넘는 감응의 힘을 다루는 장이다. 이 장은 정동을 단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비평적 사고의 역량으로 읽게 만든다. 5장 「가라앉음, 퇴보성, 기계됨을 느끼기」는 퀴어 이론과 정동 연구가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가라앉음’이나 ‘퇴보’처럼 부정적으로 여겨진 감정의 상태를 새로운 감응의 리듬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이 장은 느림, 불완전함, 비생산성이 오히려 세계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 가능성임을 제시한다. 퀴어함은 여기서 단순한 정체성이 아니라, 기존의 시간 감각을 바꾸는 정동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6장 「정동, 인지 그리고 신경과학」은 정동을 비의식적 인지(nonconscious cognition)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토니 D. 샘슨 영국 에식스대의 에식스 비즈니스 스쿨 교수는 정동을 의식 이전의 단순한 반응으로 보지 않고, 신체와 기술, 신경의 회로 속에서 작동하는 물질적 리듬으로 이해한다. 캐서린 헤일스가 말한 비의식의 개념이 이 논의의 중심에 있다. 이 장은 정동 연구가 신유물론적 세계관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동 연구 지도 제작』에서 각각의 장은 서로 다른 속도와 감각으로 이어지면서 정동을 개념이 아니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경험하게 한다.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어떤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정동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정동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감각을 의미하는가? 정동 연구의 가치는 바로 지금, 불안과 피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에 다시 드러난다. 정동은 개인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공기와 분위기, 서로의 몸이 맞닿는 장에서 작동하는 힘이다. 팬데믹 이후의 단절, 디지털 네트워크의 과잉 연결, 정치적 분열이 심화된 현실 속에서 정동은 우리가 함께 느끼고 반응하는 방식을 다시 묻는다. 그렇기에 『정동 연구 지도 제작』의 지도는 완성된 도식이 아니다. 각 장의 사유와 번역의 언어가 교차하며, 읽는 이의 감각 속에서 새로 그려지는 과정이다. 정동 연구의 다음 좌표는 아마도 그 움직임, 그 생성과 마주침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로 열리는 세계의 리듬 속에서 갱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