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5.09.12 | 자본주의의 바깥을 꿈꾼다

[교수신문 2025.09.12] 자본주의의 바깥을 꿈꾼다 / 경혜영(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43102 2025년 4월 말에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마쓰모토 준이치로(松本潤一郞) 일본 슈지츠대 교수(인문과학부 표현문화학과)의 『들뢰즈와 맑스』는 한국에 소개된 일본 학자들의 연구서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이 책은 학술적이지만 일본 학자들 특유의 ‘깔끔하고 명료한 정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꼬이고 비틀리고 중첩된(入れ子狀) 사안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내내 강조하며, 역자는 그래서 이 책이 ‘중첩된 주름들’ 같은 문장과 서술로 쓰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들뢰즈와 맑스, 그리고 헤겔, 라이프니츠, 니체, 벤야민, 클로소프스키, 바디우, 네그리와 과타리 등, 수많은 사람들의 사유가 어디에서 갈라지고 이웃하는지 직접 텍스트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보여주며, 때로는 우리의 시대를, 때로는 저자가 속한 일본 사회를 보려고 잠깐씩 고개를 든다. 마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바다 밑 지형을 탐색하다가 가끔 부표를 확인하러 물 위로 올라가는 심해 잠수부(deep-sea diver) 같다. 그러니, 다이빙 중 패닉이 오면 심호흡을 하자.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스쿠버 다이빙 강사가 말하듯이, ‘패닉과 심호흡은 동시에 올 수 없다’고 한다. 문고판 정도의 크기인 이 책은 참고문헌 목록이나 색인도 없이 400쪽이나 된다. 그렇지만, 400쪽의 두께는 이 책의 단점이 전혀 아니다. 역자가 독자를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곳곳에 마련한 배려 덕분이다. 다이버를 위한 여분의 산소통처럼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저자가 길게 인용한 문헌들의 한글 번역본 인용문과 서지사항이 담긴 역주들이다. 서양 문헌의 일본어 번역과 한국어 번역을 곧바로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번역서로서의 이 책의 학술적 가치를 높이고 있는 이 역주들은, 번역에 있어서 언어들의 차이를 더 부각시키고자 직역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던 벤야민을 언급한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수용하면서도 한국 연구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역자가 발휘한 기지(奇智)라고 생각된다. 반면,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이 없다는 것은 학술서로서 최대의 단점이 될 것이다. 『들뢰즈와 맑스』는 저자의 논문 모음집으로, 저자는 2003년에서 2017년 사이에 출간된 12편의 논문을 선별하고, 세 개의 주제에 따라 네 편씩 묶어 배치했다. 각 부의 주제인 역사·철학·정치(1부), ‘도래할 민중’의 이야기(2부), ‘노동’과 유토피아의 행방(3부)은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을 보여준다. 저자는 한 편으로 들뢰즈의 철학이 어느 지점에서 맑스와 결합 또는 이웃하는지, 그리고 맑스로부터 전달받은 힘을 끝까지 밀어붙여 들뢰즈는 어디까지 가는지, 그 궤적을 따라 그들과 함께, 그리고 한 발 더 가고자 한다. 물론, 현대에, 그리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서서 말이다. 철학자로서 저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철학이 현실에 발 딛고 서지 못하고 공중에 붕 뜨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새로운 것의 창조’(예컨대 철학에서는 개념의 창조)에 관해 말할 때마다 강조했던 점이기도 하다. 예술가든, 철학자든, 그들이 창조한 것이 정말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우리가 그것으로 삶을 살 수 있을 때만 비로소 힘을, 그것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른 한 편으로 들뢰즈를 포함하여 이 책이 다루는 모든 철학적 개념과 사상이 여전히 유효한지 묻는다: “오늘날 ‘현대사상’은 여전히 현대 또는 ‘현재’에 맞닿아 있는가.”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잠식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가?’이다. 1부 역사·철학·정치에서, 저자는 들뢰즈와 맑스가 역사-철학-정치에서 얼마나 가까운 이웃인지 보여준다. 그들 사이의 높은 결합력을 드러내는 것은, 들뢰즈 스스로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 맑스로 관통된다고 말한 바에 대한 이유/근거일 뿐 아니라 우리가 들뢰즈 철학을 맑스적 관점에서(도) 읽어야 하는 상당히 강력한 이유/근거가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철학-정치가 맑스와 들뢰즈에게 따로 떨어질 수 없는 내재성의 판임을 이해함과 동시에, 들뢰즈-맑스 블록이 우리의 시대와 현실인 자본주의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내파(內破)/절단하는 방법을 고민하도록 만드는 물음― 영원회귀의 지위를 가지는 물음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들뢰즈 철학 연구자로서 마쓰모토 박사가 가진 미덕 중 하나는 들뢰즈의 주된 비판자인 알랭 바디우를 끝까지 균형감 있게 읽어낸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본주의 안에서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꾸면서 역사-철학-정치적 실천 문제를 고민하는 저자는, 맑시즘의 또 하나의 변주인 바디우의 마오이즘과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까지도 주의 깊게 참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이 항상 정당해 보이는 것은 아니며, 그의 철학이 제안하는 것이 항상 성공적인 것도 아니지만, 새로운 개념의 창조뿐만 아니라 ‘정치의 창출’이 중요하다는 바디우의 핵심 논지는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부 ‘도래할 민중’의 이야기는 맑스로부터 이어받아 들뢰즈가 그려내고자 하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래서 1부의 변주(variation)와 변조(modulation)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자면, 이 책의 3부는 또한 2부의 변주와 변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들뢰즈가 언급했던 모리스 르블랑의 『발타자르의 이상한 모험』을 소개하면서 1부에서 다루었던 역사(histoire)로부터 이야기(histoire)로 변주한다. 기호와 해석의 문제를 권력형 수렴이 아니라 끊임없이 분기하는 이야기들로 바꾸어 그러한 권력(국가)이 만든 경계와 위계― 저자에 따르면, 이것을 밝힌 것은 맑스이다 ―를 모호하게 만드는 들뢰즈적 관점 안에서 저자는 ‘코뮤니즘의 알레고리’를 발견한다. 또한 여기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들뢰즈, 라이프니츠, 과타리, 벤야민, 니체, 맑스, 네그리-하트의 철학과 사상의 핵심 아이디어들은 아직 오지 않은 ‘도래할 민중’의 삶(코뮤니즘)과 정치를 구상하는 데 필요한 이념적 요소들의 모든 변조(變調) ― 폴 세잔으로부터 들뢰즈가 빌려왔다 ― 혹은 그 일부를 보여준다. 3부 ‘노동’과 유토피아의 행방은 2부를 우리 시대와 현실 위에서 다시 변주한다. 저자는 현대 일본에서 학생주도형 수업으로의 교수법 전환이나 민박, 자가용 대여 ― 한국의 ‘홈셰어링’, ‘카셰어링’과 비슷하다 ― 등의 부업 및 새로운 경제 모델― 공유경제 ―의 출현과 같은 새로운 삶과 노동의 형태를 분석하면서, 자기 소유물(지적 능력, 집, 승용차 등)을 타인에게 일시적으로 빌려줌으로써 자본의 확장과 자본주의의 공고화에 기여하고 있는 현실을 포착한다. 저자는 이렇게 ‘마음대로 분할 가능하면서 대여 가능한 것으로서 돌입하는 삶’을 ‘렌탈 라이프’라 부른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삶은 존재하는 것 자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자본이 되는 차원으로 들어가고, 여기서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이렇게 안과 밖이 이어져 있는 자본의 뫼비우스 띠가 우리의 삶 자체를 잠식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우화를 사용하고 ‘거짓의 힘’을 사용해서라도 그 바깥을 공상이라도 해보자고 말한다. 저자가 맑스와 클로소프스키, 벤야민과 푸리에를 소환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가 주로 찾아 헤매는 것은 ‘코뮤니즘 유토피아’의 행방이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와 공존하고 있었던 원시적 형태의 농촌 공동체를 염두에 두었던 맑스,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을 도착(perversion)의 관점으로 상상한 클로소프스키의 『살아있는 화폐』, 생산수단 및 개인의 사유재산까지 공동소유하면서 화폐가 아니라 정념을 매개로 교류하는 유토피아적 생활협동체(팔랑스테르, Phalanstère)를 구상한 샤를 푸리에, 삶과 감옥이 식별 불가능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중(multitude)이 공통(le commun)을 구성하는 코뮤니즘을 꿈꾸는 네그리…. 각각 한계와 위험성을 가진 이 사례들이 완결된 리스트가 아니듯이, 이 책의 후기에서 저자는 이 책을 ‘경과 보고서’라 부르고 있다. 저자가 말하듯이, 비록 공상이지만 자본주의의 임계를 전망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열어주고, 자본주의의 바깥이 죽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촉발하는 것, 그것이 ‘코뮤니즘 우화’의 주요 기능일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자본주의의 포획을 ‘끝장내기 위하여’ 공통(共)의 유토피아를 그리는 코뮤니즘 우화를 계속 찾고자 하며, 독자에게 ― 한국의 독자에게도 ― 이에 동참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마쓰모토 준이치로 박사처럼 들뢰즈 철학을 연구 중인 필자는 현대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마쓰모토 박사의 작업을 겹쳐놓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부터 2024년 12·3 내란 사태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거의 모든 혐오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는 ‘빨갱이 혐오’는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공통’(共)과 ‘자본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는 데 있어 어쩌면 근원적인 걸림돌 또는 막다른 골목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시대와 현실에 발 딛고 선 채로 한국식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마쓰모토 준이치로의 『들뢰즈와 맑스』와 함께 ‘이웃의 코뮤니즘’을 논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푸코가 말한 ‘진실의 용기(parrêsia)’가 필요한 이유다. 필자는 견해가 다르거나 대립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에 관한 어떤 협동적 조작을 통해 양자에 공통의 지평이 구성되는 방법을 통해 성립”하는 “정치로서의 대화”가 “절박하다”는 저자의 말을 이 지점에 포개보고자 한다. 역자도 역자 후기에서 쓰고 있듯이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2024년 12월 23일의 일명 ‘남태령 대첩’이나 2013년~2014년의 ‘노란봉투 캠페인’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레드 콤플렉스가 아닌 ‘함께 살기’로서의 이웃의 코뮤니즘 실화 찾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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