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 2025.08.29] 당신도 ‘선택의 논리’보단 ‘돌봄의 논리’가 필요할 것 / 조병준(참치과의원 원장)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ildaro.com/10262 한국의 대도시에는 병‧의원이 건물마다 자리잡고 있다. 의료 접근성이 좋다는 면이 있지만, 정작 환자들에게 절실한 필수 의료는 부족하고, 의사 증원 문제 등으로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다. 의료산업화의 경로를 걸어온 한국은 병상 기준으로 10%, 공공의료기관 기준으로 5%의 공공의료와 각각 90%, 95%의 민간돌봄에 의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할지 고민하고, 지인에게 묻거나 인터넷 정보와 의료광고에 의존하기도 한다. 노인들은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죽고 싶다”라는 소망을 품고 살며, 중증장애인들은 전신마취가 필요한 치과 진료를 받기 위해 수개월씩 기다려야 한다. 네덜란드의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은 『돌봄의 논리』를 통해, 미래가 불안한 우리에게 ‘좋은 돌봄’을 찾아 나서라고 이야기한다. 내년 3월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 등 돌봄을 준비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적정한 책이 출간되었다고 생각한다. ‘선택의 논리’가 아닌 ‘돌봄의 논리’ 나는 십수 년 류마티스질환을 앓아 왔고 지방의 공공병원 류마티스내과를 다녔다. 코로나-19 전담 감염병원 역할의 후과를 떠안은 지방 공공병원의 어려움은 고스란히 환자인 나의 어려움이 되었다. 결국 부산의료원 류마티스내과는 문을 닫게 되었고, 나는 두꺼운 진료기록지를 복사해 그것을 들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물어 다녀야 했다. 그 상황은 내가 수많은 병‧의원이나 의사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였지만, 각 병‧의원 의사들이 두꺼운 차트를 보고 나를 자신들의 환자로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학병원과 1차 의료기관에서 진료가 어렵겠다고 들었다. 의사를 면담했던 시간은 각각 2분에서 5분이 걸렸다. 결국 나를 진료했던 의료원의 예전 의사와 어렵게 연결되었는데, 그와 다시 마주하여 진료를 받게 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의사들이 나를 돌보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과, 길을 잃었다가 집에 다시 돌아온 안도의 마음 때문이었다. 책 『돌봄의 논리』의 본문 중에, 이사를 하고 나서 자신이 사용하던 혈당 측정기에 익숙하지 않은 의사를 만나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던 흐라두스 씨의 이야기에 나는 많은 공감을 느꼈다. 저자는 다양한 경력을 토대로, 여러 방향으로 돌봄의 논리를 설명하고 있다. 의학도로서 네덜란드 중소도시 병원에서 당뇨병 환자의 생활과 치료를 관찰, 연구하였고, 철학 전공과 페미니스트 및 활동가로서 아픈 몸, 돌봄이 필요한 몸들이 사는 삶과 생활이 현재의 시장적, 국가적, 시민적 권리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에 있어 의료진의 환자선택권을 ‘선택의 논리’로서 비판하며, 현장에서의 관찰과 실천을 통해 ‘돌봄의 논리’를 하나씩 세워나간다. 병들거나 예측할 수 없는 몸은 선택권이 제한된다 나는 『돌봄의 논리』가 삶의 방식에 대한 책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자본소득 속에서 마치 삶을 고르고 선택하는 듯 여기곤 하지만, 살면서 피해 갈 수 없는 “삶과 질병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질병과 사고로 아프고 돌봄이 필요한 몸이 된다. 이렇게 연약한 몸을 가지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돌봄은 무엇일까? 저자는 ‘선택의 논리’가 만연한 삶의 팍팍함과 시장적 돌봄을 비판한다. 그리고 좋은 돌봄을 만들어 가기 위한 실천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방식도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관리하기 대 의사노릇하기〉의 첫 구절은 “선택의 논리의 시장적 변형에서는 환자를 고객이라 부르며 질병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민적 변형에서는 시민을 모델로 삼으며 우리 몸을 통제하기를 원한다.”라고 적혀 있다. 아네마리 몰은 시장과 국가에 의해 주어진 선택적 논리를 뛰어넘어야 ‘좋은 돌봄’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에게 만연한 ‘선택의 논리’에 대해 철학적 비판을 이어나간다. “개인의 선택권이 선(善)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이상(ideal)”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선택의 일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돌봄의 영역에서 선택권을 일반화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선택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어지며, 환자가 되면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좁아지고 부족”해진다. 선택권이 제한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돌봄의 논리가 개인의 선택을 넘어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선택의 문제를 실천을 문제로, 개인의 선택권 문제를 집단과 공동체적 실천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돌봄의 논리가 선택의 논리보다 더 낫거나 나쁜 것이 아니지만, 병들거나 예측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채 살아가는 데는 돌봄의 논리가 더 적합하다고 단언한다. ‘정상성’이 아닌 ‘능동성’능동적인 환자-되기, 의사노릇 공유하기 좋은 돌봄의 출발이자 중심은 돌봄 당사자가 능동적인 환자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윤리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돌봄 당사자가 능동적인 환자로 변화하는 것은 당사자로서 권리와 니즈(needs)를 명확히 가진 개별성과 능동성으로 돌봄에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당사자성의 ‘환자주의’, 페이션티즘(patientism)이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이 시민권의 표준적 권리를 주장하며 존중받기를 원하지 않고, 당사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기를 바라는 뜻이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신체에 일률적인 ‘정상성’을 기준으로 삼아, 장애인 등 아프거나 쓸모없다고 간주된 이들을 비인간화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또한, 근대국가와 부르조아의 시민성 또한 ‘권리의 주체’를 질병이 없는 ‘정상적인 신체’로 전제하고 있다. 아네마리 몰은 “정상성”이 아닌 ‘능동성’을 말한다. 이를 위해, 취약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있거나 시민의 일반적 의무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몸이어도, “아픈 몸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고 가꾸며 즐기는 방법을 능동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능동적 환자를 함께 만들고 돌보기 위한 ‘의사노릇’을 이야기한다. 본문에 당뇨병을 앓고 있는 도로 건설 노동자인 조우머 씨가 등장하는데, 그는 능동적이기 어려운 환자이다. 혈당수치를 주기적으로 측정하지 못해 생명의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으로 건강 취약계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사를 하게 되어 만난 새로운 의료진이 자신이 사용하던 인슐린 자동펌프에 익숙하지 않아 고생한 흐라두스 씨의 이야기도 나온다. 자신의 병세에 익숙한 주치의를 잃어버린 그는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결국 자신이 버려졌다는 황량한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환자의 사회경제적 요인과 의료서비스 제도는 건강에 직접적이고도 지속적 영향을 미치며, 위험에 다다를 수도 있게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의사노릇’이다. 저자는 의사는 물론이고 환자까지 포함된 돌봄팀 전체가 의사노릇을 해야 하며, 전문가 집단의 전문지식을 개방하기 위해 ’의사노릇 공유하기‘라는 의미 있는 이름을 짓는다. 공유라는 것은 위계적 질서가 아닌 환자 중심의 수평적이고 협력적 관계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현장에서의 환자 중심의 돌봄 활동과 논의를 공유함으로써 환자의 삶의 질과 사회제도를 개선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라 말한다. 의사노릇하기는 “환자의 삶의 균형을 조율해 가면서 삶의 다양한 점성적 변수를 서로 조율하고 지속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좋은 돌봄은 ‘능동적 환자’라는 사람과 ‘의사노릇’하는 사람들, 두 주체가 만나 관계 맺고 실천하는 활동이다. 좋은 돌봄에 참여하기 〈개인과 집단〉에서는 “좋은 돌봄에서 개인은 집단에서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집단은 개인의 수치적 합이 아닌 공동체의 차이화와 특정화에 따라 범주화된 집단”이라 말한다. 홍은전 작가가 쓴 책 『그냥, 사람』(봄날의책, 2020)에는 탈시설한 장애인 상분 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설에서 나와서 뭐가 좋으냐는 질문에 상분 씨는 “추운 게 좋아, 정우(남편)가 안아줘. 따뜻해. 이불처럼.”이라고 대답한다. 오랫동안 지낸 장애인시설에서 나온 그녀는 집단적 돌봄 시설에서 탈피한 개별화된 능동적 환자이며, 동거인 그리고 동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장애인 탈시설 운동 등의 활동을 하며 ‘능동성’과 ‘공동성’을 함께 이루어가고 있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삶을 즐기는 것이 좋다.’라고 쓴 저자의 구절 앞에 ‘모두’를 붙여보고 싶다. 아네마리 몰은 이를 위해 선택의 논리가 아닌 돌봄의 논리가 우리 삶과 사회에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두라는 것은 All이 아닌 Every의 의미로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과 함께하는 연대를 뜻하고, 삶의 지속과 즐김은 우리가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매우 설득력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6장 〈실천 속의 선〉에서 저자는 ‘좋은 돌봄에 참여하여 무엇인가를 하기’를 주장하며 종합한다. ‘좋은 돌봄’은 돌봄 당사자에겐 능동적 환자가 되기를, 돌봄팀에겐 협력적 의사노릇을 함께 해나가는 창의적 활동가들이 되기를 요구한다. 우리 한국 사회가 이러한 돌봄을 위한 실천적 활동을 지속하여 ‘좋은 돌봄’의 논리가 사회와 개인의 삶에 안착되기를 바란다. 아네마리 몰의 ‘돌봄의 논리’는 왜 돌봄을 우리 사회를 전환하기 위한 아젠다로 삼아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닥쳐온 돌봄의 시대에 돌봄을 민영화하고 저렴한 이주노동을 수입하는 등 효율적 비용을 이유로 돌봄이 신자유주의 시장에 물들어 갈 수도 있는 반면, ‘좋은 돌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함께 밟으며 모두의 삶을 위한 실천과 변화를 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읽게 되었던 창작동화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낯선 코뿔소와 낯선 펭귄이 함께 돌봐주어 바다로 갈 수 있었던, 어느 펭귄의 이야기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불운한 알에서 태어났지만, 무척 사랑받는, 행복한 펭귄이었다.”(『긴긴밤』 중에서, 루리 글‧그림, 문학동네, 2021) [필자 소개] 조병준. 참치과의원 원장. (사)이주민과함께 이사장 및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부산경남지부 감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