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5.08.20] 물민(物民)의 주권 : 『빛의 혁명 183』이 가리키는 광장 이후의 이정표 / 윤인로(『신정-정치』 저자)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80 1. “나의 신체를 통과한 무수한 시민들의 자기 기록”이라고 저자가 천명한, 그러므로 광장의 익명들에게 헌정되고 있는 이 책 『빛의 혁명 183』(조정환, 갈무리, 2025, 592쪽)은, 12·3 계엄 직후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된 상황 개입적 일지인 동시에 실천 현장들의 과제상황과 맞물려 생생하게 전개된 이론적 르포르타주다. 말뜻 그대로 투신적(投身的) 183일, 그 긴급시의 르포를 빠짐없이 마주했던 자, 그런 대면의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달리 구축할 필요의 힘의 성좌를 함께 묘출해 볼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됐던 자, 그런 자의 자기 다짐으로서(그 대면에의 책임과 그 믿음의 재검토를 위해) 나는 이 책의 초고 프리뷰를 맡았고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썼다. “ ‘제헌주의적 시민활력’ ‘법치주의적 대의권력’ ‘예외주의적 내란폭력.’ 이 3항 적대의 구조적 파노라마가 이 책의 상황 창출적인 증언과 비판을 구성하고 있다. 오늘 이후, 그 3항 혹은 삼위(三位)의 관계설정은 광장에서 발현하는 유물론적(+메시아적) 헌정체, 섭정(+섭리적) 정치체의 재구축을 위한 비등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그 비등점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좀 더 인용해 놓아야 할 정치철학적 혁신 개념이 있는바, 다름 아닌 “물민(物民)주권”이 그것이며, 법치주의적 대의권력에 대한 물민주의적 “아래로부터의 섭정(攝政)”이 그것이다: “물민주의에서 물(物)은 여러 가지 색, 여러 가지 것을 의미한다. ‘물의를 빚다’에서 물의(物議)는 글자 그대로는 사물들의 토론을 의미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의견들이 서로 소용돌이치는 집회 즉 assembly를 지칭한다. 생물을 물의 특수한 형태라고 볼 때 이번 12·3 내란에 대항한 다중의 투쟁은 사람, 동물, 기계, 사물, 예컨대 깃발, 응원봉, 꽹과리, 은박담요, 피켓, 스마트폰, 마이크, 스피커, 농민들의 트랙터, 배달노동자들의 오토바이, 방송 트럭… 등등 다양한 차원의 물들의 저항적이고 창조적인 결집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1-1. 사물(res[것들/things])을 공통적인 것들(publica)로 조형해가는 일, 그 일의 이념구성적/제도구축적 벡터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인간·비인간·장소를 연결-물색(物色)해 가는 힘. 이는 물색 모르고 물색 지우는 회색 통치비밀의 폭력체 속에서 위계화되고 비가시화되는 민(民)들의 상태를 들춰낸다. 그 계시력을 따라 광장의 스펙트럼은 합법적 표준국민의 요구만이 아니라 그것에 합치되면서도 차별·미달·배척되는 여성·장애인·유아·어린이·청소년·동성애자·퀴어의 요구, 국적의 정체성 구획선 안팎으로 나눠지는 이주민·불법체류자·난민의 요구, 비국민 외국인의 요구, 나아가 비인간의 요구 등으로 이뤄진 연결망을 표시한다. 이 물색의 네트워크는 예외적 비상계엄이 민주공화국 전체에 내재된 항시적 구멍·모순·위기의 산물이라는 점을 들춰내는 힘으로서, 그 임의적 구멍과 위기의 맞짝으로 ‘공공의 안전’을 내건 헌법정지 쿠데타를 통해 축적을 꾀하는 n차 계엄세력의 간접권력적 회합에 물의를 빚어내는 힘으로서 발현한다. 그렇게 물민주권은 시민활력·대의권력·내란폭력이라는 3항 관계의 파노라마 속에서 제헌주의적 시민활력이 확장적으로 발현하는 양상을 가리키면서 그 제헌활력을 구성하는 인간·비인간의 네트워크적 물색·물의를 표시하는 이름이다. 그렇게 물민주권(sovereignty of thing-people)은 광장 이후의 주권을 가리켜 보이는 경광등으로, 광장을 시금석으로 삼아 도래할 헌정체의 형질을 묘사하는 이정표로 세워져 있다: “물민주권은 국민을 법률의 수준에서 정치의 수준으로 열고, 국민의 문을 인간·비인간 다중에로 열어야 함을 지시한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법률적 의미의 국민의 주권에 갇히지 않고 시민의 주권으로, 생태의 주권으로 넓어져야 하며 규범적 주권을 넘어 구성적 주권으로 동태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광장 시민들의 물질적 헌법의 실천이, 형식헌법 수준에서, 87헌법을 시민헌법으로, 생태헌법으로 바꾸자고 요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2. 물민주권은 이라는 제목의 미술전시회 곁에서 공동향유적인 미감의 세계 전체 혹은 감각적인 것의 공통세계 자체를 창출하는 힘으로 달리 정의된다. 그렇게 물민주권자들 모두가 작품으로서의 세계의 주인이 되는 장소, 각각이 모두 주인임으로써 그 어떤 것들도 주인-하인의 위계 속에 놓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때와 장소. 이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낱말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바, 그것은 광장에 자리잡고 예감하는, 광장에서 “조감(鳥瞰)”하고 “앙감(仰瞰)”하는 광장 너머로서의 아토포스, 광장이 잉태한 광장 너머의 규제이념적 이미지이다. 적대의 구도는 다음과 같이 된다. 물민의 주권, 즉 무-주(無-主)에 의한 창조적 물의와 물색의 행위들 VS. 물민을 소외시키면서 물색 없애는 간접화된 부재 주인들의 소유권 날인과 봉인. 공생적 삶이 이뤄지는 장소이자 조건으로서의 무주공산은 소외적 위계의 주인들이 투자하는 축적장치들, 즉 “더 많고 더 다양한 무주공산화 기계들(국가, 자본, 교회, AI, 도처에서의 전쟁, 우주전쟁 등등)”에 의해 잉여가치의 채굴지로 점령되는바, 그 지점에서 12·3 비상계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2.3 내란은 국민주권 약탈, 그러니까 국민을 무주공산으로 만들기 위한 군사폭동이었다. 존엄권과 행복권(헌법 10조), 사회권(34조)만이 아니라 자유권(12, 15조)과 참정권(24~27조)도 광범위하게 약탈함으로써 국민의 주인됨(즉 민-주)을 폭력적으로 부정하는 정치적 시초축적을 21세기 세계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1-3. 광장 위에서 그것의 미래로서 그려지는 무주공산을 인간·비인간의 사이·차이의 연계망적이고 공생체적인 장소로, 안티(無)아르케적이며 안티캐피탈적인 노모스-가이아의 다른 이름으로 새겨보게 된다. 그럴 때 무주공산은 “기후공간”으로, 기후(climate)와 기울어진(klinare) 자전축과 어긋내는 “편위(klinamen)”[에피쿠로스/마르크스]의 어원적 이접을 통해 재설정된 기후의 정의로, 즉 “원자론적 차이 자체의 관계행위(동사 common)”로, 그런 기후 정의(定義/正義)에 근거한 기후 위기의 진단과 처방으로 나아간다. 기후(氣候), 즉 삶·생명의 연결적 기운상태와 관계된 증후(證候) 혹은 척후(斥候), 그것을 새로운 체제·레짐의 부산물인 동시에 구축력으로 인식할 때, 무주공산은 생태헌법과 “생태주권”의 형식으로 인간·비인간의 동맹적 활력이 발현되는 조건이자 장소를 표시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빛의 혁명 183』이 제안하는 또 하나의 이정표는 “민주를 통한 무주로의 길”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에서 무주주의(無主主義)로의 과정, 민주를 통한 무주로의 연결망 확장. 달리 말해 여기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살려 우리들만의 주인됨의 상태를 국민-시민-물민으로 확장해 가는 일, 그런 과제·소명으로서의 인간·비인간 차이의 동맹정치. 민주주의에서 무주주의로의 확장이라는, 광장 이후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예컨대 스피노자 『윤리학』의 신비-실재주의적 테제 “신의 지적인 사랑”(『에티카』) 속에서, 인간·비인간 사이 연결망의 확장을 통해 이뤄져가는 ‘신 즉 만물색萬物色’에의 알아감이라는 상황 속에서(신에의 더 많은 접선의 과정에서 신이 인지하는 신 자신에 대한 사랑의 증대로서), 그런 ‘제3종 인식’으로의 확장을 통해 여러 개체화상태들의 경로의존적 코나투스가 깨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형이상학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정당성/정의를 조달받는다. 2. 민주주의에서 무주로의 안티아르케적 확장을 통해 국민·인간은 주인의 자리를 비움으로써 여실해지는 행위자가 되는바, 무주인(無主人)은 신 즉 만물색이라는 자연체=신체(神體)를 그 몸속 존재들·역량들의 증강 벡터에 따라 활성화되는 회합의 앙상블로 발현되게 한다. “아래로부터의 공통장의 섭정활동”, “특이한 것들의 공통장화로서 물민다중의 무주공산(無主共山)”을 그런 발현의 과정 속에서 새기게 된다. 『빛의 혁명 183』이 가리켜보이는 인간·비인간 공생적 거주 가능성의 지대, 말하자면 물민-대지의 노모스가 무주공산(空山)과 무주공산(共山) 사이의 변증 속에 있다. 이와 직결된 물음은 다음과 같다: “空 없이 共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공(空)의 상태 혹은 공위(空位)상태를 기반석으로 삼아, 그 궐위상태를 주권변용의 계기로 삼아 이뤄지는 물민주권, 그 동맹적 힘이 소외·외화·수탈·채굴되고 있는 것들 일반을 공共적인 것들로 회복하면서 공통장[레스 푸블리카]으로 구축해가는 공화(共化)의 과정은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궐위·비워냄의 창출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민주권에 의해 가리켜지는 정치적-생태적 이정표는, 그 공위·궐위상태라는 것이 위로부터의 권력 공백이라는 스캔들 속에서 모두를 걸려넘어지게 하는(모두의 정치적·윤리적·미학적 속내를 들춰내보이게 하는) 스칸달론(걸림돌)에 의해 고착되거나 고정되지 않는 역(逆)-장치적 디딤돌이라는 점을, 축적을 위한 투자·투입·투하의 연결망 사이에 일그러진 채로 얽혀 있는 새로운 사회를 분만중인 산파적 폭(권/위)력의 발현 시공간임을 알게 한다. 공위·궐위에서 무주·공화로 전개되는 물민주권의 발현은 국가 안위의 결정적 극한에서 예외주의 친위쿠데타로 수렴되거나 그런 쿠데타를 합법적으로 활용하는 여기 정상상태적 민주정체[(d’)État]의 홈 패인 경로의존적 통치이성에 일격(coup)을 가하는 다른 쿠데타, 유사공통적 레종데타의 폭력연관을 절단하는 전적으로 다른-신적인 쿠데타이다. 인간·비인간의 자기 구제력의 증강을 위한 인공보철물로서의 국가이성, 그 진정한 핍진실적 레종데타는 신적인 물의·물색의 쿠데타적 성분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 한에서 ‘인민의 안전이 최고의 법이다’라는 정치체/코먼웰스의 과제격률은 다음과 같이 확장되면서 확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다음과 같이 달리 세속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민의 자기 구제 안에 신적인 노모스가 있다. 2-1. 무-아르케, 무지배적 이소노미아(평등/자유)를 가리켜보이는 무-주와 공-산의 정치철학, 연계적 시초축적의 매개기계 비판. 『빛의 혁명 183』은 “물민다중의 공산(共山)을 위한 두 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는(空) 물민다중의 힘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제도 이전의, 제도에 대항하는, 비제도적 힘의 움직임이다. […] 또 하나는 대의권력을 비우는 일이다. 대의권력의 유사-자립성을 비우고 그것을 물민다중의 직접적이고 구성적인 활력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 중심으로의 개헌이 이 일에 속할 것이다.” 보이지 않게 비어 있으므로 실체화되거나 대상화되지 않는, 주인들에 의해 계측되거나 조절·절합·사목되지 않는 물민주권. 이를 움직이는 것들 중 하나로 모종의 신적인 힘을 예시해 놓게 된다. 저 소크라테스의 행위와 지성에 항시 “반대”를 속삭임으로써 그가 “끝내 잘 되도록” 했던 “신적인 것” 혹은 “영적인 것”이 그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민회에서의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고, “그런 식의 정치를 하고자 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이 나라에서 올바르지 않은 일들과 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막으려고 나설 때 무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인바, 올바른 것을 위하여 진정으로 싸우고자 하면서도 살아 남으려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사인(私人)으로 지내야 하지 공인(公人)으로는 지내서는 안 된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고 속삭였던 “다이몬(영적인 것)” 혹은 “신의 알림(to tou theou sēmeion)”.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주인의 법권리에서 배제된 것들(노예·여성·외국인)의 모임 현장에서 말을 주고받도록 제시했던 신적인 다이몬의 말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소크라테스의 ‘사인’이란, 합법적 민회 안에서 (입)법의 경계를 획정하는 ‘공인’의 폐쇄회로적 법권리와 그들 공인·데모스의 지배(민주정체)를 떠받친 유사-직접성의 재생산체제를 어긋내거나 비켜치는 일격의 힘, 소크라테스적 사선(斜線)-클리나멘으로 발현하는 쿠-데타적인 힘의 회합을 표시한다. “신과 인간의 중간에 존재하면서 그 빈틈을 채워주고 이 우주 전체를 그 자체에 결합시켜주는 능력을 지닌 존재”(플라톤, 『향연』)로, “그 숫자 역시 많으며 그 종류 또한 다양”한 것으로 정의되기도 하는 다이몬은 행복(에우다이몬)과 불행(카코다이몬)을 가르는 운명적 기로에서의 결정적인 인도력, 만물색의 연결적 행복을 위한 신성의 속삭임이다. 엄연히 신적인 로고스·이성인 다이몬의 그 말은 그 속삭임을 자기 안에서 듣지 않을 수 없는 이로 하여금 자기를 거슬러 자기 자신 너머로 지향해 가도록 하는 힘의 형식이다. 12·3 계엄령 직후, 지체 없이 일상을 끊고 달려나가 국회 앞을 광장이자 난장으로 만들었던 이들, 그 물민의 구성원들·동맹원들은 자기 안에서 들려온 다이몬의 속삭임에 따라, 거부할 수 없는 수동성의 경험 속에서 역설적으로 능동적인 행위자로서 흔들림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자기 안의 자기 너머로부터 오는 불가항력적인 수동화-능동화의 촉발력, 계측되거나 기획될 수 없는 그 미지적 힘 x의 발현 속에 이른바 국민저항권의 행위가, 계엄국가에 대한 정당방위권적인 일격이, 신적인 쿠데타가 있었다: “사람들은 술마시다가, 자다가, TV보다가, 귀가하다가 국회의사당 앞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이 나라의 주인인 여러분이 나서주셔야 합니다’(이재명)라는 대의적 국민주권도 넘어선다. 오히려 그것은, ‘이건 아니지!’라고 말하는 부정과 비움(空)의 움직임들의 함께-모임(共)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다이몬의 속삭임이라는 문제화의 형식, 달리 말해 행위·행위성의 조건·형식·책임의 표시·지표로서의 신적인 로고스. ‘이건 아니지!’라는 제도대항적(대항제도적인) 힘을 관통(조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신적인 로고스·이성의 발현 형식이다. 그것은 진정한 쿠데타 속에서 이뤄지는 물민의 자기 구제를 위한 조건, 물민의 자기 자체적 의지 너머로부터 오는 조건이다(이는 필시 3·1, 4·3, 4·19, 5·18, 4·16 같은 동료 시민들의 역사적 희생의 누적 속에서, 지난 계엄 치하의 희생들에 대한 애도의 체제적 억제력을 거슬러 억압된 것의 필연적-불시적(不時的) 회귀가 취하는 사건성의 형식이기도 할 것이다. 숨겨진 희생의 색인은 익명적인 것들에 의해 불시에 인용되며 은닉된 대본에서 필연적으로 되살아나는 대사로 활성화되는바, 그런 한에서 12·3 계엄령 직후 신적인 매개의 속삭임과 그에 따른 수동적 행위의 적극적인 수행은 불가능한 애도의 역설적 형식이기도 할 것이다). 2-2. ‘부정과 비움의 움직임들’, 그것들의 ‘함께-모임’으로 이뤄지는 물민들의 주권적 회합체는 주인들의 축적 대행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섭정체, 축적 공식들과 연계된 매개적 대의관계를 섭정하는 연결체·동맹체이다. 달리 말해 그 모임은 “물민다중의 상호관계가 외화되어 대의기관들 자신의 권력인 것처럼 행사되는 물신화된 대의권력”을 비움(공위화·궐위화)의 방향으로, 동시에 공통화(commoning)·공생의 물색을 증강시켜가는 쪽으로, 권력에의 합성 혹은 합치를 거절하면서, 권력교체 프로그램이나 집권의 청사진에서 스스로를 빼고 비움으로써 섭정해가는 제헌적 클리나멘들의 접선체이다. 물신화된 축적권력은 세계의 물화(物化)를 가속하는, 신 즉 자연을 소외의 일반화 공정으로 침식함으로써 이윤을 채굴하는, 그렇게 세계의 공멸로 향해진 개체화상태의 고착 속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폭력의 코나투스다. 그런 물신의 권력적 자기보전 안에서 그것을 거슬러 그것 바깥으로의 변용을 지향해가는 힘, 그것은 신 즉 만물색을 회복해가는 폭(권/위)력, 안티물신적인 물색의 회합력과 연결력으로 발현해가는 비움·공위화의 게발트인바, 그 과정을 명명하는 것으로 물민주권적 섭정이라는 이름을 새겨 놓고 싶다. 그런 한에서 대의제-물신(Fetish)에 의한 세계의 물화를 넘어서는 힘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물민에 의한 물-신(thing-god)화, 대의제에 대한 물민주권적 물색 과정으로서의 동맹섭정, 즉 물-민-신(thing-people-god)의 공통화하는 힘. 2-3. 물-민-신이라는 네트워크적 힘의 발현 과정, 혹은 신의 지적인 사랑 속에서 북돋워지는 공통장(commons)의 구축에 물민주권적 섭정을 “섭리”라는 이름으로 표현하는 맥락을 접선시켜보게 된다: “대항은 늘 새로운 열림, 새로운 시작이다. 절규, 풍자, 항의, 타도는 풍요(Reichtum)의 대항적 넘쳐흐름의 양상들이고 대항은 새로운 열림의 입구이자 출구이다. 이런 밑거름 위에서 나는 섭정이 다중의 상상적 기획이며 공통적인 것의 긍정적 지시이고 넘쳐흐름의 새로운 방향 제시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감히 신학적 용어를 가져와 보면 섭정은 섭리의 실현 과정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섭리를 뜻하는 providence가 어원적으로 pro(미리)와 videre(보다)의 합성어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말은 신의 지성과 행위를 지칭해 왔지만 나로서는 미리 보는 자가 인간·비인간 다중의 공통된 지성과 정동, 그리고 존재론적 역량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신의 지성과 행위에 연동되고 있는 미리 보는 자들의 연결망으로서의 물민주권적 섭정, 신 즉 만물색에 초점 맞춰진 인식과 예감과 존재역량의 확장. 이는 인간·비인간 동맹체를 이뤄왔던 역사적 사물로서의 “꽹과리”에 대한 인식 속에서 또 하나의 구체성을 얻는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 속 안순애 씨가 투쟁운동의 실천을 일상생활의 저변으로 “하방[下放]”하고자 했던 의지에 근거하여, 그러니까 그녀의 “꽹과리 두드리기가 깨달은 자, 아는 자의 선도[先導] 행위가 아니라 ‘모름’과 ‘무서움’을 수반한 몸부림이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꽹과리라는 사물의 행위성이 표시된다: “꽹과리 소리는 둘러보는 돌봄이다. 그것은 주변을 둘러본 후에 나오는 소리이다. 그 둘러봄은 자신이 속한 농민대오를 지키고자 하는 돌봄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돌봄은 둘러봄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뒤로 돌아봄과 앞을 내다봄을 매개하는 행동이다. 앞을 내다보면서 뒤를 돌아보는 것, 혹은 뒤를 돌아보면서 앞을 내다보는 것이 돌봄이다.” 이는 미리 내다보는 신의 지성과 행동이 꽹과리와 그것의 두들기기, 소리, 전파로 이어지는 돌봄-둘러봄-뒤돌아봄-앞내다봄이라는 윤리적이고 역사적인 사물행위력을 따라 하방/세속화되고 있는 이미지인바, 그 과정에서 꽹과리는 다름 아닌 “적들”과 죽음에의 공포를 마주한 상태에서 창출되는 “상황적 앎”을, 그 위기시의 “공감, 연대, 규합의 효과”를 표시하고 있다. 저 남태령에서 달리 부활했던 우금치 동학농민의 꽹과리 소리, 그 사물과 그 연결망의 효력은 전광훈과 헌금자본을 두고 경쟁했던 “세이브코리아”의 예외-국권주의적 거대 기도회를, 그 모임으로 실효화되는 신보다 더 신적인 “섭리”의 환속화를 앞질러 끝냈던 게 될 터이다. 3. 응원봉이 사물의 탈영토화된 연결망 속에서 섭정적 시위력으로 발현되기 전이던 2024년 10월 초, 조정환은 12·3 비상계엄의 구체적 원인 중 하나였던 아래로부터의 “촛불 섭정 운동”이 국가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경계하면서도 국가와 자본에 포섭되지 않는 “섭정의 편재성”을 포착했다(이는 홀러웨이의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을 계기로 삼은 것이었다). “홀러웨이의 생각을 섭정론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케인스주의와 사회국가는 무리의 봉기력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이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신용확장 역시 무리에 대한 두려움의 연속이다. 이것을 무리의 ‘그림자 섭정’이라고 부른다면 어떨까? 루이 보나파르트를 취약함의 극단으로 몰고 갔던 두더지 섭정이 생각나지 않는가?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너 두더지여, 잘도 팠구나!’라고 말하는데, 홀러웨이는 ‘너 무리여, 잘도 다스렸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그림자 섭정은 자본관계의 취약화와 해체를 향한 일종의 ‘부정적 섭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자본과 국가가 가장 강한 것으로 보일 때조차 작동하고 있는 편재하는 섭정이다.” 비인간 동물 ‘두더지’의 습속·생명·기술·지하로부터의 비유와 연계를 통해 제기되는 주권적 섭정의 이미지, 섭정적 주권의 발현술. 두더지에 의한 지하 공동(空洞)의 구축, 계측불가능한 무리의 ‘그림자 섭정’은 『빛의 혁명 183』의 머리말에서 반복된다: “권력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을 때에도 혁명은 두더지처럼 그 구조물 아래로 파고들어가 권력이 딛고 선 자리를 비게 만든다. 빛의 혁명은 그런 방식으로 윤석열 정권을 텅 빈 기표로 만들어온 힘이었다.” 예외적 대권에의 접속을 주관하는 비선권력의 포어라움(대기실[前室])들, 그 집권적 통치비밀체의 숨은 지반들을 텅 비게 함으로써 통치불능에 빠지게 했던 공위화·궐위화의 존재·기술형상으로서의 두더지는 그렇게 비움의 물색과 물의로 구성되고 전개되는 물민주권의 벡터를 집약해 준다. 마르크스의 두더지에 의해 방돔 광장 전승기념탑 꼭대기의 나폴레옹 동상의 나락과 파탄(Abgrund)이 미리 고지되었듯, 『빛의 혁명 183』의 섭리적 섭정, 섭정적 섭리를 통해 내다보이는 주권의 이정표는 여기 광장 이후에 필요한 지성과 행위의 필수적 행로들을 가리켜 보일 것이다. “그러하되 혁명은 철저한(gründlich) 것이다. 혁명은 여전히 연옥(Fegefeuer)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아직 천국에 이르진 못하고 있는 ‘혁명’, 작은 배를 저어 지옥의 풍랑은 헤쳐나왔으되 아직 아닌 천상에, 그러니까 연옥에 있는 혁명. 여기 ‘광장 이후’ 역시 철저히 연옥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12·3 비상계엄의 머리를 함께 자르고 비우는 과정에서 천상의 빛을 지향했음에도 6·3 대권의 예비된 머리가 정치체의 꼭대기에 반복적으로 붙지 않을 수 없는 오늘 여기에서, 낡은 것(지옥)의 지나감과 새것(천국)의 오지 않음이라는 궐위상태는 해방적 물색과 정치적인 것의 재구성을 위한 인식과 행위의 여실한 전장을 한결같이 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연옥-궐위(purgatorium-interregnum), 거기가 광장 이후의 로두스라고 하면 어떨까. 천상의 구원의 별이 내다보이는 연옥의 끝, 그 끝을 향하고 있는 영속적 궐위화·공위화의 시공간이, 신 즉 만물색의 외화·물화로 확대재생산중인 대의매개적 간접권력체의 속성을 변용시키는 힘의 조건을 이루기 때문이다. 글‧윤인로비평가. 『신정-정치』, 『묵시적/정치적 단편들』을 지었고, 『로마 가톨릭교와 정치적 형식』, 『국가와 종교』등 1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