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5.05.08 | 비물질과 물질 사이에서…철학자와 과학철학자의 논쟁

[교수신문 2025.05.08] 비물질과 물질 사이에서…철학자와 과학철학자의 논쟁 / 이동신(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042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이 책의 목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실재론(Realism)이라는 철학 분야의 정립이다. 실재론은 세계나 사물, 존재가 인간의 인식이나 생각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뜻한다. 책 제목이 알리듯이 21세기 들어 ‘실재론의 부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한 추동력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적 전환을 경험했던 이들이 몸과 물질의 의의를 되찾으려는 시도에서, 사이버네틱스와 디지털 기술 발달로 허물어지는 코드와 물질세계의 경계가 자아낸 새로운 현실의 경험에서, 생명공학의 혁신이 가져온 생명과 비생명의 융합에서, 그리고 기후위기와 인류세로 깨닫게 된 세계라는 허상의 자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실재론의 부상”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정당해 보인다. 당연히 여기에 동참하는 이들은 남가주건축대학교 철학 특임 교수인 하먼과 유럽대학원대학교의 질 들뢰즈 석좌교수인 데란다 외에도 상당히 많다. 두 사람이 대담 중에 언급하는 학자들 모두가 “실재론의 부상”을 견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판 서문에서 하먼이 짧게 불평하듯이(그리고 그가 다른 인터뷰에서 반복하듯이), “가장 저명한 대륙철학 실재론자 중 두 사람이 대륙철학 학과들에서 대체로 무시당하고” 있다(11-12). 이 책이 처음 나왔던 2017년에도 그랬고, 하먼이 한국어판 서문을 쓴 2025년에도 여전히 그렇다. 왜일까? 그리고 그처럼 “대륙철학 학과들에서 대체로 무시당하는” 현실에서 “실재론”이 정말 “부상”했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그런 무시에도 “부상”한 혹은 정립된 분야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책 속에서 이런 질문들의 답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는 따져볼 만하다. “실재론 부상”의 현 상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목표는 두 사람의 실재론을 주목해야 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실재론의 부상”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고, 주지하듯이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이에 동참하며 다양한 작업을 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특별함을 알려야 한다. 즉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해야 한다. 책의 첫 장인 “실재론과 유물론”은 이 구분을 맡는다. 비록 데란다가 “실재론적인 동시에 강렬히 유물론적”이지만, 하먼은 그럼에도 그와 자신의 실재론을 소위 “실재론 없는 유물론”과 구분한다. 하먼의 제물이 되는 이는 캐런 버라드로서 하먼은 버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이 “실재론적인 것은 전혀 없”다고 비판한다(19). 그 이유는 버라드가 “실재에 인간의 마음으로부터의 자율성을 ...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먼은 설명한다(19). 하먼처럼 자주 언급하지는 않는 대신 데란다는 좀 더 강렬하게 “버라드처럼 과학의 더 나쁜 부분들에 호소하는 사람들을 훨씬 더 경멸합니다”라고 말한다(26). 왜냐하면 “관찰자의 의식이 어떤 한 전자의 현행 상태를 결정한다는 관념은 하나의 신화”일 뿐이기 때문이다(26). 두 사람이 버라드보다 더 많이 언급하는 학자는 브루노 라투르이다. 라투르에 관한 책을 쓸 정도로 그의 작업에 지속적 관심을 보인 하먼은 다소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과 라투르를 구분한다. 라투르의 “평평한 존재론”에 동의하면서도, 하먼은 그가 “자연을 ‘사물-자체’와 동일시하고 문화적인 것을 ‘우리에-대한-사물’과 동일시”하면서 스스로 존재론적 평평함을 깨뜨렸다고 비판한다(268, 269-70). 이렇게 자연과 문화를 다르게 다루면서, 자신의 “관계적 존재론이 다루기 쉬운 대상”이라는 이유로 라투르가 “계속해서 ‘문화’쪽을 선호”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270). 데란다의 “평가는 덜 관대”하다(271). 왜냐하면 “라투르는 단지 이른바 ‘과학학’ 분야의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고, 이 분야는 “자기준거적 비정합성”에 따라 “절망적으로 잘못 인도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271). 버라드와 라투르가 두 사람의 비판에 동의할지 궁금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비판하며 구분하는 일이 “실재론의 부상”을 입증해야 하는 두 사람의 첫 번째 목표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어찌 됐든 하먼과 데란다의 비판은 책의 세 번째 목표를 엿보게 해준다. 바로 두 사람의 차이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실재론이라는 철학을 다루고 있지만, 하먼이 “강렬히 실재론적인”(18) 학자라면 데란다는 물질론적 실재론을 펼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무엇보다도 하먼이 철학자로서 실재론에 접근하는 반면에 데란다는 철저히 과학철학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데서 기인한다. 대담 내내 후자가 대체로 과학 및 과학기술 영역에서 예를, 가령 컴퓨터 시뮬레이션, 우라늄 원자, 오일러, 신경망 등의 예를 찾아 논의를 이어가는 것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데란다의 실재론은 물질 자체에 주목하는 작업이고,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작업을 실재론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도구이론에서 실재론을 추출한 하먼은 ‘물질’이라는 존재를 그처럼 확실하게 정할 수 있는지 의심하며, 항상 물러나 있는 물질 혹은 객체는 비유나 암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상반된 입장은 책의 서두부터 물질과 비물질의 논의에서 드러난다. 하먼은 “모든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정말로 거부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대담 내내 비물질 그리고 이어서 형상 혹은 형상인을 강조하며 데란다에게서 긍정적 답변을 얻어내고자 한다(31). 하지만 이에 대해 데란다의 답변은 대부분 “글쎄요”라는 말로 시작하며 두 사람의 차이를 재확인한다(32, 34). 결국 이 차이는 철학과 과학 간의 관계의 문제이고, 그렇기에 하먼은 “철학과 과학 사이의 차이”에 관한 데란다의 의견을 물어보지만 차이를 좁히지는 못하는 듯하다(43). 대담 마무리에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정리하면서, 하먼이 데란다에게는 “자연과학이, 철학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대한 ... 사유의 바로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라고 정리하고, 본인에게는 “철학은 과학보다 예술과 더 유사한 인지적 활동”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92). 철학적 실재론과 과학적(물질론적) 실재론의 차이로 정리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차이는 좀 더 중대한 문제, 어쩌면 이 차이를 포함해서 하먼이 말미에 정리한 네 가지 차이 아래 잠재하는 문제를 암시한다. 바로 인간의 문제이다. 인간과 실재의 관계를 상관주의식으로 정리한 칸트 철학을 거부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사람 중에 하먼에게만 인간이 문제로 남는다. 실재를 물질의 “창발적 특성”이 발현되는 “역사”라고 이해하는 데란다에게 인간은 물질로서 이 역사에 참여할 뿐이다(33, 34).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여전히 물질의 창발 과정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기본적으로 하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객체지향존재론이 하이데거나 후설의 철학과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인간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도 하나의 객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먼에게는 인간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데란다가 말하는 물질의 창발적 역사보다는, 하먼은 비물질과 형상인에서 실재의 가능성, 객체의 특별함, 감각적 현실의 다채로움의 가능성을 찾기 때문이다. 이 비물질과 형상인은 물질처럼 직접 드러나거나 경험할 수 없기에 비유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칸트의 예에서처럼 인식론이 도입될 여지가 생긴다. 하먼은 이러한 인식론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사이의 분류학적 구분을 가정”하기에 “잘못된 종류의 이원론적 존재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208). 대신 데란다의 제안에 동의하듯 하먼은 비인간 존재들도 인간처럼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인지”라는 용어를 “기꺼이 수용할 것”이라고 밝힌다(211). 철학적으로 실재론을 접근하기에 인간중심의 인식론의 침투가 가능해지고,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다루어야만 하는 일이 하먼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첫 번째 목표에서 얘기했던 현실로 우리를 다시 돌아가게 한다. 바로 실재론, 특히 하먼의 실재론이 “대륙철학 학과들에서 대체로 무시당하는” 현실이다. 시간이 “오로지 주관적으로 현존”한다는 하먼의 발언이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 사이의 비대칭성과 흡사한 비대칭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데란다의 지적은 이 현실을 살짝 엿보게 해준다(258, 259). 이 지적에 하먼은 바로 “저는 시간이 인간적 의미에서 주관적이라고 절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관계적 층위를 뜻하는 감각적 층위에서만 생겨날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라고 반박한다(259). 데란다의 오해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상식적으로, “주관적”이라는 말이 “인간적 의미”와 함께 해왔기 때문에 생긴 듯하다. 무엇보다 하먼 본인도 “인간적인 것과 동일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실재론을 설명하고 있기에 오해는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과학보다는 철학, 미학, 문학 등 소위 인문학적 틀을 차용하고, 인문학적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인간적”이 아니라고 하기에 모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데란다는 모순을 유발할 수 있는 하먼의 “의인화” 방식을 우려하지만, 하먼은 “의인화를 회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역시 상당히 크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다(259). 실재론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책 끝자락에 나오는 이 오해의 순간(과연 ‘순간’인지는 의문이다)은 하먼에 대한 오해가 책 외부에서 얼마나 심할 것일지 짐작하게끔 한다. 외부에서는 여전히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하먼에게 데란다와의 대담이 얼마나 소중했을지 느껴지면서도, 두 사람이 자신들과 다른 실재론적 학자들을 지나치게 구분하는 순간순간이 다소 안타깝다. 다양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실재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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