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Pic 82호 2025.04.18] 연민, 분노, 그리고 희망 / 정현주(전남대학교 철학연구교육센터 학술연구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dJ3b3uPCZo6J7e4Jhsq1od8kREklzQw “나는 연민과 분노를 생각했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농민, 특성화고 출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마음,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의 마을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생각했다.”1) 1) 「[기고] 응원봉 물결친 남태령의 밤…난 농사를 더 열심히 짓기로 했다-트랙터 상경시위대 강광석의 기록-」, 『한겨레신문』 2024년12월25일자. 1 12월7일 탄핵정국으로 요동치던 날, 화상대화 창에서 존 홀러웨이는 폭력과 잔인성에 대해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행동의 희망에 대해 말했다. 억압이 없는 사회를 희망하는 것. 희망은 나아가 사회적 난국의 한복판에서 우리 안에 흘러넘치는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풍요(richness)라고 언급되었다. 대항하는 힘에서 나타나는 풍요는 넘쳐흐르는 힘을 표현하는 홀러웨이의 낱말이며, 권력과 부/지배력과 지배질서에 어긋나고 들어맞지 않는 방식을 의미한다.2) 이 어긋남의 방식은 적극적인 저항이기 전에 태만과 비복종의 형태로도, 일상 속 작은 저항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동지의 길고 긴 밤, 길 한가운데 고립된 트랙터 상경시위단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놀랍게도 수많은 연대의 물결이 밤새도록 남태령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련의 사태들은 존 홀러웨이의 『폭풍 다음에 불-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게 만든다. 화폐의 지배, 그리고 우리를 전쟁과 절멸로 추인하는 세계에 맞선 희망을 주제로 하는 책을 통해, 남태령으로 이어지던 연대의 물결과 광장에 넘실대던 응원봉의 희망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2) 풍요의 정의는 다음을 참조. 존 홀러웨이, 『폭풍 다음에 불-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 조정환 역 (서울: 갈무리, 2024), 417-418쪽. 2 『폭풍 다음에 불』은 화폐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절망과 희망이라는 두 측면을 가로질러 놓인 다급한 문제로 진단한다. 희망없음은 자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과 불안의 보편전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자본의 착취 아래 희망없는 시대를 살고 있을지라도 화폐의 지배 밖에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회관계로서 화폐의 취약성을 말하는 구체화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지배에 균열을 내고 우리의 저항과 투쟁이 화폐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져야할 필요가 있음을 탐구한다. 이 책은 그럼으로써 희망을 ‘배우자’고 말한다. 3 홀러웨이에게 희망은 이성적 희망이며, 희망을 생각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이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이성적인 희망, 교육받는 희망, 이해된 희망” 개념의 깊은 영향을 드러낸다. 독타 스페스(Docta spes), 생각하는 희망은 소망과 다르다(45쪽). 우리를 죽이는 체제에 대한 투쟁은 파괴의 동역학을 부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같은 희망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존엄’이며, 이기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저항하는 것이기에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47쪽). 4 자본주의에 가장 비판적인 사상가답게 홀러웨이는 ‘화폐’의 지배야말로 거대한 재앙이라고 말한다. 화폐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완전히 지배하며 아마존의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으로 침투해 있다. 세상을 뒤흔들었던 팬데믹의 여파도 화폐에는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화폐와 자본이 가상적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동안 전지구적으로 점점 더 큰 역할을 하면서 “화폐의 운동은 차이의 ‘환원할 수 없는 다양성’을 사회적 재생산의 단일 논리 속으로 빠르게 끌어들인다(73쪽).” 희망은 자본으로 인해 제약되며, 희망없음은 사람들을 노동력으로 끌어들이는 화폐의 지배에 기초한 사회적 착취를 대면하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비참함의 다른 이름이다. 5 우리가 자본주의 안에서 살고 있다. 이는 책의 주요 전제 중 하나인데, 좋든 싫든 이 평범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넘어서며, 나아가고자 희망한다고 홀러웨이는 말한다(79쪽). 자본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이다. 우리는 자본에 맞서 반응하고, 관계하기-행동하기의 다른 방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운다. 희망은 그 투쟁의 일부이다. 희망의 기초는 점점 좁아지는 터널의 벽에 대항해서 반복해서 몸을 던지는, 적대적으로 대항하고 넘어서는 풍요이다(99쪽). 6 화폐에 대한 홀러웨이의 요점은 분명하다. 화폐가 없는 세계를 한번 상상하자는 것이다. 화폐의 지배는 환경파괴와 모든 자본주의적 착취의 배후에 있는 동역학이다. 본질적으로 화폐는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에 자기 확장을 부과하는 사회관계의 한 형태일 수밖에 없다. 또한 화폐는 상품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가치의 단순한 상징이며 신용의 존재를 함축한다(260쪽). 하지만 화폐에 기반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화폐의 자기 확장, 즉 이윤에 의해 움직인다. 이윤은 자본에 의해 전유된 더 큰 잉여가치의 생산에 기반한 확장이다(249쪽).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 축적이 미래의 가치창출에 대한 예상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가상적이다. 이러한 성격은 사회발전자체의 논리마저 자본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 안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희생자라고 간주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의 창조자임을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277쪽). 7 홀러웨이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화폐의 본질적 성격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출발점이 사회적 관계의 형태로서 화폐가 앞으로 더 취약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화폐위기의 주체들이다. 분노는 지배로부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쪽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배제를 위해 파시즘의 공포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따라서 화폐와 국가의 구조에 대해 말하는 과정은 바로 자본의 권력에 맞서기 위한 대항형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국가와 자본주의 지배의 구조를 수용했던 사람들이 화폐의 본질적 성격을 이해하고 투쟁과 저항, 거역, 인간성을 시야에 둠으로써 견고한 자본주의 지배의 구조에 근본적인 균열을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책 전반에 걸쳐 편재한 자본 논리의 구조적 문제와 그 위급함을 재인식하는 일로부터 “생각하는 희망”이 풍요의 형태로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화폐의 지배에 저항하는 행동과 연결하기 위해 희망의 성격을 진술할 때 홀러웨이의 어휘는 때로 마법처럼 풍요로 비약하며 희망은 지배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의 ‘생각하는 희망’은 2024년 12월 한국의 변화무쌍한 정치적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탄핵정국의 폭발적 갈등상황은 군사독재시대의 교훈을 한국인 모두가 동일하게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을 노출시킨다. 한쪽에서는 비상계엄의 위험을 인지하고 권위주의 통치/독재의 재생산을 시도하는 행위에 대해 “아니다”라고 외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 시도가 최소한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이라는 합법적 틀 안에서 시도되었다고 “탄핵불가”를 외친다. 서로 다른 생각들은 그들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다. 이 둘 모두를 우리는 동일한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희망’은 사회적 관계에서 파멸과 파국으로 치닫게 이끄는 지배의 근본 역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는 독재체제를 허용했던 역사와 이를 가능하게 이끄는 동역학을 만들어내는 주체다. 이를 이해하는 과정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인간성을 시야에 두고 지배구조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거역과 대항, 투쟁이 나타나며 이것을 홀러웨이는 희망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가 균열을 거쳐 도달하는 곳은 풍요다. 즉 균열은 차별과 배제의 역학을 이해하고 그 고통에 조건없이 함께하려는 희망에서 그리고 연민과 분노로부터 실행되는 연대적 대항에서 근본적으로 실현된다. 홀러웨이적 희망은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