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Pic 80호 2025.02.15]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 / 추유선(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기사 원문 보기 :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YE-jGLZcgAWaA1UatDABCDrJNdOJhz0 12월 3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찍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던 날이었다. 잠시 잠에서 깨 시간을 확인하는데 친구들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으니 빨리 뉴스를 보라는 것이었다. 통증도 잊을 만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유튜브 뉴스들을 찾았다. 레거시(legacy) 채널뿐 아니라 다양한 정치 채널에서 속보로 계엄을 알렸으며 국회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송출됐다. 그날은 밤을 새우고 말았다. 그 후 12월 14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환율은 치솟았고 증시는 폭락을 거듭했으며 IMF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뉴스가 앵커들의 심각한 어조에 실려 연일 쏟아졌다.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경험으로 인해 계엄이라는 단어보다 ‘경제위기’는 필자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한고비를 넘긴 후, 그전부터 읽고자 했으나 읽지 못했던 존 홀러웨이의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을 본격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폭풍’ 다음에 ‘불’이라니... 이 책이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임을 홍보 글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모든 폐허 위에 어떤 희망을 꿈꿀 수 있을지 두려움과 함께 궁금증이 밀려왔다. 또한 IMF 외환위기는 폭풍이었을지, 작금의 이 사태가 불일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TV 뉴스에서는 산불로 인해 무섭게 불타오르는 LA 주택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은 책 뒷부분의 참고문헌 등을 제외하고 8부 428페이지의 꽤 두툼한 책이었다. 목차를 지나 그다음 페이지에 쓰여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잠언]의 글귀 ‘물통은 가둔다. 분수는 넘쳐흐른다’에서 촉발된 ‘화폐는 가둔다. 풍요는 넘쳐흐른다’는 너무나 매력적인 글귀였는데 바다가 더 이상 꿈의 수평선 너머가 될 수 없게 된 이후 우리는 물통 안에 갇혔다고 생각한 필자의 생각을 체계화시켜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존 홀러웨이는 자본이 어떻게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위기로 몰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2008년 미국 서브 프라임 모기지 금융위기사태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 지구적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화폐가 점점 더 가상화되고, 정치 경제가 하나로 단단히 묶이게 됨으로써 화폐의 위기는 무한히 지연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우리의 위기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경우 인간, 비인간 생명체 모두 절멸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자본주의의 위기와 이 위기를 넘어서 나아갈 수 있는 희망,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조금 더 존 홀러웨이의 주장과 질문을 세세히 살펴보겠다. 책은 2017년 7월 25일 월마트 주차장 트레일러에서 질식사한 열 명의 인신매매된 이민자에 대한 뉴스에서 시작한다. 사람의 생명과 화폐를 대등한 교환가치로 봄으로써 발생한 사건으로, 관심을 두고 뉴스를 살펴본다면 유사한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0년 12월 20일 포천의 비닐하우스에서 동사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속헹 씨의 사건, 2023년 3월 8일 포천 돼지 축사에서 일을 했던 쁘라와 세닝문추 씨(태국) 사망사건뿐 아니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12월 3일 한 밤의 계엄, 미국 자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다양한 정책들 등 대부분의 사건들 뒷면에는 화폐가 있다. 이러한 뉴스들을 접할 때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화폐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분노가 대항-희망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을까? 존 홀러웨이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논리에서 시작한다. 실체가 없는 희망이 단지 소망적 사고로 흐르는 것이 아닌 이해된 희망, 더 이상 세계를 그대로 두지 않을 희망의 개념인 독타 스페스(Docta spes)이다. 즉 우리의 분노는 세계를 그대로 두지 않을 ‘희망’인 것이다. ‘희망’은 끊임없이 부딪히는 존재인 우리를 변형시키고 재생산할 수 있다. 즉, 대항하고 넘어서는 존재, 넘쳐흐르는 ‘풍요’의 존재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풍요*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자. * 존 홀러웨이는 풍요를 ‘wealth’가 아닌 ‘richness’로 표현한다. 그것은 옮긴이가 이 책의 419 페이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맑스가 사용한 ‘부Reichtum’은 독일어 형용사 reich는 power(ful)을 함축한 단어로 넘쳐흐르는 힘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용어이며, 한자어 ‘풍豐’ 역시 그릇 위에 가득 담긴 음식이 넘칠 것 같은 형상을 가르키며, ‘요饒’도 먹을 것이 넘치는 모습을 의미하는 열린 구조이기에 존 홀러웨이에게 ‘풍요’는 존재론적 역량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고 한다. 우리의 풍요는 절규하며 덫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대항-풍요, 대항하고-넘어서는 풍요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즉 절규하며 덫에 갇혀 두려움에 옴짝달싹 못 하는 존재가 아닌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투쟁, 투쟁의 기쁨에서 시작하자고 한다. 이는 대상(자본주의)을 향한 투쟁이 아닌 투쟁의 주체(우리의 존엄)로 강조점을 전환함으로써 시작된다. 존 홀러웨이는 자본을 향한 투쟁이 계급투쟁일 경우 자본이라는 히드라의 머리 하나를 잘라낼 뿐임을 강조한다. 히드라의 머리는 끊임없이 다른 얼굴로 자라날 뿐이다. 즉, 노동자들의 투쟁을 정체성 투쟁, 계급투쟁으로 한정할 때, 인종, LGBT(성소수자), 노동자,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등의 투쟁 역시 또 다른 정체성의 틀에 가두는 것으로 한정될 뿐이다. 정체성은 풍요가 가진 흘러넘침에 반하는 것이며 명사가 아닌 동사이고 혁명적 주체인 것이다. 풍요는 “우리의 창조적 잠재력의 절대적 발휘”로 꿈이 묻히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결정권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풍요는 상품 형태에 마구-채워져-오용된, ‘좌절된 풍요’이기도 하다. 갈수록 집에서 나오지 않는 청년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또한 ‘수저론’을 들면서 태생적으로 타고난 계급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씁쓸한 좌절이 사회에 퍼져있다. 이러한 청년들은 전체 인구수 대비 큰 숫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조적 인식이 퍼진 데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부에 한정되어 풍요를 인식하게 된 것일까? 존 홀러웨이는 ‘화폐’를 사용하는 것에 자본주의의 위기와 지연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상품의 교환으로 화폐가 사용되는 것과 달리 화폐가 노동을 통해 축적된 자본으로 나아가면서 화폐는 스스로 균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즉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모든 것을 빼앗긴, 봉건군주에게서 해방된 자유인들이 팔 수 있는 것은 노동뿐이었고 화폐(임금)와 교환을 하게 됨으로써 자본이 축적된 것이다. 여기에 화폐, 자본의 두려움과 위기가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자본은 노동자가 저항하거나 반란할 것에 대한 두려움, 노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노동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을 갖고 있고 그것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또한 자본이 그 취약성으로 인한 한계에 부딪히자 물질성을 버리고 가상으로 들어감으로써 부채뿐 아니라 인간의 인지활동까지도 상품가치 안에 구겨 넣어지는 부의 틀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부로 폐쇄된 풍요. 좌절된 풍요는 성난 무리이다. 반항하는 자들의 힘이며, 비복종하는 자들의 힘이다. 케인스와 케인스주의가 두려워한 것은 무리에 대한 두려움, 기존의 지배 논리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한, 자본의 정체화 논리에 끼워서 맞춰지지 않는, 정체화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바바라 브제지카(Brzezicka)에게 ‘무리’는 퀴어이다. 무리는 자신의 구성원을 비정체화하며 어떤 안정적인 집단 정체화에서도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안에서 분노의 ‘무리’로 인해 미래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사건들을 마주한다. 각기 다른 시간 안에서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하겠지만 반드시 경험하게 된다. 미래의 결정적 사건을 만듦으로써 지향성을 만들었던 주체는 다름 아닌 ‘무리’였다. 최근 우리는 이러한 ‘무리’의 힘을 목도하고 있다. 처음 응원봉 시위는 대통령 탄핵을 위한 ‘무리’였으나 남태령으로 달려감으로써 사회적 계급이나 연령을 넘어섰으며, 장애인차별철폐시위에도 합류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지향성을 구체화하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존 홀러웨이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상품, 화폐 안에서-대항하며-넘어서는 존엄한 분노를 지닌 ‘무리’를 목도하고 있다. ‘희망’의 비스킷을 다함께 나눠 먹고 있다. 존 홀러웨이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폭풍’에 대한 개념을 발터 벤야민(Water Benjamin)에게서 빌려왔다. 발터 벤야민(Water Benjamin)이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보고 시적으로 풀어냈던 세계**를 가져와 우리가 만들어낸 폭풍, 우리가 쓸려가고 있는 폭풍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금본위제가 폐지된 후 화폐는 신용에 의해 아직 생산되지 않는 미래에 더 많은 수익을 만들어 가는 구조로 점점 더 가상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금리인하를 통해 더 많은 자본을 무분별하게 빌릴 수 있게 하였고 부채로 투자도 할 수 있게 했다. 미국의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그 대표적 예로 전 세계 경제침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영향은 2020년 코로나 사태를 지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부정책이었던 양적완화는 장기침체를 불러일으켰으며, 현재 가속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을 형성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러한 상황을 [파이낸셜 타임스]의 마틴 울프는 [다음번에는 불이다]로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주셨지. 다음에는 물이 아니라 불이야”*** 그러나 우리는 다가오는 폭풍의 희생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폭풍의 잠재적 주체이다. 또한 폭풍을 넘어 대항-희망을 가진 존재이다. **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역사테제 9]에서 커다란 눈을 뜨고 과거를 응시하는 천사는 쌓이는 폐허 위에서 부서진 잔해들을 모아 다시 일으켜서 세우고 싶지만 세차게 불어오는 진보의 ‘폭풍’에 밀려 미래로 떠밀리고 있다고 했다.** 마틴 울프 : “나는 이 장의 제목을 미국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 쓴 훌륭한 책의 제목에서 따왔다. 즉, 다음 금융위기는 단순한 홍수가 아닐 것이고 그보다 더 파괴적인 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폭풍이 오고 불이 오기 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부채의 만성적 팽창은 점점 더 많은 인간 활동이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를 화폐 안에 가두고 할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한다. 이 동역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가둠의 체제를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대항하며-넘어서-부수고-넘쳐흐르며 스스로를 창조하는 힘이다. 즉 자유인으로서 자본에 저항하고 반란함으로써 가둠의 체제를 취약하게 만들 힘이다. 좌절, 불만, 저항에 의한 분노는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는 우익으로 향하여 여성으로, 이주 노동자로, 난민으로, 성소수자에게 폭력적으로 표출되며 그들을 정체성으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존 홀러웨이는 이러한 응고 안에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 우익으로 표출된 분노 역시도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추동력이 정체성주의적 형태로 재생산하는 힘이기에 이와는 대척적인 존엄한 분노****로 상호인정을 향한 끊임없는 추진력을 갖고 정체성들을 넘어서 밀고 감으로 응고된 ‘희망’을 용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대항-희망’이다. **** 사빠띠스따가 선포한 존엄하고 정의로운 분노, 디그나 라비아(digna rabia)와 남아프리카 판잣집 거주자 그룹 <아바흐랄리 바스음존돌로>의 대표 스부 지코떼 역시 “존엄은 우리 운동의 정치학 중심에 놓여 있다”(2021년 1월 27일 발표)를 통해 단지 분노가 아닌 존엄한 분노를 통해 희망-분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필자가 책을 손에서 내려놓았을 때 LA 산불은 다행스럽게도 소멸했고 중국은 미국의 AI 회사들보다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뛰어난 AI를 개발하였음을 발표했다. 미국은 그로 인한 파장으로 증권가가 출렁거렸다. 우리나라는 탄핵이 길어지면서 경기 체감지수는 더욱 악화했고 올 한 해 성장률이 1%대에 진입했다는 탄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세계는 자본에 의해 여전히 출렁거리고 있다. 그러나 추운 겨울 거리의 사람들은 지치지 않는다. 그들의 분노는 유쾌함과 결합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마주한다. 그들은 여성이자 남성이며, 그 어떤 성도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이며, 노동자가 아니고 선주민이자 이주민이며, 장애인이자 비장애인이다. 그 누구도 아니다. 정체성을 갖지 않은 그들은 풍요 그 자체이며 대항-희망이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상황이 정리되면 나의 일상이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진 것은 아닐지 걱정하며 살아갈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머리 위에는 존 홀러웨이의 소녀가 본 것과 같은 괴물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2011년 오큐파이 시위(Occupy Wall Street!) 행진과 2016년, 2024년, 2025년 대통령 탄핵을 통한 거리의 풍요에 대한 경험을 간직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공동체는 국가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담론화할 것이며, 존 홀러웨이가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희망하는 것과 같이 우리 안의 대항-희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 다른 세계를 꿈꿀 것이며 소녀와 같이 모자라, 모자라, 모자라! 를 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