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25.01.06] 아직 아님의 현재적 힘...“비상계엄을 패퇴시킨 것은 무엇일까” / 전성욱(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문학비평)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29825 존 홀러웨이의 『폭풍 다음에 불』은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의 끔찍한 악력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에만 치중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생성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자극하는 데 더 열의를 쏟고 있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중요한 곳에 밑줄을 그으며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에 더는 밑줄을 긋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거의 모든 곳에 밑줄을 긋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게 깊은 울림이 오롯하게 함축되어 있는 특유의 시적인 산문으로 그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비범한 표현들이었다. 사회학적인 시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문체는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을 전하려는 저자 나름의 정치적 전략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그 참신한 표현들은, 낡고 진부하고 고형화된 체제의 감수성과 논리를 깨뜨리기 위한 창의적인 생성의 투쟁 그 자체이다. 이 책의 방향과 주요한 강조점은 다음의 한 문장에 간명하게 압축되어 있다. “희망은 객체에 대항하는 주체의 운동이다.” 객체의 압도적인 위력에 짓눌려 그 객체의 소멸을 환상적으로 소망하거나, 객체 그 자체를 망각해버리려는 도피의 심리 모두에서 벗어나, 극복과 생성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는 주체의 투지와 의욕이 이 책이 전하려는 ‘희망’의 참된 의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꺾이지 않는 주체의 형상에 대한 풍부한 서술이 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저자는 순수한 주체는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한다. 주체를 영웅화하거나 낭만화하는 시도들의 무수한 실패의 역사를 기억하라고 한다. 주체는 객체의 바깥에 있는 이른바 ‘구성적 주체’가 아니라 “객체 내부에 만성적이고 치명적일 수 있는 질병으로 존재하는 잠재적이고 전복적인 힘”이라고 한다. 희망은 바깥에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신의 내재성을 넘쳐흐르는 부정의 힘을 찾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그렇게 주체와 객체를 상호구성과 상호침투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저자의 시각은, 화폐와 자본의 총체화하는 악력을 ‘지배’가 아닌 ‘적대’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과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진짜 싸움은 가두어서 고형화시키는 객체에 대항하여, 그 가둠의 경계 너머로 넘쳐흐르는 희망의 길을 틔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주제어인 ‘희망’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깊은 영향 속에서 비판적으로 숙성된 개념이다. 그것은 절망에 대한 수동적인 반작용으로서의 환상적인 ‘소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에 반항했던 루쉰의 행동을 이야기할 때, 그 ‘반항’이라는 뜻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희망은 주어지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기대가 아니라 객체의 내부에서 내파(內波)의 능동적 힘으로서 자라나는 적대의 역량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 그 내부에 자멸의 씨앗을 키워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발아시켜 자폭을 이끌어내는 것이 이 책에서 줄곧 이야기되고 있는 희망의 참뜻이다. 저자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서 희망의 힘을 더욱 단단한 것으로 배가시킨다. 계급투쟁과 위기이론, 가치에 대한 논의들, 특히 사회적 필요노동의 감소와 이윤율 하락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를 넘어 ‘자본의 가상화’, 즉 가치의 화폐적 재현과 실제로 생산된 가치 사이의 점증하는 거리와 괴리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자본의 가상화를 통해서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데, 그 가상화와 취약성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저항과 투쟁의 결과로서 우리 스스로가 생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저자는 저항의 희망을 실천하는 그 역사의 주역들을 일컬어서 ‘화폐 위기의 주체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체제는 늘 희망을 절망으로 좌절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 핵심은 분리와 정체성주의를 통해서 약분 불가능한 생명의 활력을 프로크루스테스적인 틀에 끼워 맞추어 고형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화폐, 부, 나쁜 인정의 계열이 정체성의 가두는 힘으로서 주체의 희망을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주체는 결집(공통되기)을 통해서 반정체성주의적인 어떤 것을 생성해내며, 그렇게 넘쳐흐르는 부정의 힘으로 ‘부(wealth)’에 대항하는 ‘풍요(richness)’의 적대를 실현한다. 희망은 공상에 머무르지 않고 확실한 승리로 실현되어야 한다. 좌절당한 희망, 실패한 투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자의식, 희망을 성취해내는 주체의 부정하는 힘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에서, 이 책이 짙게 드러내고 있는 문학적인 혹은 낭만주의적인 감수성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자본이라는 히드라의 머리들을 잘라내고 폭주하는 이 체제의 기관차에 브레이크를 거는 자, 그러니까 적대적인 희망의 주체는 당이나 국가와 같은 고전적이고 정체성주의적인 개념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 주체가 단순히 근대적인 낭만주의를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환기시킨다. 급진적 변화의 주체는 전통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말하는 노동계급이 아니고 생산력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반노동의 반계급으로서 ‘무리(rabble)’라는 형상으로서 암시된다. 무리는 재현할 수 없는 특이성이자 반정체성주의적인 복잡성의 존재이다. 무리라는 그 탈근대적인 주체성의 형상과 관련된 범주로 제시되는 것들이 희망, 분노, 풍요, 존엄이다. 특히 이 중에서도 풍요는 주체의 창조적 잠재력의 절대적 발휘이고, 자기 결정권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자 화폐가 조장하는 부의 신화에 맞서 투쟁하는 사회적인 역량이다. 저자는 이처럼 지배 서사를 넘어 투쟁 서사를 이끄는 혁명의 주인공으로서, 무리라는 그 주체의 형상을 풍부하게 그려나간다. 그리고 바로 그 주체가 만들어나가야 하는 세상이 존엄의 상호 인정에 기초한 자주적 사회라고 한다. 무리는 사회적 분노의 흐름 그 자체로서 폭풍, 즉 자본의 몰락을 가져올 잠재적 주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의 파멸 속에 내재해 있는 두려움으로서,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탈화폐화의 길을 그 분별력의 한계를 넘어서 추구하는 존재이다. 무리는 체제의 내부에 완전히 가두어지지 않는 흘러넘침으로서, 자본의 내부에 치명적 질병으로 자라며 그 주인들을 치명적인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그렇다면 객체에 대항하는 주체의 운동으로서의 희망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먼저 ‘국가’는 그 실현을 매개할 유력한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확고한 입장이다. 국가가 아닌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역사적 유물론을 넘어 열린 역사성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의 과제로서 부여된다. 그리고 저자는 그 새로운 길을 예감하는 새로운 투쟁 혹은 대안적인 투쟁의 사례로서 사빠띠스따, 쿠르드 운동, 아바흐랄리 바스음존돌로(남아프리카 공화국 판잣집 거주자 운동) 등을 들었다. 이 책에는 ‘아직 아님(not yet)’의 현재적 힘에 대한 언급이 곳곳에서 반복되어 있다. ‘아직 아님’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지만, 거기서 그것은 유럽이 비서구를 아직 아닌 미성숙의 존재로 규정하는 일종의 지배 방식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블로흐에게서 영감 받은 희망이라는 것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현재적 힘으로서, 체제의 내부에서 싹을 틔어 올리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미래적 역량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지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에 맞서고 있는 ‘무리’의 비상한 투쟁은, 바로 그 ‘아직 아님’의 현재적 힘이 미래를 향해서 꽃을 피워내고 있는 희망의 광경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조정환은 존 홀러웨이의 3부작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2002), 『크랙 캐피털리즘』(2013), 『폭풍 다음에 불』(2024)의 한국어 번역자이다. 그는 문학을 전공한 정치철학자로서 문학적인 감수성과 사회학적인 논리를 융합해, 새로운 세계의 희망을 구현해내려는 데 혼신의 열정을 다하여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네그리, 그리고 존 홀레웨이와 같은 이들을 바로 그런 역사적, 정치적 희망의 맥락에서 읽고 공부하고 소개하여 왔다. 그는 역자의 말에서 “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 구상”에 존 홀레웨이의 정치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광장의 정치가 요동치고 있는 오늘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나는 이 구절에 눈길이 머물렀다. “윤석열이 최소의 동원을 통해 최대의 효과를 거두려고 한 것은 보안상의 이유였을 것인데, 이 밀행성은 쿠데타 계획에 대한 반대, 거부, 누설이 광범위하게 있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윤석열 정권에 대한 높은 부정적 여론에서 확인되는 것, 즉 자신을 궁지로 내몰고 있던 다중의 광범위한 비판, 반대, 거부의 실재성이다.” 그는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패퇴시킨 것이 무엇보다 “다중 활력의 은밀한 움직임”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론의 수입이 마치 소비재의 수입인 듯 여겨지기까지 하는 부박한 학계의 풍토 속에서, 지금 우리가 조정환이 번역해서 출간한 존 홀레웨이의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지금 조정환이 날마다 광장에서 써 올리고 있는 페이스북의 글들을 보면서 그 의미를 가늠해 본다. 아직 아님의 현재적 힘, 재앙과 파국의 한 가운데서 그 희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희망을 모르고서 이론과 사상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