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24.12.12] 화폐의 늪에서 이전투구만 하는 시대...우리, 희망 없음을 탄식만 할 것인가 / 조정환(정치철학자·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28524 “존 홀러웨이의 『폭풍 다음에 불』, 지하철에서 서문을 읽었는데, 실망과 분노로 가슴속이 요동쳤던 하루, 마지막 문장 읽다 책에 눈물 떨어질 뻔. (인용문) 오늘 나에게 필요한 문장이었던 것 같다.” 페이스북에서 읽은 이 글의 괄호 속에 어떤 인용문이 있었을까? 거기에는 “오늘날 자본의 끔찍한 위기를 자본의 잘못, 부자들의 탐욕의 결과, 체제 내부 모순의 결과라고 말하고 마는 것은 이 절망적인 시대에 우리의 희망의 잠재력인 우리의 투쟁, 저항, 반역의 힘을 놓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한국어판 저자 서문 끝 단락이 담겨 있었다. 이런 공명의 순간은 번역자인 나에게 기쁨을 준다. 글을 쓴 사람은 경희대 후마니타스에서 강의하다가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채효정 정치학자, 『먼지의 말』의 저자이다. 그는, 자본의 위기가 그들만의 무대가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가 주인공인 무대이고 그 무대에서 어떤 극이 전개될 것인가는 우리의 결정과 행동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실마리로 이 책을 자신의 삶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마리는 내가 20년여의 기간에 걸쳐 존 홀러웨이 멕시코 뿌에블라 자율대학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원 교수의 3부작을 계속 번역해온 동기와도 연결된다. 그것은 권력 속에서 권력에 대항하며 권력을 넘어서는 활력의 실재성과 그것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되돌릴 수 없는 현실로 되고 있던 1990년 말에 바로 그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개수배됐다. 강제로 밀실의 책상 앞으로 돌아온 이후 10년은 내게 사회주의 붕괴라는 사태 속에서 어떤 대안이 가능한가를 공부할 시간으로 주어졌다. 이 공부를 통해 나는 현실 사회주의와 맑스-레닌주의에 대항하면서 그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 맑스의 얼굴을 발견했다. 이 발견의 과정에서 나를 이끈 것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열린 맑스주의였다. 네그리로 대표되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관점이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의 계급관점의 역전론을 계승하고 혁신하여 아래로부터 다중의 창조성과 혁명적 주도성을 강조할 때 존 홀러웨이가 대표하는 열린 맑스주의 관점은 프랑크푸르트 비판이론을 받아들이고 혁신해 부정·비판·저항의 현재적 역할을 강조했다. 이 두 흐름은 사회의 활력을 당과 국가의 권력으로 흡수하고 정체화해 온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좌와 대안적 사고를 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두 관점 모두 활력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것의 긍정적 창의력을 강조하는가 부정적 비판력을 강조하는가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두 관점의 교차는 나의 사유를 자극하는 생산적 긴장의 공간으로 작용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 공간에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는 전경(前景)에, 열린 맑스주의가 후경(後景)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에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성을 강조한 저서 『아우또노미아』를 준비하면서 국가권력 장악 없이 절규와 행위력으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존 홀러웨이 3부작의 1부인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를 번역했다. 홀러웨이의 이 책은 1994년 사빠띠스따 봉기의 사례를 참조하며 국가권력 장악을 통해 사회를 변혁한다는 현실 사회주의 전통의 혁명관념을 명확하게 거부했다. 2010년대 초에 나는, 노동의 인지화로 인해 자본, 계급, 시간, 공간, 정치가 어떻게 재구성되는가를 분석한 저서 『인지자본주의』를 준비하면서 홀러웨이 3부작의 2부이면서 추상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의 균열력을 강조한 『크랙 캐피털리즘』을 번역했다. 『인지자본주의』는 상품화에서 공통화로의 대전환을 강조함에 비해, 『크랙 캐피털리즘』은 노동의 추상화에 기초한 자본의 사회적 종합에 대항하는 균열혁명을 강조했다. 하지만 『공통체』(네그리와 하트)와 『크랙 캐피털리즘』를 놓고 하트와 홀러웨이가 가졌던 교차독해와 서한논쟁(나는 이 논쟁을 『크랙 캐피털리즘』의 한국어판의 부록으로 번역해서 실었다)에서 공통화인가 균열인가 사이의 긴장은 생산적으로 용해돼 간다. 그 결과 2020년대 초에 나는 비판과 부정으로서의 활력 개념을 간직하면서도 그것을 풍요와 희망의 힘으로도 그려내는 홀러웨이 3부작의 마지막 책 『폭풍 다음에 불』을 네그리와 하트의 추천사와 더불어 번역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3부작 번역은,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거나 국가자본주의로 살아남은 오늘날 대안은 ‘아래로부터-특이한-다중들의-자기공통화하는-절대민주주의적-섭정’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나의 생각에 풍부한, 그리고 때로는 결정적인 자원을 제공해 줬다. 그 자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의 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라!’가 다중의 절대민주주의의 근본명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리-다중이 지향력·행위력·창의력의 방식으로 국가권력과는 다른 유형의 활력으로 자기조직화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둘째는 섭정이 의식적인 섭정 이전에도 여러가지 형태로 편재한다는 것이다. 홀러웨이는 저항이나 불복종과는 다른 비복종의 편재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절대민주주의적 섭정은 이 전(前)의식적 섭정력을 연결하고 구체화한다. 셋째 풍요의 섭정은 대항섭정으로서 응고·마비·정체화 경향에 대한 대항을 통해 더 풍부하게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풍요의 활력은 자신이 놓인 자리를 명확히 하고 자신이 뻗어나갈 방향과 형태를 결정할 수 있다. 『폭풍 다음에 불』의 원제는 한국어판의 부제로 사용된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이다. ‘희망 없음’은 오늘날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정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보편정서로 됐다. 자본주의적 삶은 나날이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위태로우며 멸종사건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것에서 벗어날 길이 상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절망스러움 때문에 우리는 혐오 외에 달리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을 찾지 못하고 화폐의 늪에서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이를 이용해 파시스트들과 농단주의자들이 우리를 경쟁과 전쟁으로 유도함으로써 숱한 생명종들의 고통과 죽음을 화폐가치화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지구적 현실이다. 존 홀러웨이는 이 위태롭고 참혹한 시간이 자본의 재구조화인가 풍요의 혁명적 실현인가를 둘러싼 결전의 시간임을 암시하면서, 에른스트 블로흐가 1930년대의 파시즘에 대항해 희망의 원리를 찾아 나섰듯이 ‘우리도 희망 없음을 탄식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희망을, 자신감을 배우러 나서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