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4.09.30] 은혜가 충만한 평평한 세계로 떠나는 순례 / 김현우(번역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94 교회를 다니며 교리문답을 배우던 때다. 개신교 교회였기에 종교 개혁은 교육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였고,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 등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선생님은 종교개혁가들이 내세운 5대 강령도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여기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린 대목은 ‘오직 은혜’였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른 은혜라는데, 어딘가 막연한 의구심이 들었다. 다시 말해, 은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선물이라는 이야기였다. 어린 마음에 알 듯 모를 듯한 불편함을 뒤로 한 채 그저 잠자코 들었던 기억이 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인간 중심 사고의 대전환을 시도하는 논의들이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를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지닌 객체로 바라보는 객체지향 존재론도 그중 하나다. 이 평평한 존재론에서는 어떤 객체도 다른 객체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으며, 다른 객체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자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모든 객체라는 범위에 ‘신’이 포함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신도 나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객체일까 신이 나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객체라니, 신자인 나에게는 왠지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상상이다. 천지를 창조하고 기적을 일으키며 역사에 개입하기도 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변적 은혜』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은혜 개념을 새롭게 재구성한 신학 서적이다. 저자인 애덤 S. 밀러는 서문에서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자신의 물음을 공유한다. ‘정말로 통솔할 자가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면 어떨까? 신조차 아니라면 어떨까? 모든 것을 잃게 될까? 진리는 역사에서 벗어나게 될까? 실재는 무너질까? 종교는 헛된 것이 될까? 은혜와 구원은 무의미해질까?’ 유신론적 존재론에서 이야기하는 은혜를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이식’하겠다는 대담한 기획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여정에서 책은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신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만큼, 라투르의 철학에 나타나는 여러 주요 개념을 길잡이로 삼고 있다. 그중에서도 라투르가 제시한 비환원의 원리는 저자가 은혜 개념을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이식하는 주요한 토대가 된다. 저자는 이 원리를 ‘저항’과 ‘이용 가능성’이라는 특징으로 요약한다. 여기서 ‘저항’은 어떤 객체도 다른 객체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음을, ‘이용 가능성’은 어떤 객체도 다른 객체로 ‘부분적으로’ 환원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객체는 ‘저항적 이용 가능성’이라는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신도 이 원리에서 예외일 수 없다. 신 또한 다른 모든 객체와 다를 바 없이 저항적 이용 가능성을 지닌다.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신학’에 대하여 저자는 객체들을 ‘트럼프 카드로 지어진 집’에 비유한다. 객체는 앞서 말한 저항적 이용 가능성을 통해서 다른 무수한 객체와 관계를 맺고 행위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 객체가 지닌 형태와 힘은 다른 객체와 끊임없이 협상하고 타협하는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자는 오직 무수히 많은 다른 객체의 이용 가능성을 활용해야 비로소 행위성을 지닌다. 저자는 여기서 각 개체가 지닌 이 행위성의 힘이 바로 다른 객체에서 빌린 은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객체의 저항적 이용 가능성이 바로 저자가 주제로 삼는 객체지향 신학의 은혜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기독교의 은혜가 지닌 주요 특징을 기독교적 이해에 따라 간추렸다. 이후 라투르의 사상으로 독자를 차근차근 인도한 저자는 지난 여정에서 탐구한 내용을 토대로 그러한 은혜의 특징을 객체지향 존재론에 알맞게 풀어내어 제시한다. 예를 들어, 신의 구체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은혜의 내재성은 객체의 이용 가능성으로 나타나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절대성은 저항적 이용 가능성의 ‘이중-구속’이 모든 객체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수동적으로 받는다는 은혜의 특징은 다른 객체들을 구성하는 동시에 자신도 다른 객체들로 구성된다는 객체의 예외 없는 상호의존성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객체지향 신학에서의 신은 은혜를 일방적으로 베푸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신도 저항적 이용 가능성에 따라 다른 객체와 관계를 맺으며 구성되고 유지되는 ‘수난 가능성’을 가진다. 이처럼 유신론의 은혜 개념은 라투르의 사유를 따라 객체지향 틀에서 거듭난다. 이를 바탕으로 책 후반부에서는 과학과 종교, 믿음, 성상, 신, 진화, 도덕, 영, 기도 등의 여러 신학 주제를 넘나들며 살펴본다. 신학자가 쓰는 신학 서적이기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종교 용어와 객체지향 존재론이 교차하는 대목들은 사뭇 낯설면서도 기이한 지평을 펼쳐낸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어긋나 끊어질 듯싶은 만남이지만, 저자는 그 사유의 끈을 매끄럽게 이어간다. 가령, 객체지향 신학에서 ‘고난’은 불가피한 수난 가능성, 다시 말해, 이용 가능성의 관점으로 읽히는 은혜의 다른 말이다. 또한, ‘죄’는 저항적 이용 가능성을 거부하는 행위다. 다른 객체와 맺는 관계에서 철저히 벗어나 자유로워지겠다는 욕망은 죄로 규정된다. 여기서 ‘종교’는 은혜의 저항적 이용 가능성에서 단절되고자 하는 우리를 실망하게 하고 그 욕망을 멈추는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성경 말씀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저자는 종교와 과학을 비교하면서, 과학이 초월적 객체를 드러낸다면 종교는 내재적 객체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저자의 객체지향 신학은 우리를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객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협력하는 지금 여기 일상으로 초대한다. 저자는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스스로에 의한 것이자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에 의한 것이자 다른 것들을 위해 있다”라는 라투르의 문장을 인용한다. 또한, “객체들 없이는 우리도 구원받을 수 없고, 우리 없이는 객체들도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똑같이 해가 떠오르고 비가 내린다. 예수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고백한다. 『사변적 은혜』는 이처럼 은혜가 충만한 평평한 세계로, 브뤼노 라투르와 함께 떠난 순례를 기록하고 있다. 글·김현우지역 기반 문화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출판 편집, 지역 콘텐츠 제작, 국공립미술관 전시 자료 번역 등의 일을 해왔다. 여러 언어 사이를 오가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다루는 세계에 오래 남고 싶어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