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24.08.09] 추상과 물질의 이분법을 넘다...사물 아닌 과정으로서 객체 / 권두현 동아대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22805 미국의 문화사가 하비 퍼거슨(1890∼1971)은 “근대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움직이는 경향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성의 영구한 표상”이라고 역설했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근대성의 프로젝트가 근본적으로 운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며 “존재론적으로 근대성은 움직임을 향한 존재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성이 운동성과 분리불가능하며, 사실상 근대성이 곧 운동성임을 시사한다. 근대성의 운동성 또는 근대성으로서의 운동성은 주체의 자격으로서 상상됐고, 진실로 간주된 이 상상은 딱히 의심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객체는 정지된 상태의 사물로 비활성화됐다. 근대의 힘은 객체의 ‘마법적’ 활력의 상상에 대한 ‘과학적’ 배척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 힘은 철저히 움직이는 주체에게 집중됐다. 『객체란 무엇인가』의 저자 토마스 네일 미국 덴버대 교수(철학과)는 운동하는 주체와 비활성화된 객체의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며, 근대를 넘어 ‘선사’를 포함하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에서 객체가 언제나 운동적 과정을 통해 존재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객체란 무엇인지 묻는 이 책의 부제는 ‘운동적 과정 객체론’인데, 여기에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담겨 있다. “우리는 객체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13쪽)라고 서두를 열면서 네일이 도입하고자 하는 사고의 혁신은 운동하는 객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네일이 파악한 객체의 ‘존재’는 객체의 ‘형성’,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진행 중인 움직임들로 뒷받침되는 준안정한 과정”(71쪽)이라고 요약된다. “우리는 객체를 정적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 때때로 유용하다고 느끼지만, 그런 경우에 우리는 객체를 창출하고 유지하며 변화시키는 것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42쪽) 이와 같은 경향을 의식한 토마스 네일의 ‘운동적 과정 객체론’은 그의 전작 『존재와 운동』(2019)에서 확립한 ‘움직임의 철학’을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현대 물리학의 성과와도 뚜렷한 접점을 지니는 것이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같은 현대 물리학의 혁신은 객체가, 더 나아가 객체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운동적 과정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에 있다. 네일은 이 발견을 철학의 프레임을 통해 장구한 시간으로 옮겨 내면서 ‘객체들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확장한다. 네일의 표현에 따르면, 그 역사는 ‘서수적 객체’·‘기수적 객체’·‘강도적 객체’·‘잠재적 객체’의 물질적·기술적·사회적 조건들과 함께 전개됐다.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객체들은 이런 네 가지 역사적 유형의 혼합물 또는 혼종이다.”(106쪽) 토마스 네일은 이러한 ‘양’으로서의 객체들의 창출과 정렬이 곧 ‘과학’이라고 규정한다. 과학의 역사에서 객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식 생산에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이해된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이로 인해 자연을 독립적인 관찰자가 바라보는 수동적인 객체로 취급하는 인간 중심적인 이론이 과학의 역사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했을 때, 비로소 네일의 접근 방식이 가지는 새로움이 드러난다. 그는 객체 자체가 과학 지식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객체의 창출과 정렬에 역사적으로 접근한다. 그런 점에서 『객체란 무엇인가』는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객체의 행위자성을 조명한 최초의 과학 역사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에 따른 디지털 객체의 출현 과학과 기술의 혁신 덕분에 이제 인류는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을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객체로 변환할 수 있게 됐다.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는 토마스 네일이 가장 관심을 두는 객체는 인류가 발명한 최고도의 추상으로 간주되는 0 또는 1과 같은 숫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숫자는 과학의 핵심이며, 일반적으로 비역사적인 것으로 취급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과 따위의 양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또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부리거나 펴면서 숫자를 세는 데서 드러나듯이, 추상은 물질적 과정에 내재된 조건별 문제 해결의 일부로 이뤄지는 것이다. 요컨대, 비물질적인 추상조차도 부분적으로는 물질적이다. 여기서 네일의 새로운 접근 방식이 가진 중요한 점 한 가지가 드러난다. 객체에 대한 인류의 대응은 추상성과 물질성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토마스 네일이 제안하는 ‘객체의 이론’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지식 체계의 재생산에 있다. 네일은 객체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시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과학과 철학 사이의 위계질서를 구축하지 않고 “역사, 철학, 그리고 과학을 가로질러 서로 관련지음으로써 각각의 분과학문이 대개 독자적으로 제시하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을 추구”(17쪽) 하고자 한다. 이는 객체들의 조율 패턴에 해당하는 ‘지식의 장’을 ‘준안정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가 들려주는 과학과 예술의 비교 또한 흥미롭다. “좋든 나쁘든 간에 과학은 객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하고 배열하기 위해 사물들의 양적 차원에 집중하는 인간의 실천이다. 예술은 사물들의 질적 차원에 강렬히 집중함으로써 유사한 작업을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104쪽)” 이렇게 양과 질이 물질성으로 뒤얽히면서 과학과 예술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객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객체의 사물적 ‘본성’을 떠나, 객체의 어떠한 측면이 어떻게 창출되고 정렬되는지, 그 방법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이러한 ‘장’의 직조와 조율이 객체라는 행위자의 일임은 물론이다. 객체의 운동 패턴에 대한 토마스 네일의 역사적 접근은 그 역사가 전개된 지리적 접근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객체의 출현에 대한 네일의 역사적 설명은 선사 시대에 대한 사변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유럽 중심의 중세를 거쳐 현대 유럽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지리적 위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바로 ‘지중해’이다. 지중해는 말 그대로, ‘지구의 중심’, 즉 세계의 중심이다. 만약 아시아나 아메리카 대륙의 물질적·기술적·사회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질과 양의 출현에 대한 설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예컨대 고대 마야인들이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유럽적 수학이 아닌 다른 근거를 통해 수학을 형성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객체의 조율에 해당하는 수학은 실상 다양한 역사를 통해 상이한 운동 패턴을 그려 왔다. 단적으로 말해, 지중해가 아닌 카리브해는 완전히 다른 과정으로서의 객체가 출현하는 ‘장’일 수 있다. 토마스 네일은 이러한 한계를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현행 연구는 선사 시대부터 근동을 거쳐 근대 서유럽의 과학 실천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하나의 지리-역사적 계보에 한정돼 있다. 이것은 결코 서양이 유일한 과학을 갖추고 있다거나 최선의 과학을 갖추고 있다고 시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 과학의 핵심에 자리하는 운동의 수위성을 밝혀내는 것은 과학을 고정된 본질과 자연법칙에 관한 점진적 연구로 간주하는 어떤 지배적인 개념들을 무효화시키는 나의 방식이다.”(422쪽) 그러나 실제로 자료(즉 객체)를 자세히 살펴볼 때, 네일은 자신이 도입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이를 배반하면서 일반화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토마스 네일의 한계는 곧 그의 이론이 가진 가능성과 과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준안정한’ 객체로서의 이론은 새로운 정보에 적응할 수 있고, 새로운 조우를 통해 발전하기 마련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객체란 무엇인가』의 개념적 인프라가 ‘운동적’이기 때문에 이 저작이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적인 조우를 주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철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 고고학을 비롯한 역사적 배경을 갖춘 독자들에게 이 저작은 지적 실천 이상의 물질적 실천에 대한 이해를, 더 나아가 물질적 실천들이 직조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