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4.06.22] 객체들의 역사, 새로운 역사로서의 객체들 / 전성욱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62109561363958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소비하려고 하는 그런 쾌락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태도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른바 근대적인 생활의 양식은 알고 보니 재앙과 공멸을 향한 자각 없는 질주였다. 개발과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자연을 자원화하고 또 상품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했다. 해방과 풍요라는 달콤한 거짓말로 과도한 소비의 죄의식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근대적인 것은 온갖 신화와 환상의 뒷받침 속에서 비윤리적인 낭비를 자극하는 체계였고, 잔혹한 약탈들을 통해서 탐욕적인 누군가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체계였던 것이다. 근대문명에서 비롯된 위기의 목소리들은 숱한 대안의 담론들을 불러왔다. 위기에 대한 자각은 그 타개책을 촉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라는 역사적 시대의 선도자였고 그 문명의 개척자였던 서구에서 먼저 그 대안의 사상과 철학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위기의 진앙지인 서구에서 근대와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졌고, 사상과 문화의 그런 잡다한 흐름을 포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호한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그것의 모호성은 역사적 근대에 대한 발본적인 해체와 극복을 외치는 목소리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정과 보완을 통해 그 근대를 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중핵은 근대문명을 세계적인 체제로 정착시킨 서구가 그 역사적 근대의 주체로서 부각시킨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고 여겨지는 '개인'이라는 이념이었다. 요컨대 근대의 인간은 개인이었고 그 개체적인 독립의 근거는 세계를 탈주술화하는 역능 즉 ‘이성’이었다. 그로써 유기적인 전체의 일부로 여겨졌던 인간은 그 연결의 망을 빠져나오는 것을 자유라고 여겼고, 그 전체에 대한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을 권리라고 여겼다. 그렇게 독존의 자리에 오른 근대의 인간은 바로 그 유기적인 전체를 산산조각으로 파열시켰고 섬세하게 연결된 생명의 망을 교란하였다. 따라서 근대문명의 어떤 한계와 더불어 위기에 이르렀다고 했을 때 가장 우선적인 타격의 대상은 바로 그 인간이라는 관념이었다. 순식간에 오랜 전통의 휴머니즘은 알량한 것이 되어버렸고, '주체의 죽음'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반인간의주의의 구호들이 복창되었다. 근대의 인간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이 어려운 질문이 인간 너머의 또 다른 존재들, 즉 비인간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마치 그 옛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호한 이름처럼 '포스트휴먼'이라는 이름이 학지(學知)의 장 안팎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인간중심주의가 벌여놓은 이 행성적 위기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서는,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바로 그 문제의 원흉인 근대의 인간에 대한 공고한 관념을 탈구축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그 탈구축의 거대한 기획을 위해 기존의 학문적 패러다임 자체를 비판적으로 갱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루한 분과학문의 체계, 특히 인문학과 자연학을 대립적으로 보는 관성적인 시각으로는 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인류세의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온갖 근대적 이분법의 원조인 주관과 객관의 이항대립을 융합적 혹은 상호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게 부각하였으며, 그 둘의 관계에 중점을 두게 됨으로써 그 각각을 본질적인 실체로서 상정하는 사유의 관성이 타파되었다. 인문사회학과 과학기술학이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인간 역시 다른 비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행위자’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나아가 이제는 위계적인 혐의가 짙은 주체나 주관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물질을 객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인간중심주의적 시점의 고착에서 벗어나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물질로서 이해하되 전통의 학지인 유물론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물질 즉 객체를 정적인 대상으로 여겼던 유물론과는 달리 신유물론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관계성을 맺고 이어져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행위자로서 이해되었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포괄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담론이었다. 토머스 네일(김효진 옮김)의 <객체란 무엇인가>(갈무리, 2024)는 신유물론에서 다루어왔던 객체의 문제를 통시적으로 개괄하는 가운데서 저자 나름의 독창적인 관점을 도출하고 있는 저작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포괄적인 서술을 통해 객체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충실한 객체학 교과서 내지 개론서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모두 3편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2편인 '객체들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객체에 대한 갖가지 논의들을 '과정 이론'이라는 저자 나름의 관점에 입각하여 자세히 논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객체에 대한 지식의 역사를 통시적인 맥락 속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 부분에서 저자인 토머스 네일이 자기만의 객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객체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얼마나 방대하게 또 세밀하게 독해하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런 구분이 구태의연할 수도 있겠지만 토머스 네일은 과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이다. 이 책은 객체에 대한 논의이면서 동시에 객체를 논의하는 지식과 그 역사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다. 요컨대 저자는 이 책에서 철학자와 과학자와 역사가의 역할을 서로 융합하고 있다. 객체에 대한 과학적 논의는 그것에 대한 지식과 앎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와 더불어서 전개된다. 그러나 그 논의는 단순히 통섭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철학적 관념이 과학을 이념으로 굴절시키는 왜곡에 대한 경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저자는 철학적 이념과 같은 가상적 경계들이 과학의 지식을 고형화된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일이관지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의 키워드는 '운동'이다. 그러나 정태적인 것에 대해 운동적인 것을 선호하는 일관된 관점 역시 철학적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위와 이동이라는 과정의 양상에 대한 철학적 소신이 객체의 능동적 운동에 대한 신유물론적 논의들과 적절하게 결합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연은 유동하고 객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그 역동성과 비결정성의 개방성에 대한 강조는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런 '과정철학'의 관점을 그저 소개하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관점에 입각해 객체의 창발을 위한 일반 조건을 이해하는 것, 즉 객체와 순환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것을 저자는 '객체 창조의 실천으로서의 과학'이라는 말로 집약하였다. 객체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단지 선험적이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관계적이라는 것에 대한 앎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진정한 운동은 그 지식을 통해 객체의 운동성을 관계들 속에서 역사적인 과정으로 실현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가 한국어판의 서문에서 "과학은 인간이 번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이 소멸하는 데 이바지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운동은 말 그대로 동적이고 개방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이 책의 독특한 논지는 그 운동이 드러내는 나름의 패턴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운동이라는 비결정성의 예외를 패턴이라는 일관된 규범의 양상과 더불어서 논의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의미를 "과학의 역사에서 운동 패턴으로서의 객체의 행위성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라고 분명하게 꼬집어서 밝혀 놓았다. 그리고 그 요지는 이렇게 정리된다. "객체는 단지 거시적 층위에서 근사적으로 동일할 따름이고, 한편으로 미시적 층위에서는 점점 더 차이가 나게 된다." 역사는 목적론적 서사에 따라 펼쳐지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혼성적이고 비결정적이고 관계적인 성격을 갖는 객체들이 흐름과 주름의 운동 속에서 어떤 준안정적인 패턴을 펼쳐 보이는 장으로 드러난다. 달리 말하자면 객체의 역사는 무질서한 예외의 흐름(미시적 차이화) 가운데서도 준안정적인 패턴이라는 나름의 규범화된 질서(거시적 동일화)를 창발하는 복합적인 과정인 것이다. 객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비결정적인 운동의 과정을 통해서 가치를 창출해내는 유동과 변이의 양상이라고 보면서도, 그렇다고 그것이 규정될 수 없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안정된 질서를 표현하는 '준 안정한 복합체'라고 하는 토마스 네일의 객관론은, 무책임한 상대주의와 고답적인 규범주의를 넘어 창발적인 실천의 세계관을 제시하려는 의욕적인 시도이다. 문명에 대한 비판이 그 반대급부로서의 자연에 대한 당연한 회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만큼 안이한 도식주의도 없을 것이다. 세밀하고 정치한 이론적 탐구를 건너뛰고 거시적인 반대급부의 제안들만으로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열어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은 안이한 비판과 나태한 급진을 넘어 정치한 이론의 탐색이라는 성실함을 통해 실천 가능한 대안의 밑그림을 그려 보인다. 이 행성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패턴으로 객체의 능동성을 창발하게 만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