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4.06.01] 법 바깥 해적의 생애를 그래픽노블로 / 이수영 (미술 작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53011023677429 어린 시절 나는 후크선장을 사랑했다. 악당을 물리치고 소녀 웬디를 지켜주는 소년의 로망을 완성해 준 것은 사실 빌런 후크선장이었다. 제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톰이 애처롭고, 스머프에게 당하기만 하는 가가멜에게 더 마음이 가듯, 피터 팬이 날쌔고 용감할수록 더 선장 후크를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왜 후크라고 불렸는지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다. 한쪽 손이 잘려 나가 갈고리(hook)를 차고 다닌 후크선장 몸의 내력에 왜 무관심했을까. 왜 보이지 않았을까. 이 비가시화는 어떤 작동의 결과였을까. 눈 하나를 잃어 애꾸가 되고, 다리 하나를 잃어 목발을 짚고, 손 하나를 잃어 갈고리를 낀 불구가 왜 해적 이미지의 클리셰가 되었는지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을 읽고 생각하게 되었다. 1660~1730년 황금시대 대서양의 해적은 최하층 출신의 노동자이거나 노예 출신이었다. 무거운 화물을 나르고, 쇠사슬과 로프를 끌어 올리고, 썩은 음식을 먹고, 선장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대포가 날아오는 해전을 치르며 불구가 되었다. 그러다 선상 반란을 일으키고 해적이 된다. 해적의 불구는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며, 해적의 기괴한 신체는 이미 공격성을 탑재한 잠재적 범죄자의 낙인이다. 갈고리 손은 제국주의 무역선의 폭력의 결과이지만 오히려 서구 무역선을 공격하는 범죄자의 상징으로 반전된다. 기괴한 페이스페인팅에 깃털을 머리에 꽂고 도끼를 휘두르며 선한 백인들을 공격하는 대중문화의 인디언 표상이 실은 아메리칸 원주민을 말살한 백인들에 의해 역전된 것처럼 말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를 '공격성의 환등상(phantasmagoria)'이라는 개념어로 정리한다(주디스 버틀러, 김정아 옮김, <비폭력의 힘>, 문학동네, 2021. 159쪽). 흑인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환등상 아래 백인 경찰은 공격성의 역전 논리를 통해서 흑인을 향한 공격성을 정당화하고 살인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환등상은 비주류 인종에게 모종의 본질적 속성 –폭력성, 야만-을 부여하고 그들의 생명 가치를 부인한다(같은 책, 153쪽). 은어(隱語), 무기로서의 언어 어느 집단의 은어를 보면 그 집단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죽음의 왕, 대서양의 해적들>에 등장하는 해적들의 대화를 이해하는 데 은어는 결정적이다. 그래서 이 책의 앞부분에는 해적들의 은어와 그 뜻을 해석한 정리표가 나온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해적들의 치고 빠지는 짧은 대화 속 은어들을 이해하기 어려워 그때그때 다시 주를 달아놓았다. 원래 영어로 된 은어를 한국어로 옮기고 다시 한국어로 풀이하면 은어 자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그 집단의 고유한 역사성, 집단문화, 은밀함, 그 단어가 아니면 절대 전달되지 못할 말의 맛, 씹어 뱉으며 통쾌함을 느끼는 말의 수행성, 우리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친밀감, 저들은 못 알아듣는다는 저항의식 등은 살짝 김이 빠진다. 언어적·문화적·시대적 간격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고려해 편집자는 은어풀이표 한국어 번역 단어 옆에 영어를 써 놓은 것 같다. '총알을 씹다'라는 은어의 뜻은 '신음을 참다'이다. 은어는 일상의 일들에 붙는 말임을 생각하면 이 은어가 수행되는 그곳의 삶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포병의 딸과 입 맞추기'라는 은어의 뜻은 '선박의 대포에 묶인 채로 채찍질 당하기'다. 끔찍한 은어이다. (젠더 감수성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폭력 속에서 유머로 저항하려 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제일 유명한 은어는 '졸리 로저'라는 은어일 것이다. 검은 바탕에 흰 해골과 곱표로 겹친 뼈다귀 두 개가 그려진 해적 깃발을 뜻한다. 해적 선원이 한 명씩 죽을 때마다 해적 선장이 자신의 노트에 그려 넣었다는 이 표시는 이중의 의미로 죽음을 뜻한다. "나포할 배의 선장을 겁에 질리게 하여 항복하게 만들기 위해서였고 또한 결국 사냥당할지 모른다는 해적들 자신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해적 선원들은 이 죽음의 깃발 아래 짧지만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고 이 죽음의 깃발 아래 교수형을 당했다. 희망과 폭력의 해골 그림 기호가 독극물 표시로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온다. 심해범선-변신하는 기계 범선은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의 자본주의 시장을 오가며 실크, 벨벳, 새틴, 은화, 그리고 '노예 상품'을 실어 날랐다. 범선의 노동자들은 이 나무로 만든 세계 안에서 자고, 일하고, 먹고, 얻어맞고, 착취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범선 왕립 아프리카 소속 아프리칸프리스호를 선상 반란으로 접수한 노동자들은 배 이름을 나이트램블러(night rambler)라고 새로 고쳐 불렀다. '어둠 속을 걷는 자들.' 검은 깃발에 어울리는 이 이름은 대서양 상선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범선을 탈취한 노동자들은 스스로 선장과 장교를 직접 뽑고, 재화를 똑같이 분배하고, 일할 수 없는 동료를 보살폈다. 범선에서 해적으로 변신한 노동자들은 해적 사냥꾼을 붙잡아 스스로의 법에 따라 재판했다. 범선은 자본주의 기계였지만 해적에 의해 반란과 전복의 기계가 되어 다른 삶과 대안 공동체를 실험했던 특수한 기계가 되었다. 법-폭력의 '바깥' 해적이 된 노동자 중에는 사략선에서 일했던 자들도 있었다. 사략선이란 일종의 국립 해적선이다. 국가로부터 특허를 받아 자신의 비용으로 선박을 무장해 적국의 상선을 약탈하고 수익의 일정량을 국가에 상납하는 배다(위키피디아). 국가는 비용을 절감하면서 경쟁국의 무역을 방해할 수 있고 사략선은 약탈해도 처형당하지 않아서 좋다. 해적선과 사략선의 경계는 무엇일까. 국가는 폭력의 권한을 독점한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폭력에 의해 법을 만든 후에 행해지는 것이며 계속 공권력을 반복함으로써 법은 지켜진다고 분석했다. 사략선이라는 국가 해적선은 법과 폭력의 관계를 보여준다. 해적들이 수행한 '다른 삶'은 국가의 법 폭력에 대한 폭력일지도 모른다. 종속과 위계관계를 목표로 하지 않고 그 폭력 자체를 무효화한 어떤 삶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 목격자의 눈으로 이 책은 그림책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처음에 보스턴에서 해적 존 브라운이 졸리 로저 검은 깃발 아래 교수형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밧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그의 몸이 여러 컷으로 연결되어 그려진다. 고통에 몸부림친다기보다 발을 굴리며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이 강렬한 첫 장면은 해적들이 가장 좋아했던 말, "짧은 인생 신나게 살자", "살 수 있을 때 살자"를 응축해 놓은 죽음과 자유라는 주제 그림 같았다. 폭력 장면과 해적들이 춤추는 장면은 마치 무성영화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슬로우 동작으로 겹치고 반복된다. 이 그래픽 노블의 기법은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하며 "독자들에게 페이지에 머무를 시간을 준다."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해적들의 생애의 목격자가 된다. 이야기의 처음에 등장하는 해적 존 브라운의 교수형 장면은 이 책의 마지막에 해적 루벤 데커의 교수형 장면으로 반복된다. 해적 존 브라운이 목에 밧줄을 건 채 "선원들에게 임금을 제때 지급하시오, 구더기 없는 음식을 공급하시오, 잔학하지 않게 대우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해적이 될 것이오!"라고 외치는 마지막 웅변을 목격한 선원 루벤 데커는 해적이 되어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의 정당한 임금과 제대로 된 음식을 가로채며, 우리를 상스러운 짐승 취급하며 채찍질했던 상인과 선장에게 고하는 바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해적으로 만들었다!"고 웅변한 뒤 교수형 당한다. 우리는 어느덧 나이트램블러호의 목격자가 되어, 대서양 어느 범선의 하갑판에서 '거꾸로 뒤집힌 세상'을 내가 보았다고 말하고 있는 선원들 옆에서, 나도 보았다고 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