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24.04.19] ‘초월’로 그려내는 철학사의 지도 / 이재환(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s://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8401 미국의 종교철학자 메롤드 웨스트폴 전 예일대 교수가 쓴 『초월과 자기-초월』은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위-디오니시오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헤겔, 키에르케고어, 바르트, 하이데거를 거쳐 레비나스까지 ‘초월(transcendence)’과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이라는 열쇠말을 씨줄과 날줄 삼아 철학사를 엮어 나가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보여준다. 이 서평의 목적은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을 이 방대한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하나의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또는 미국헤겔협회 회장을 역임한 저명한 헤겔 학자이기도 한 저자가 말한 것처럼 - “이 책 전반에 걸친 나의 주장은 놀랍도록 헤겔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다.”(488쪽) - 이 서평의 목적은 헤겔이 정신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처럼 ‘초월’과 ‘자기-초월’이라는 개념이 그려내는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우선 ‘초월’과 ‘자기-초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저의 부제인 ‘on God and the Soul(신과 영혼에 대해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초월’은 신(신앙), ‘자기-초월’은 영혼, 즉 인간 또는 인간의 ‘주체성’과 관련을 맺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 두 개념을 실마리로 삼는가? 저자는 “신의 초월과 인간의 자기-초월이 본질적으로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저자에 따르면, “신의 초월은 언제나 인간의 자기-초월을 신의 초월에 대한 적절한 응답으로 요구하는 부름”(9쪽)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자신에게만 골몰하는 주체성 혹은 ‘자기-중심적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주체성의 철학’을 넘어서기 위해서는(‘자기-초월’) 신앙(‘초월’)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신은 나의 지식이나 의지를 넘어서 있는 약속과 명령을 통해 나 자신 너머의 삶으로 나를 부르는 나 자신 너머의 목소리”(482쪽)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초월은 자기를 변형하는 자기-초월을 요구하는 것이고, 신의 목소리, 즉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명령이야말로 “나를 결정적으로 탈중심화”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위에서 언급한 “나의 주장은 놀랍도록 헤겔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헤겔적인 성격’은 무엇인가? 저자는 ‘추상에서 구체로 이행하는 설명의 순서’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헤겔에게 “적절한 철학적 절차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이행하여 작업하고, 가장 덜 완전하고 자기-충족인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속해 있는 더 큰 맥락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 복잡한 ‘전체’의 일부로 재해석함으로써 맥락화하거나 재맥락화하는 것”(488-489쪽)이다. 이 (재)맥락화가 바로 헤겔의 ‘지양’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초월과 자기-초월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재)맥락화하는가? 이 두 개념의 재맥락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들이 관통하는 또는 지양하는 ‘네 개의 초월’을 살펴봐야 한다. 이 네 개의 초월은 ‘우주론적 초월’, ‘인식론적 초월’, ‘윤리적 초월’, ‘종교적 초월’이다. 그리고 이 네 개의 초월을 가로지르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존재-신학(onto-theology)’이다. 더 정확하게는 존재-신학 비판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으로 시작한다. ‘존재-신학’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은 존재-신학이다.”(『동일성과 차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존재-신학은 곧 형이상학이다. 그럼 왜 ‘형이상학=존재-신학’인가? 저자가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존재-신학의 모든 형태에는 공통된 목적이 있다. 이 각양각색의 신은 그것이 부동의 원동자이건, 자연이건, 정신이건, 시장이건 간에, 형이상학 이론의 핵심으로 작동함으로써 현실 전체를 철학적 반성으로 인식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역할”(52쪽)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대상과 현상 배후의 최종 근거를 인간이 파악할 수 있게 제시하려는 학문인 형이상학은 그 자체로 ‘신학’이다. 그렇다면 존재-신학은 왜 비판되어야 하고 극복되어야만 하는가? 저자는 “존재-신학의 과제는 현실 전체를 인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208쪽)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철학은 인간의 설명에 대한 욕망/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모습으로 철학 속으로 들어올 것을 신에게 요구한다.”(88쪽) 이제 “신은 철학의 용어와 철학의 기회에 봉사하는 방식으로써만 철학의 담론에 들어갈 수 있”(195쪽)게 된다. 이처럼 ‘존재-신학’이라는 욕망으로 인해 철학(인간 지성)이 종교(신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아테네가 예루살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존재-신학은 신 혹은 전적인 타자성의 자리를 인간, ‘자기-중심적 주체’가 대신 차지하게 만든 주범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형태의 존재-신학은 인간주의적 자만심으로 판명된다.”(97쪽)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신학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바로 ‘네 가지 초월’의 여정을 통해서다. 내재성과 초월의 두 가지 경쟁적인 우주론 먼저 ‘우주론적 초월’을 살펴보자. 저자에 따르면 철학에는 ‘두 가지 경쟁적인 우주론’이 있다. “우리는 두 가지 경쟁적인 묘사 또는 우주론을 가지고 있다. 내재성 이론은 무한하고 궁극적인 것이 비인격적이라고 주장한다. 초월의 이론은 무한하고 궁극적인 것이 인격적이라고 주장한다.”(125쪽) ‘내재성의 이론’은, 저자에 따르면, ‘범신론’이고 ‘초월의 이론’은 ‘유신론’이다. 여기서 내재성이 의미하는 것은 ‘비인격적인 것의 궁극성’이다. 반대로 ‘초월의 이론’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우주론적 초월’이다. 저자가 보기에 가장 대표적인 내재성의 철학자, ‘존재-신학’ 철학자는 스피노자와 헤겔이다. 저자는 이들의 철학을 ‘자연의 존재-신학적 범신론’(스피노자), ‘정신의 존재-신학적 범신론’(헤겔)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철학이 ‘내재성 이론’인 이유는 궁극적인 것이 바로 내재적인 자연과 정신이기 때문이고, ‘존재-신학’인 이유는 궁극적인 것의 속성이 인간의 인식 안에서만 드러나고 인간의 이성적 인식 바깥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자연의 범신론과 헤겔의 정신의 범신론은 (일반적인 종교적 용례가 아닌 고유한 철학적 체계 안에 있는) ‘신’이 명석 판명한 관념이고, 또한 실재에 적합한 관념이기를 의도하며, 이 관념과 관련해서 실재 전체는 인간 사유에서 오롯이 인식 가능한 것이 된다는 이중적 주장을 하고 있다. 인간의 개념적 장치 내에 속한 이 인식론적 내재성은 자연이나 역사의 세계 내에 속한 신의 존재론적 내재성 안에 정초된다.”(208쪽)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초월’이 부재하는 철학은 인간이 자신을 벗어날 수 있는 자기-초월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신성은 결국 ‘인간’ 안에서 자기의식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인간의 지식과 구별되는 신적 지식은 없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의 속성인 사유가 유한한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헤겔에게서 “이성과 개념으로서의 인간 의식은 그 자체로 자신을 인식하는 신적 자기의식으로 대체된다.”(183-4쪽) 이러한 ‘내재성의 철학’에는 인간 이성의 충족성, 인간 의지의 자율성의 자리는 있지만 타자성이 머물 곳은 없다. 따라서 초월이 부재하는 사유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충족적인 근대적 주체성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근대적 주체성 벗어날 수 있는 ‘초월’의 도입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바로 ‘초월’의 도입이다. 그리고 이 ‘초월’이 ‘전적인 타자’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우주론적 초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우주론적 초월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주체를 벗어나 ‘자기-초월’의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초월’의 사유는 ‘탈-근대적’ 사유와 만난다. ‘탈-근대적’ 사유 역시 ‘탈-중심화된 주체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끊임없이 데리다를 전유하면서 ‘초월’을 사유하는 이유이다. ‘초월의 사유’와 ‘탈-근대적 사유’의 만남은 ‘인식론적 초월’에서 더 분명하게 다루어진다. 이제 ‘인식론적 초월’의 단계로 넘어가 보자. 이 단계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전-근대적’ 철학자들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아퀴나스다. 왜 ‘인식론적 초월’인가? 우주론적 초월을 통해서 ‘절대적 타자’로서의 신을 인정한 후에는 이 “신은 형언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고, 알려질 수 없으며, 우리의 개념 체계가 신의 실재를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고, 또 그 실재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그것을 반영하기에는 너무 우둔하다는 생각을 (단지 의례상으로만이 아니라 일관적으로) 견지하는 것이 필요”(209쪽)하기 때문이다. 이때 저자가 ‘존재-신학’을 대신해 관심을 두는 것은 ‘부정신학’이다. 부정신학은 “신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와 개념의 적절성을 부정함으로써 신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을 긍정한다.”(220쪽) 저자에 따르면, 이 부정신학은 “존재론을 극복하려는 시도” 또는 “탈형이상학적 신학의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이러한 가능성을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연결시킨다. “‘탈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은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만이 아니라 데리다의 비판과도 관련이 있다.”(221쪽) 왜냐하면 부정신학은 결국 “의미의 차원이나 사실/사건의 차원에서 우리가 존재 전체 또는 최고 존재로서의 신을 소유할 수 없고, 또는 다른 그 어떤 존재도 우리의 인식에 단순하고 완전하게 현전할 수 없다는 주장”(232쪽)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초월’과 ‘자기-초월’이 뫼비우스의 띠같이 같이 가는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 위-디오니시우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전-근대적’ 사유 역시 ‘탈-근대적’ 사유와 필연적으로 만난다. 한편 이러한 부정신학은 끊임없는 부정의 여정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은 끊임없이 자기를 변형시킬 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자기-초월의 길로 이어진다. “부정의 길 위에서 여행하는 자기를 철저하게 탈중심화된 자기로 기술할 수 있다. 자기는 우리가 점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250쪽) 그럼 자기-초월을 통해서 이 ‘탈중심화된 자기’는 어디로 가는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방인들의 세계, 심지어 적들의 세계로 되돌아가도록 파송된다. (...) 부정신학이 여정이라는 점, 그 길의 동기가 사랑이고 그 전체 목적이 인식이 아니라 연합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250쪽)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부정신학이 긍정신학을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신을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신을 가장 적합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동시적-변증법적’ 부정신학, 은폐와 탈은폐의 변증법이라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자기-초월 역시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는 오직 탈중심화를 통해서만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 또는 ‘초월’과 ‘자기-초월’의 관점에서 주체의 중심은 항상-이미 탈중심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윤리적 초월’을 보자. ‘윤리적 초월’의 단계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철학자는 레비나스이다. 왜 ‘윤리적 초월’인가? 저자에 따르면, “자율성의 이상은 결코 인지적 영역으로 제한되지 않았으며, 참된 초월이 믿음의 이질성만이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지 못하면, 이는 정녕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384쪽)라고 말한다. 사실 저자가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을 제일철학으로 삼는 ‘무한의 철학자’ 레비나스를 ‘윤리적 초월’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설명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초월은 무한이 모든 전체성을 초과하고 존재와 다르게 또는 본질 저편에 있다고 한 그의 사유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385쪽) 저자가 레비나스 철학에서 특히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전도된 지향성’이다. 후설의 지향성은 “의식의 척도로 대상의 이질성을 환원하는 것”(406쪽)인데, 레비나스에게 윤리적 관계는 “이해로 환원할 수 없고, 또 이해에 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전도된’ 지향성이라 부르는가? 윤리적 관계에서 “지향적 화살은 나에게서 대상을 향해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부터 나를 향하는 것이다. 나는 도전을 받고, 소환되고, 문제시된다.”(414-5쪽) 결국, 저자에 따르면, 이 ‘전도된 지향성’이 윤리적 초월의 핵심에 있다. 또한 레비나스 철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체성에서 무한으로 옮겨가는 ‘인식론적 초월’이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윤리적 초월’의 전제가 된다는 점이다. ‘초월’과 ‘자기-초월’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저자의 독창적 사유가 가장 가파르게 드러나는 지점은 두 개념의 여정 끝에 ‘종교적 초월’을 놓고 그 대표자로 키에르케고어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윤리적 초월’은 여전히 인간의 역사와 경험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초월’을 사유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비나스에게 초월은 인간 타자, 즉 이웃의 얼굴로서 역사와 경험 속에 들어가 있다.”(473쪽) 즉 저자가 보기에 레비나스 철학에서 ‘인식론적 초월’과 ‘윤리적 초월’의 연결은 분명하지만, ‘우주론적 초월’의 요소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윤리적 초월’에서 ‘종교적 초월’로의 이행이다. 그렇다면 저자에게 종교적 초월로 이행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앞서도 말한 것처럼, “신은 나의 지식이나 의지를 넘어서 있는 약속과 명령을 통해 나 자신 너머의 삶으로 나를 부르는 나 자신 너머의 목소리”(482쪽)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종교적 초월’이야말로 ‘자기-중심적’ 주체를 변형하는 자기-초월을 명령하는 것이고, 이러한 (신의) 명령이야말로 “나를 결정적으로 탈중심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종교적 초월은 ‘이중적 자기-초월’을 요구한다. 첫 번째 초월은 “내가 직접적으로 나 아닌 것, 즉 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변화”이고, 두 번째 초월은 “나 자신의 본질이 우리의 삶의 세계보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되는 재배치 – 신의 나라, 내가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김으로써 나 자신이 되는 게임 플랜에 속하는 것”(493쪽)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저자의 ‘헤겔적 체계’, 즉 ‘초월’과 ‘자기-초월’의 (재)맥락화이다. 이제야 비로소 『초월과 자기-초월』의 독자인 우리는, 여정의 끝에서야 비로소 여정의 시작의 의미를 알게 되는 헤겔의 정신의 여정처럼, 왜 저자가 ‘초월’과 ‘자기-초월’의 개념이 하이데거, 스피노자, 헤겔, 아우구스티누스, 위-디오니소스, 아퀴나스, 그리고 레비나스와 키에르케고어를 복잡하게 경유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왜 ‘우주론적 초월’, ‘인식론적 초월’, ‘윤리적 초월’, ‘종교적 초월’ 이 네 개의 초월을 관통해야만 했는지 알게 된다. “적절한 철학적 절차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이행하여 작업하고, 가장 덜 완전하고 자기-충족인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속해 있는 더 큰 맥락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 복잡한 ‘전체’의 일부로 재해석함으로써 맥락화하거나 재맥락화하는 것”(488-489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