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4.04.20] 서울은 왜 예술가에게 기생하는가? / 안태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41413573198708 제목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말이 거꾸로 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다. 아니, 서울시 정도 되는 거대 지자체가 왜 예술가에게 기생한다는 거지? 돈도 제대로 못 버는 예술가들이 서울시에 기생한다는 표현이 맞는 거 아닌가? 타당한 의문이다. 나 역시 문화정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너무 과감한 정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잠시 들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생산의 주체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누가 가치를 창출하는가를 물어보면 된다. 도시의 문화적 활력을 생산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농담이 유행했던 시절이 있다. 십여 년 전 공공기관에서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을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플랫폼 자본주의'라는 명명과 함께 플랫폼이 갖는 약탈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된 바 있지만, 당시에는 사회적기업뿐만 아니라 각종 소셜벤처나 창업아이템들의 다수가 직접 생산이 아니라 플랫폼 구조를 통해 다른 이들의 생산을 엮어내 서비스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콘텐츠를 만들어내려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이들의 노동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려는 방식은 분명 혁신적이거나 효과적이었으나, 실제 생산이 뒤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플랫폼이 한편에서는 생산된 서비스와 제품이 사회적 순환의 물꼬를 트는데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지만, 생산자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사업이라는 건 명백하다. 책은 예술가들이 생산해내는 공통장을 도시 정부가 전유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긴장과 힘의 역관계를 추적한다. 주로 오아시스 프로젝트와 문래예술공단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시 창작공간과의 관계를 예로 들어 이를 논증하고 있다. 2008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창의문화도시 플랜에 따라 시작된 서울시 창작공간 사업은 도시의 매력이 해당 도시의 경쟁력이 된다는 창의도시 이론에 근거한다. 금천, 문래, 신당 등 시각예술에 기반한 창작공간은 물론, 연희문학창작촌이나 거리예술창작센터 등 다양한 장르의 창작공간이 문을 열었다. 저자는 레지던시나 창작을 위한 기금 등이 '사회적 공장'으로 예술가들을 포섭한다고 분석한다. 이런 정책의 산물은 예술가들의 분출하는 에너지, 통제되지 않는 삶의 기획이 시스템 안으로 포획하는 장치들이 제도적으로 표출되는 양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시스템이 예술가들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노동에 기댄다는 점이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레지던시는 작업공간을 제공할 뿐 예술가의 생계를 책임지지는 않는다. 기금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실행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할 뿐, 실행하는 주체에 대한 지원은 생략된다. 이 책의 가장 눈에 띄는 분석틀 중 하나가 예술가의 이런 무임금 노동을 자본주의 하 여성의 노동에 포개어 설명하는 부분이다. 산업사회 이후 여성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떠맡으며 자본주의의 하부구조를 지탱해 왔다. 그러나 그 노동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이었으며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논리들이 여성의 가사노동을 '사랑'이나 '모성'의 틀에 가두는 방식이었다. 예술가의 노동 역시 '예술의 숭고화'(139쪽)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구에 따라 선한 것을 추구하는 행위'로 미화되고 왜곡된다. 레지던시에 입주하고, 기금사업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여성이 자본주의의 재생산노동을 무임금으로 떠맡았던 것처럼 도시의 창의성 확장이라는 기획을 대가 없이 떠받치고 있다. 자, 다시 처음의 질문을 돌이켜보자.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고 있는가? 서울시인가, 예술가인가? 창의적인 도시 서울의 매력을 위해 레지던시를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기금을 받아 예술활동을 '생산'하는 것은 누구인가. 책은 이렇게 놀라운 인식의 전환을 이뤄낸 후 예술 공통장이 도시 정부와 자본의 포섭전략 앞에서 어떻게 활동을 이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집중한다. 권범철은 오아시스 프로젝트와 문래예술공단의 사례를 마치 역사학자를 방불케하는 서술로 분석하고 있다. 자신이 오아시스와 LAB39,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의 주요 멤버였으니 참여관찰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68혁명에서부터 예술스쾃-오아시스프로젝트-랩39(문래예술공단)으로 이어지는 공통화의 계보와 창조도시-창의문화도시 전략(서울시)-서울시창작공간(문래예술공장)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공장의 계보를 짚어내는 것을 통해 예술이 공통장 안에서 어떤 맥락을 가지고 활용되고 있으며, 예술가와 시스템이 갖는 긴장은 어떤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지 밝혀낸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한국에 스쾃을 소개하고 관련 담론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했다. 문래예술공단 역시 예술가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공통장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저자가 오아시스나 문래예술공단을 핵심 사례로 연구했지만, 이는 하나의 사례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장의 생산과 확대, 이를 포획하려는 시스템의 전략과 재전유를 위한 흐름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도시 정부들이 문화에 집중하게 되면서 거의 모든 지자체가 문화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여기에 동원되는 기제들은 공연장, 미술관, 축제를 포함한 다양한 이벤트들로 모두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이다. 특히, 최근 각광받았던 법정문화도시 사업은 시민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중요한 포인트로 삼았는데,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을 만들기나 도시 재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민의 활동이 한편으로 길들여지고 다른 한 편으로 이와 길항하는 장면이 발생하는지 떠올리자면 업계 종사자(?)로서 다양한 상념이 깃든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이야기하는 명품 문화도시에 꼭 필요한 존재 역시 예술가인데, 이들은 지역 예술시장이 미미한 상황에서 공공 의존도가 커지며 딜레마에 빠져있다. 지자체의 지원으로 연명하는 것과 지자체가 설계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오래된 곤란이기도 하다. 물론, 책은 예술가의 생존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예술이 자본의 치장을 도맡는 장식이 아니라 다른 삶의 기획을 위한 유력한 통로라는 전제를 두고 있다. 다른 세계를 향한 수많은 도전과 모색, 치열한 싸움 한 가운데서 예술가라는 존재를 지목한다. 예술가야말로 틀에 짜인 노동을 거부하는 상징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존재라는 인식은 예술과 예술가의 현재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공통장의 전유라는 측면에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여지도 있어 보인다. 국가가 공통장을 전유하는 과정에서 공동장 생산의 주체들에게 국가의 의무를 떠넘기는 것을 얌체 같은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모두 책임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시스템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작은 정부론이나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우파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지겨운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가 갖는 자발적인 힘을 생각할 때 국가 단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져 버린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논의라고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녹색평론> 발행인이었던 김종철의 경우 복지국가의 비전에 대해 공동체의 상부상조와 자발성을 해치고 국가 의존도를 높이는 불행을 초래하는 정책 방향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사회의 부를 창출하는 것은 국가인가 공동체인가 하는 선이 명확하게 갈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종철의 말은 공통장을 생산하는 공동체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공통장의 바탕을 오염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말로 읽을 여지가 충분하다. 책은 저항과 구성을 대비하며 시민 사회와 자급자족 공동체의 한계를 짚어내는데, 실제로는 이 두 흐름이 분절적이지 않다는 것과 구성을 통한 저항이라는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칫 도시 정부나 자본이 공통장을 억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공통장에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공통장을 필요로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활용하는 전략을 추구한다. 동시에 공통장을 낭만화할 필요도 없다. 공통장은 평화로운 낙원이 아니라 다양한 힘들이 경합하는 영역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예술가와 도시정부가 갖는 긴장과 싸움에서 보는 것처럼 공통장은 '공유와 협력이 조화롭게 일어나는 무대가 아니라, 갈등과 투쟁의 장'(31쪽)임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른 삶을, 예술을 낭만화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한다. 예술가는 우주에서 떨어진 기상천외하고 이상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책은 예술을 매개로 한 공통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안하며 공통장을 전유하는 시스템에 맞선 재전유 전략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반드시 예술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안정이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 불안은 삶의 디폴트값이 되었지만 불안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는 것, 궁핍하고 취약한 삶의 기호가 아니라 자유를 함축한 능동의 리듬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토록 착취당하고 싶지는 않다. 불안정한 것은 아름답다."(187쪽) 다다이스트들의 말이 보여주는 지표가 있다. 이 역시 추상적인 말이 되겠지만, 이 추상이 어떤 움직임으로 발현할 때 갖게 되는 능동적 해방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자기준거에 바탕한 삶이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여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