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4.03.09] 탈-중심화하는 자기와 인격적인 신에 대해 / 강지하(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원)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30715530430419 한 호흡에 보기 힘든 영화들이 있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 <아무르>나 이창동 감독의 <시>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이런 작품을 한 번에 소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지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쉽게 처리하고 지나가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가? 인간은 왜 종종 폭력에 이끌리는가? 또한 폭력은 어떻게 한 사람, 공동체, 사회를 파괴하는가? 정의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면 공동의 노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가? 정의나 도덕을 말하기 위해 삶과 죽음 너머의 존재나 존재 이면의 초월적인 어떤 것을 상정해야 하나? 아니면 그런 시도는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인가? 이처럼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 답하기 어렵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기 꺼려지는 물음은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이 당혹감에 이르는 과정은 (대부분의 경우) 거북하고 불쾌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때로)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더욱 사려깊게,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웨스트폴의 <초월과 자기-초월>의 서평을 시작한 이유는 이 책이 (적어도 내게는) 한 호흡에 읽기에 상당히 어려운 책이었고,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이 답하기 어려운 당혹스러운 질문에 맞닥뜨리게 했기 때문이다. 웨스트폴이 제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의 초월과 인간의 자기-초월 사이의 관계다. 초월과 자기-초월? 무엇이 문제인가? 웨스트폴은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신의 초월과 인간의 자기-초월이 본질적으로 한 데 묶여 있다." 신의 초월은 인간의 "자기-초월의 근거·동기·원리"가 되며, 자기-초월의 실현은 윤리적 초월로 나타난다. 둘째, 세속적인 현대 유럽철학이 강조하는 탈중심화된 자기(decentered self)라는 개념은 인간이 자기-초월을 실행하는 데 유용한 가르침을 준다(pp. 7-9). 이를 바꿔말하면, 주체의 중심성을 비판하고 '바깥'이나 '초월', '완전한 타자성'을 강조하는 탈근대 철학(현상학, 해석학,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실존주의, 해체주의, (후기)구조주의 등)은 어떤 종류의 '바깥'이나 '초월'을 허락하지 않는 자연주의나 존재-신학, 내재성의 철학, 범신론 등에 비해서, 우리가 타자를 나로 환원하지 않고 그/그녀를 위한 여지(餘地)를 내 안에 남겨두는 (윤리적) 실천, 즉, 자기-변형의 추구에 더 적합한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흔히 무신론적이고 전통적인 가치에 도전한다고 알려진 세속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유가 사실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빠진 종교에 그러한 태도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웨스트폴은 아우구스티누스, 스피노자, 헤겔, 키에르케고어, 하이데거, 레비나스와 같은 서양 철학의 거장들을 등장시킨다. 철학이 탄생한 고대 그리스, 중세 지중해,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의 독일,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파리 등을 여행하며, 철학자들이 어떻게 때로는 초월이나 신비, 영성의 공간을 축소시켰고, 어떻게 다시 그 공간을 찾기 위해 애썼는지 들여다본다. 그리고 탁월한 영화 감독들이 그러하듯, 웨스트폴은 여러 철학의 거장이 등장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재배열한다. 근대 정신 안에 들어있는 아주 오래된 형이상학적 틀을 폭로하기도 하고, 전-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라는 제안이 그런 경우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이 책은 전공자나 전문가뿐 아니라 '윤리적 삶의 가능성'이나 '인간성의 상실이나 그것의 회복 가능성', '냉소를 극복하는 방법'과 같은 고민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흥미를 가질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광범위한 논의를 이 서평에서 모두 담을 수는 없으므로, 이 책에서 특징적인 주장 몇가지를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 웨스트폴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가 칸트만큼이나 반-실재론(anti-realism)에 가깝다고 주장한다(pp. 39-40). 웨스트폴이 실재론보다는 반실재론이 신비, 초월, 겸손함을 위한 여지를 제공한다고 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그들을 실재론자로 보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떠올리면, 웨스트폴의 논변은 과감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기도 한다. 이는 그가 논쟁적인 주장을 위해 다른 저자의 생각을 단순화하기보다는 그들의 텍스트를 면밀히 독해하고 그들을 공정하게 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특징은, 그가 헤겔에게서 초월이 세계 내의 역사나 그것을 통해 실현되는 정신을 통해 오히려 제한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하이데거의 존재-신-론 비판에서 (비롯 한계가 있지만) 이에 대한 극복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1장에서 웨스트폴은 책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하이데거의 존재-신-론 비판을 검토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신학에 빠져있다. 존재-신학은 신을 '가장 완전한 존재'로, 그것보다 더 완전한 존재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신을 '존재하는 것들'의 최초 원인(causa prima) 혹은 자기 원인(causa sui)으로 보는 우주론적(cosmological) 신론에 상응한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존재자들'로부터 존재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와 중요성을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로 환원되지 않고 '초월'로 남아 있는 것들을 제거하는 계산적인이고 표상적인 사유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형이상학이 상정하는 신은 사랑이나 감정이나 연민이 없는, 은총도 구제도 기대하기 힘든 신, 즉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비인격적인 신이라는 비판이다. 존재-신-론 비판 다음에는 스피노자, 헤겔의 내재론/범신론이 이어지고 이어서 탈중심화, 신비, 초월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전근대와 탈근대의 이론가들이 다뤄지는데, 이러한 배열은 그가 헤겔에 정통한 학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세 번째는 '윤리적 실천'이 자기-초월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로 다뤄진다는 점이다.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하는 것'까지 나아가라는 제안은 진부한 가르침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시되는 맥락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3부 '윤리적 초월과 종교적 초월'에서 웨스트폴은 레비나스가 윤리적 초월을 강조하기 위해 인식론을 폐기하기보다는 윤리적 초월을 '위해' 인식론적 초월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p. 387). 레비나스가 윤리학을 제일철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웨스트폴은 레비나스의 노력이 앎을 부차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가지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 오히려 동일자로 타자를 환원하지 않기 위한 앎에 이르는 것에 대한 강조로 해석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는 것'과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신적 초월에 영감을 받아 자기-초월에 이르는 탈-중심적 움직임은 수행하기 위해 주체는 무엇을 '안다는 것'에서 자동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된다' 혹은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윤리적 결단, 자기 '초월'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앎이 필요한데, 이때의 앎은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주어지기 보다는 나에게 말하는 이에게 귀 기울이기,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웃을 위해 한발 물러서기, 내가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나와 같은 이웃이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깨달음 등, 탈-중심화의 과정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요구에 처해있다는 깨달음은 (그 누군가가 타자든 신이든) 탈-중심적 움직임을 수행하는 데, 즉 윤리적 필요나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그리스도교에 반감을 가진 독자나 포스트모더니즘에 편견을 가진 종교인 모두에게 자신이 확실하다고 여긴 것들에 '건강한' 의심과 겸손을 품어보라고, 또 대화불가능하다고 배제해버린 이들과 대화의 가능성을 찾아보라고 제안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은 저자의 기획이 학술적인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왔다고 확신하게끔 한다. 이기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에 빠진 이들에 도전하고, 냉소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며, 그들이 속한 공동체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의 영성과 그것의 사회적 윤리적 영향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논증하기 위해 전근대와 탈근대 사상을, 유신론의 다양한 전통과 세속적 철학을 횡단하는 긴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