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2023.12.27] 다윈이 던진 가장 급진적 화두, 가장 정밀한 설명은? / 신현진(예술학 박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9525 다윈이 던진 가장 급진적 화두를 가장 정밀하게 설명하는 책 나의 인생관을 바꾼 마뚜라나의 논문 「인지 생물학」이 『자기생성과 인지』라는 제목의 책의 일부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은 ‘인간과 동물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진화론의 철학적 화두를 과학으로 설명해낸 중요한 책이라 리뷰를 쓰는 어깨가 더욱 무겁다. 오늘날 다윈의 진화론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그저 추상적 ‘관념으로’ 기억할 뿐이지 살아가면서 직접 체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인간이 동물과 다르지 않음을 내가 굳이 따져볼 기회는 동물보호단체가 문제를 제기할 때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연구는 인간과 동물이 같음을 매 순간 체감할 만큼 설득력을 가진 책이다. 그들이 남다른 설득력을 가진 이유는 동물이 지각하고 행동하기까지 즉, 동물의 인지가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연구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생명이 붙어 있다면 누구나 매 순간 체감할 인지로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우리 자신과 밀접한 사안이라고 받아들이며, 그것에 자신을 대입하고 평가도 하게 된다. 더구나 과학이라는 서술방식은 인간과 동물이 같다는 다윈의 주장을 당황스러울 만큼 정밀하게 설명하는 도구가 됐다. 여기서 ‘정밀’이라 함은 시공간을 초월하리라 믿었던 관념을 시간과 공간으로 쪼개어 설명한다는 뜻이다. 근대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관통할 관념을 만드는 데 주력해 왔다. 하지만 관념이란 누군가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일 뿐이고 다른 경험을 갖고 있어서 다른 결론을 가진 이들이 그 관념에 찬성하는 일이란 없기 때문에 합의된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 한편,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연구에서 관념은 인지작동의 일부 요소로 들어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인지는 환경으로부터 지각정보가 뇌로 들어오면 그 지각정보를 ‘과거’ 경험에 비추어 범주화한다. 이어서 그 범주가 의미가 있는지 여부를(code) 타진하고 그 결과를 ‘지금 당장’ 행동에 옮긴다. 이 행동이 환경과 호환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같은 지각정보를(medium) 자신의 정체성, 혹은 철학과 같은 관념에(program) 대입해 ‘미래에’ 쓸 예상 스토리를 만든다. 그리고 이 스토리가 의미가 있는지 아닌지를(code) 다시 선택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를 자신의 논리를 교정하거나 재배선하는 데에 반영한다. 나의 서술에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지각과 이어지는 행동까지를 살아있음이라 인정한다면, 인지는 살아있음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관념은 필요에 따라 예측-시뮬레이션에 들여오는 부품일 뿐이며 과거와 미래가 머릿속에서 뭉뚱그려지는 인지야말로 살아있음이 현재에 실현되는 경로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느끼는 순간마다 동물이나 인간이 동일함을 체감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인지와 관념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실재를 철학보다 정밀하게 설명하는 데 성공한다. 구조가 아니라 조직화라는 퀀텀 점프 인간이나 동물이나 '인지를 매개로' 살아있음을 실현함에도 불구하고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핵심용어는 인지가 아니라 ‘자기생성(auto-poiesis)’이다. 개인적으로는 자기생성보다 ‘살아있음의 실현이 인지과정’이라는 주장이 사고의 전환을 촉발하는 요체라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생성이라는 용어가 중요해지는 지점은 이론적 정합성이 완성되는 단계에서이다. 앞서 예를 들었듯이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인지를 과거-현재-미래가 뭉뚱그려져 다음 행동이라는 현상을 발생하는 일종의 알고리즘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도약이 필요한데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인지의 각 단계의 절차가 지속되기 때문에 진행형 동사로서의 살아있음이라는 기능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구조와 구별되는 인지의 조직화라는 용어를 사용해 기능의 실현이 자동 반복, 진화하는 현상적 특징을 주목하라고 한다. 살아있음이란 관념이 아니라 작동이다. 그래서 사회학에서는 자기생성을 자기재생산이라 부른다. 한 번의 인지활동의 내용은 매 순간 다르겠지만 인지를 반복하다 보면 각자의 살아있음에는 패턴이 발견된다. 패턴이 구별된다는 것은 역으로 각자의 인지활동에 반복 재생산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타자에게 읽혀진다는 것이다. 과학이 자기복제, 재생산하는 대상을 하나의 개체로 인정하듯이 어떤 독특함이 유지된다면 그 인간과 그 동물의 살아있음은 자기생성된다고 부른다. 그것이 종의 차원에서 유사함을 가지겠지만 동시에 개체의 내면세계, 정체성의 형성을 설명해준다. 각자의 고유한 자기생성이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수영장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만 확보되는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모습의 경계영역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결과적으로 자기생성은 인지운동이 신체가 허우적거리는 방식으로 지속하는 동안만 수영장 물과 구별되는 패턴은 구성주의 인식론을 출발하게 한다. 구성주의 인식론으로의 퀀텀 점프 없이 손발을 허우적거리는 자기생성을 멈춘다면 나와 물 사이의 경계는 뚜렷해지겠지만 수영장 바닥에서 죽은 것과 구분되지 않는, 자기생성이라는 절차에서는 한 순간에 불과한, 그래서 고정된 정체성만 강조하는 근대적 주체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번역어의 선택: 단위체, 혹은 unity, einheit, 동일성, 통일성… 에서 AI까지 나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독자에게 인간의 인지가 영혼과는 무관하다는 주장만으로도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자기생성을 비롯해 이론에서 용어란 무척 중요한 사안이다. 마뚜라나도 자기생성이라는 용어를 만들기 전에 ‘순환조직’과 ‘자기준거체계’를 사용했는데 말이란 것이 역사와 정황적 맥락에 물들기 때문에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순환조직’에서는 살아있음을 실현하는 시간을 감지하기 어렵고 medium, program, code가 하나의 유닛으로 조직되어야 완료되는 작동의 역동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번역어의 선택 또한 사회 전반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에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한 예로, 이 책을 번역한 정현주 선생은 unity를 단위체라 번역했다. 이 선택은 여러 선행연구자들의 저항을 받으리라 예상된다. 단위체는 일본학자들의 번역을 따른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unity는 사회적체계이론을 창시한 니클라스 루만이 헤겔과 구별해 사용했던 독일어 einheit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루만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단어는 동일성 혹은 통일성으로 번역해야 할지 아직도 논쟁이 분분한 사안이다. 각 연구자들은 특정 번역어가 선택될 때, 그 단어가 자신의 이해를 반영하지 않는 구석이 있다면 불편할 수 있다. 단위체의 경우, 필자는 자기생성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큰 선택이라 생각한다.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2차 사이버네틱스의 주동 인물이었고 루만의 사회적체계이론 또한 사이버네틱스의 체계이론과 자기생성을 수렴한 이론이다. 그러나 사회적 체계이론에서는 사이버네틱스적인 특징이 강조되지 않는다. 그래서 unity를 단위체로 번역하는 일은 자기생성에서 medium, program, code가 맞물려 조직화된다는 사이버네틱스로부터의 영향, 일종의 알고리즘적 측면을 다시 들여다보고 우리의 앎을 확장하도록 하는 선택이 될 수 있다. 또한,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작동에서 개별 신체가 고유하게 개입하는(Embodiment) 측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 점은 사이버네틱스를 창시한 노버트 위너의 연구가 인공지능의 설계로 이끈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인지를 통해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처리하고 선택하는 제어 체계를 가진다는 전제는 이들의 이론이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넘어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도 허물가능성을 제시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모든 이에게 보급된 지금,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성과 인지』는 우리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는 준거자 정립에 영감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