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2023.08.28]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에세이영화의 의미 / 박서연(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jabo.co.kr/39361 이방인들의 방문을 기다리며 풍경 속에 배치된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는 순간 피사체와 배경은 하나의 평면 그림이 된다. 평면의 그림을 연달아 이어 붙이면 피사체는 다시 납작한 평면을 뚫고 에너지를 뿜어내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 순간 영화는 시작된다. 이처럼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넘어 보이지 않는 힘까지 담아낸다. 영화의 힘은 항상 자기의 목적을 초과한다. 책 <이방인들의 영화> 저자인 이도훈은 “독립영화의 이름은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고 실천을 통해서 달성(13)”된다고 말한다. 지식과 경험의 바깥에서 이름 없이 존재하는 영화들과 우리(나)의 관계는 아직 형성되지도, 실천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저자는 이를 이방인의 관계라고 부른다(7). 그런 탓인지 시기별로 독립영화는 소형, 학생, 민중, 작은, 다양성, 예술, 인디 영화 등과 같은 많은 이름을 부여받아 왔다. 저자는 이 수많은 이름이 불안한 독립영화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13). 책은 이렇게 복잡하고 다채로운 독립영화를 역사, 도시교향곡, 에세이, 현장, 액티비즘 등의 키워드로 분석한다. (저자는 극영화들을 제외한 다큐멘터리영화들에 집중한다.) 책의 구성 책은 총 7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1장 혼돈의 사회와 도시의 리듬>은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인들이 도시의 삶을 그려내는 방식이었던 ‘도시교향곡’이라는 프레임으로 1970~1980년대 한국의 독립영화들을 분석한다. 도시교향곡 영화는 이동, 반복, 리듬을 통해 도시를 성찰한다(69). <2장 영화의 도시에 대한 권리>는 1장의 논의를 이어받아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며 도시 사용자들의 도시권 선언을 포착하는 독립영화들을 살펴본다. <3장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역사와 벌이는 한판 내기>는 역사 가장자리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다루는 기록투쟁으로서의 독립영화와 역사적 공백으로 사라진 얼굴을 다루는 기억투쟁인 독립영화(157)를 분석한다. 이렇게 현장을 담아내는 영화들은 이제 현장성의 개념을 파열시키면서 현장을 전유하고, 창출하기도 한다(<4장 현장을 전유하는 다큐멘터리>). 이제 현장은 파운드 푸티지나 애니메이션 등의 장치를 통해 물리적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까지 확대된다(220). <5장 불안에 대한 에세이적 성찰>과 부록<사유하는 영화, 에세이영화>는 에세이영화를 “영화를 규정해왔던 모든 억압적 힘을 뚫고 부지불식간에 분출되는 실체 없는 에너지(320)”라고 설명한다. 특히 문정현, 이원우 감독의 영화 <붕괴>를 예로 들며 연출자의 경험, 생각, 고민을 몽타주로 이미지화하여 영화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253)가 바로 에세이영화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6장 포스트 시네마적 상상>, <7장 이 지루함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는 기존 전통적인 영화와 다른 서사, 형식, 관객, 미디어에 대한 감각을 말한다. 특히 박철민 감독의 영화 <프리즈마>가 전통적인 영화 테크닉이 아니라 아마추어리즘의 아이러니를 활용하여 영화의 실패를 즉흥, 능동, 우연으로 전유한 과정을 분석한다. 총 7개의 장에서 저자는 “한국 독립영화가 사회적 현실과 마주하는 방식, 영화라는 매체와 마주하는 방식, 미지의 관객과 마주하는 방식(책 표지)”을 보여준다.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에세이영화의 의미 이제 영화는 OTT, 스마트폰 등을 통해 극장 밖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영화 환경의 변화는 영화의 장르적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는데 실제로 비디오 매체가 등장한 이후 홈무비, 사적 다큐멘터리들이 활성화되었다(270).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고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시대의 영화는 무엇인지 케케묵은 질문을 여전히 반복하게 된다. 저자는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로 뒤집어 보는데(268) 나는 저자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에세이영화를 통해 영화의 자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에세이영화란 단순히 문학적인 에세이형식을 영화로 옮겼다는 뜻이 아니다. 에세이영화는 보이스오버, 몽타주 등 불연속적인 영화 기법들을 주로 사용하여 영화를 전개한다(351). 바로 이런 불협화음의 영화형식들은 연출자 ‘나’의 사유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변형시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로라 라스카롤리에 따르면 에세이영화의 발화자는 자막, 보이스오버를 통해서 영화 속에서 존재함과 동시에 연쇄적인 질문으로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고 대화를 이어간다(354). 또한 에세이영화의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성은 사유의 폭을 넓히고, 과거-현재-미래를 접붙인다(저자가 에세이영화의 예로 드는 영화 <붕괴>는 2006년도와 2200년도를 오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툭툭 끊어지거나 쉽게 해석되지 않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이어 붙이며 자신의 질문으로 재사유한다. 이러한 과정은 카메라의 ‘있는 것을 그대로 담는다’라는 “객관성의 신화(218)”를 의심하는 중요한 시도이며 기존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 형식을 허무는 “형식적 실험(359)”이다. 특히 에세이영화를 “영화를 규정해 왔던 모든 억압적 힘을 뚫고 부지불식간에 분출되는 실체 없는 에너지(320)” 자체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에너지는 피사체를 움직였던 영화적 힘에서 더 나아가 영화의 공간을 확장시켜 관객들을 초대한다. 관객과 발화자인 연출자는 영화의 공간에서 질문을 함께 숙고하고 대화하며 관계를 형성하고 공통의 사유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세이영화는 어디서든 손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에 영화의 자리와 의미는 무엇인지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물론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기존의 영화와 에세이영화의 차별점에 대해 질문하게 되기도 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르포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에세이영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 구별되나, 에세이영화가 경험을 소재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안에 대해 관객과 공적인 대화를 하려는 점에서(358) 나로서는 기존의 다큐멘터리들과 에세이영화 간의 분명한 차이를 찾아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즉 모든 영화가 에세이영화는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에세이영화가 아닌 독립영화가 있는지 질문하게 되기도 한다. 영화가 연출자를 떠나 상영되기 시작하면 영화는 언제나 변형되었고, 모든 영화까지는 아닐지라도 이미 영화는 끊임없이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관객과 관계를 형성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인 나는 이미지의 파편들과 분명하지 않은 텍스트들의 행간 사이에 울퉁불퉁한 에너지가 존재한다는 점에 집중하여 에세이영화를 가늠하고자 하며, 나아가 에세이영화의 힘에 대하여 질문하고 싶다. 이 질문은 지금의 불안, 절박함, 외로움이라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에세이영화의 사유의 공간에 들어설 때 어떤 다른 논의들이 생산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발걸음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듯 독립영화의 제작, 배급 등 관련 시스템의 개선이다. OTT 등을 통해서 영화는 손쉽게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독립영화는 극장에서 상영관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상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영화 중 대다수는 OTT 서비스를 통해서도 보기 어렵고 정보로만 남아있기도 하다. 독립영화가 대중에게 유령 같은(25) 존재로 전락하지 않도록, 독립영화의 경험이 점점 더 빈곤해지지 않도록(25) 제도적 개선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방인과 이방인의 만남 이도훈의 책 <이방인들의 영화>는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을 설명하며 한국의 독립영화는 ”순수한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힘이 경합하면서 만들어 낸 역사적 구성물(11)“이라고 말한다. 고정된 물질로서의 독립영화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독립영화는 지금 어느 자리에 누구와 함께 있을까? 2022년에 개봉한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주요 무대는 1977년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과 지금이다. 영화는 일종의 토크쇼 형식으로 주인공인 이숙희, 심순애, 임미경을 무대에 불러 그들의 1977년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그 사이사이 이숙희가 모아두었던 1977년도의 노동 교실 사진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영화는 관객인 ‘나’를 1977년의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게 한다. 내가 있는 곳은 그때일까 아니면 지금 이곳일까. 내가 어느 곳에 있든 간에 중요한 건 내가 영화의 힘의 경합에 참여했다는 것이며, 내 시간의 폭은 그 순간 1977년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영화인 독립영화와 관객인 ‘나’의 만남은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덜어내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저자가 말하듯 그동안 독립영화는 사회적 소수자들을 조명하거나, “이방인들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13)”지곤 했다. 독립영화는 이방인들과 함께 가기 위하여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이방인들을 비춰왔다. 저자가 책 <이방인들의 영화>를 통해 이름 없는 영화들의 존재론적 복권(10)에 집중했듯이, 독립영화도 그동안 이름 없는 이들의 존재론적 복권을 해내왔다. 그건 저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독립영화를 사랑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독립영화의 실천은 관객인 ‘나’의 실천과 분리될 수 있을까? 독립영화는 그동안 자신의 이름을 완성하기 위해 관객들을 호명해왔고(19) ‘사유의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질문을 해석하고 재사유할 수 있는 관객인 바로 ‘나’이다. 저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독립영화가 이방인이듯이, 그런 영화에게 관객인 ‘나’도 이방인이라고(7) 말한다. 이방인인 ‘나’와 이방인으로서의 독립영화의 만남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까. 알지 못하고 낯선을 것을 처음으로 만지는 그 순간, 이방인들의 만남은 다시 이방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까? 결국 독립영화는 무엇이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독립영화의 확장적인 힘은 우리를 어떤 다른 세계로 이끌 수 있을까? 이도훈의 책 <이방인들의 영화>는 이 여정에 필요한 등불을 조금씩 밝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