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3.07.28]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 에세이영화를 둘러싼 질문들 / 소영현(문학평론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27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도훈의 저서 『이방인들의 영화』는 영화에 관한 연구서다. 좀더 정확하게는 '에세이영화'에 관한 연구서다. 에세이영화에 대한 검토는, 동일한 무게감으로 진행되지는 않지만, 두 층위 즉 한편으로 한국 독립영화의 계보를 다시 쓰는 작업과 다른 한편으로 해외 영화사에서 거론되는 논의들을 통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전자의 작업을 위해 후자의 작업이 긴요하게 활용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많은 용어의 홍수 속에서 에세이영화론이 가닿고자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불분명해진 측면도 없지는 않다. 우선 용어의 덤불을 헤치고 짚어보자면, 1990년대 이후로 통용되기 시작했다는 독립영화라는 명칭은 소형영화, 학생영화, 작은 영화, 민중영화와 같은 용어들과 함께 쓰였으며, 시장과 자본의 논리가 사회뿐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강화된 2000년대 이후로는 실험영화, 저예산영화, 인디영화, 다양성 영화, 예술영화, 독립예술영화와 같은 용어들과 함께 쓰였다고 한다. 독립영화라는 명칭이 이 용어들을 아우른다는 판단일 것인데, 중심추를 관행에 둔 것인지 ~로부터의 ‘독립’ 즉 주류(영화)나 상업(영화) 혹은 자본 등을 염두에 둔 대항적 함의를 갖는 명칭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영화사적 맥락에서 논의가 불필요한 영역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항대립적 구도를 가로지르는 작업들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독립’의 테두리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사적 명칭의 흐름을 헤치면서 저자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 이후의 독립 다큐멘터리 영역에 등장한 새로운 흐름이다. 적어도 『이방인들의 영화』로 한정하자면, 저자의 작업은 사회 참여적 성격을 담지한 사적 다큐멘터리, 그 가운데에서도 미학적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을 부각하는 데 집중한다. 이 작품들의 “존재론적 복권”을 목표로 하며, 한국 독립영화의 진전이라고 할 이 작품들을 대상으로 그 특성을 적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용어로 독립영화나 사적 다큐멘터리의 사이 어디쯤에 놓인 에세이영화를 차용한다. 에세이영화는 사유에 관한, 사유를 위한 영화 에세이영화란 무엇인가. 실질에 있어 대표적 작품으로 꼽는 문정현 감독과 이원우 감독이 공동 연출한 <붕괴>를 분석하는 자리에서, <붕괴>를 두고 “연출자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국내 사적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양한 장르적 양식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불안이라는 비가시적 대상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 다양한 이론적 규정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이지만, 여러 이론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에세이영화가 지향하는 ‘사유’의 면모이다. 에세이영화는 “사유에 관한 영화”이며, “사유를 위한 영화”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기도 하다. ‘주관적인’, ‘사적인’ 등의 용어를 동원하지만, 따지자면, 사유를 위한 사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다큐멘터리, 극영화, 아방가르드의 경계를 횡단하고, 연출자의 주관적 사유를 직접 표현하며, 공적인 이슈나 현안에 개입하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험적인 사적 다큐멘터리의 진전된 형식이, 저자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에세이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의 형상화”의 구현에 다가가는 것이다. 영화 분석에 집중하는 장(5, 6, 7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미지나 내래이션을 통해 그 실현이 가능하다는 점을 환기하자면, 저자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실질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실험성 혹은 작가주의적 면모인 듯도 하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 내부에서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가진 작품이 출현하게 된 계기가, 영화 장르와 곧바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문학계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제작 환경이나 미디어 환경 그리고 정치적 의식이 변하면서 역사나 현실과도 바꿔 쓸 수 있을 ‘현장’이라는 범주와 함의가 달라졌으며, 객관적인 것 혹은 사실이나 진실에 대한 신뢰 자체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현실에 기반해서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다큐멘터리 형식에 변화가 요청된 것으로 보인다. 현실과의 관계에 깊이 천착해온 한국문학의 경우도 다르지 않은데, 소수자와 타자 담론이 힘을 얻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로 현실을 언어화하는 재현(representation) 방식이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폭력적 배제나 누락이라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이슈화되었다. 타자와 소수자를 소설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이 종종 타자와 소수자의 대상화로 이어지면서,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논의를 내내 지속하게 된 것이다. 사실상 현실을 새롭게 읽고 쓰지 않으면 현실도 새롭지 않다는 인식에 근거한 새로움의 강박이 의도와 무관하게 현실의 외면으로 이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 카메라의 눈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 문화예술계가 겪는 재현의 폭력성에 대한 회의와 그에 대한 해법 마련의 시도, 진실과 거짓이 구분될 수 없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진실성에 대한 열망은, 현실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면서도 그 현실을 두고 ‘보는’ 이의 시각이 아니라 ‘사는’ 존재 자체의 목소리 쪽에 집중하게 했다. 타자와 소수자의 직접 발화나 자기 기록 형식이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하게 터져 나오고 시대를 대변하는 쓰기 테크놀로지로서 힘을 얻게 된 것은 이러한 사정과 연관된다. 이런 의미에서 에세이영화의 등장을 두고 한국문학에서 일인칭 화자의 자리가 강조되는 경향을 환기해볼 수도 있겠다. ‘카메라의 눈’이라는 객관성에 대한 의심과 그것이 포착하는 ‘현장’ 혹은 현실의 진실성에 대한 불신이 다큐멘터리 형식을 구성하는 본질을 의문시하고 ‘현장’과 새롭게 만날 방법에 대한 모색을 시도하게 했으며, 아마도 그 시도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에세이영화가 아닐까 추정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추정 이상으로 끌어가기는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것은 내가 영화사, 좁게는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역사에 과문한 탓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거론된 작품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는 데 있다. 저자가 에세이영화의 범주를 규정하기 위해 세심하게 분석한 대상작들은, 각종 영화제에서 공개되었지만 극장 상연이 되지 않은 작품들로, 일반 관객인 나로서는 다양한 경로로 찾아봤으나 정보를 넘어선 영화의 실물을 접할 수 없었다. 이 영화들을 두고 저자가 “이름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것도 일면 이해가 되었는데, 독립 다큐멘터리의 계보에서 이 영화들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가치에 대한 논의가 유통과 배급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차원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중요하게 여겨졌다. '영화·현장·관객'의 삼각 구도에서 에세이영화의 의미는 저자가 다루는 작품들 가운데 극히 일부, <상계동 올림픽>(김동원, 1988), <두 개의 문>(김일란·홍지유, 2011), <비념>(임흥순, 2013), <위로공단>(임흥순, 2014), <시국페미>(강유가람, 2017), <우리는 매일매일>(강유가람, 2019), <김군>(강상우, 2018), <공동정범>(김일란·이혁상, 2018), <메기>(이옥섭, 2018), <벌새>(김보라, 2018)와 같은 작품들, 독립영화 가운데에서도 ‘이름 있는’ 몇몇의 ‘개별’ 영화들을 보았을 뿐이므로, 나로서는 저자가 가닿고자 하는 에세이영화의 진면목을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선지 고백하자면, 에세이영화를 둘러싼 궁금증은 해소되기보다는 증폭된 쪽에 가깝다. 에세이영화는 영화와 어떻게 같거나 다르며, 독립영화나 사적 다큐멘터리와는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실험영화나 논픽션영화와는 어떤 다른 갈래를 마련하는 것일까. 에세이영화를 다루는 자리에서도 수행적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파운드 푸티지 작품들과의 차이점과 공통점이 알 듯 모를 듯 미끄러진다.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의 포착은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해야 하는가. 해외에서 언급하는 에세이영화와 국내 에세이영화는 어떻게 같은 의미망을 마련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흘러 모여 좀더 근본적인 질문들에 가닿았다. 이 명칭들의 기원이나 갈래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사적 흐름에서 다양한 명칭들이 요청된 맥락은 무엇인가. 카메라의 눈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점진적이거나 전면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결정적 (현실의) 맥락은 무엇이라고(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런 논의들은 영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확장하거나 심화시키는 것일까. 저자가 시도하는 “존재론적 복권”이라는 것은 특정 영화에 깊이 침잠하는 방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 영화들이 놓인 지도를 거시적으로 그려주는 자리에서 좀더 선명해지는 것일까. 거시적, 미시적 시야를 통해 가능한 복권이라는 무엇일까. 특정 영화의 가치를 적확하게 읽어내는 일일까. 그런 영화를 요청하는 현실의 변화를 되밟아가는 일일까. 에세이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좀더 쉽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복권이라는 말의 실질에 해당하는 것일까. 영화(사)와 ‘현장’ 그리고 관객이라는 삼각 구도의 어디쯤에 에세이영화의 의미는 놓여 있는 것일까. 저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인터넷 환경의 발전으로 누구나 쉽게 영화를 볼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여 “오늘날의 에세이영화가 유례없는 방식으로 사유를 전개하고 확산할 기회를 얻었”다고 본다. 영화가 드디어 지성의 보고이자 매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에세이영화의 생산과 향유의 조건이 확대된다는 것은 새로운 ‘현장’을 구성하거나 발견하는 일이며 영화 매체가 그 자신의 한계를 넘는 일인 것일까. ‘개별’ 독립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 자체(혹은 이론화)에 관심을 가지고 에세이영화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정교하게 구축해나간다면 저자가 상정하는 그런 관객성이 확보되는 것일까. 에세이영화들을 보고 난 후에야 답할 수 있을 질문들투성이다. 그렇다면 에세이영화론을 구축하기 위한 선결과제란 결국 독립영화의 유통과 배급을 시스템적으로 안정화하는 일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