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지성 In&Out 2023.04.16] 마음 안의 극장 - 〈카메라 소메티카〉를 소개하며 / 박선(한국뉴욕주립대학교·영화학)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2 책 제목으로 쓴 ‘카메라 소메티카’는 몸을 뜻하는 영어 단어 ‘소마’(soma)를 빌려 만든 조어이다. 이미지를 보는 관객이 그 의미 파악을 위해 시각뿐만 아니라 오감 전체를 동원하는 태도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회화, 사진, 영화와 같은 이미지 예술이 보는 자의 신체 반응을 자극하여 의미를 전달한다는 주장은 언뜻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 소메티카’가 암시하는 관객은 이미지의 의도를 받드는 수용자가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고 변형할 수도 있는 능동적 주체이다. 이미지의 생산과 변형은 관람자의 인지 기제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메를로 퐁티는 “인간의 뇌가 파악하는 내용은 언제나 주어진 정보를 능가한다”는 말로 인간이 발휘하는 인지능력의 능동적, 창의적 속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그림을 보는 관객이 주어진 시각 정보 이상을 상상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상상한다는 말인가? 진화심리학은 이미지를 채워 넣는 인간의 인지능력이 생존을 도모하려는 선사 인류의 본능에서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바위 너머로 스치듯 지나친 꼬리 자락만을 보고 맹수의 몸체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감지하고 몸을 피할 수 있다. 지척에서 몸을 사린 사자의 모습을 상상하는 인간. 그는 공포감에 짓눌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숨을 죽여 퇴로를 모색한다. 말 그대로 이미지에 온몸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전형일 것이다. 그 육체적 반응의 목적이란 포식자의 꼬리 자락이 드러낸 위기 사태를 완벽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미지 해독의 성패가 삶과 죽음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놓고 봤을 때 인간은 이미지를 관망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지를 이해 가능한 어떤 것으로 끊임없이 가공한다. 그리하여 이미지를 온전히 소유하려 한다. 이때의 소유욕은 가지려는 탐욕이 아니라 이미지와 완전한 합일에 도달하려는 욕망이다. 회화에서 사진과 영화로, 영화에서 뉴미디어로의 매체 진화는 이미지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 소유욕을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유화의 질감이 풍경과 인체를 포획하려는 부르주아의 욕망에 부응한다면, 사진은 무심한 렌즈를 통해 가시 세계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과학의 야심을 대변한다. 포스트-시네마로 묘사되는 현대의 매체 환경에서 그 향유자는 스스로 이미지를 생산할 뿐 아니라 기성의 이미지들을 편집, 삭제, 조작할 수도 있다. 인간은 뉴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사유화하며 이 경험에서 이미지와 맺어온 관계를 다시 성찰한다. 예부터 자신이 표상된 존재들과 마음 안에서 대화를 나눠온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뉴미디어가 고전 회화를 불러들여 그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는 사례는 우연이 아니다. 회화의 감상자는 초상화 속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거나 풍경화 속 자연을 거닐어 본다. 표상 세계를 완성하려는 인지와 감각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맹수의 꼬리를 본 선사 인류가 그 몸통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CGI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또한 현실의 그럴싸한 복제가 아니다. 가상현실은 주어진 표상세계를 채워 넣으려는 인간의 인지적, 감각적 상상을 시각화한 결과물이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는 발명가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존재했다”고 말하는 한편 “영화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모순된 주장을 펼쳤다. 이해의 실마리는 영화가 아닌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 영화가 그 표상능력을 고도로 발전시킨다 해도 관객의 상상은 언제나 영화적 표상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래야만 이미지를 이해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는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회화와 영화”라는 부제를 달고 회화-영화-관객의 소통방식을 탐색한다. 회화 작품은 감상자의 마음 안에 작은 극장을 만들어낸다. 감상자는 극장 속 무대를 소품과 배경으로 채운다. 그런 다음 회화 속 인물들과 내밀한 대화를 나눈다. 요컨대 회화작품은 감상자가 자신만의 극장을 만드는 데 쓰는 원재료에 불과하다. 원재료를 다듬고 그들 사이의 논리적, 서사적 연결고리를 만드는 작업은 온전히 감상자의 몫이다. 가 주목하는 영화들은 회화 감상자의 마음속 극장을 재현한다. 가령 레흐 마예브스키 감독의 (The Mill and the Cross, 2011)는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헐이 그린 (1564)을 소재로 삼는다. 원작 회화가 이미 오백여 명에 달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처형장으로 이송되는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전시한다. 영화는 브뤼헐 그림의 회화적 배경을 영화 안에서 유지하되 주요 등장인물들은 살아 있는 배우가 연기하게 하여 회화를 일종의 무대극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경우 무대는 회화를 보며 관객이 상상하는 마음속 극장에 상응한다. 영화 (Shirley-Visions of Reality, 2013)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 중 열세 편을 각각이 공개된 시기의 역사적 상황과 결부시키고 시간 순서대로 배열한다. 개별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 표상에 셜리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나열된 그림들에 일관된 서사를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도 셜리를 비롯한 회화 속 인물들을 실재 배우가 연기한다. 셜리는 회화의 시공간에 갇힌 만큼 주로 정신세계를 열어 보이며 당대 미국의 사회적, 정치적 사안들에 논평을 가한다. 는 회화의 감상자가 몰역사적 상상만으로 회화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회화적 표상을 역사적 맥락 안에 배치하여 자신의 세계경험을 확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2013)은 프랑스 쇼베동굴 벽화를 디지털 카메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이 구석기 벽화동굴을 다른 관습적 고고학 다큐멘터리와 다른 점은 벽화동굴 체험자가 느끼는 모종의 기시감을 전달하려 하기 때문이다. 헤어조크는 쇼베동굴의 방문자들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체취를 느끼게 된다고 전한다. 그 느낌은 동굴벽화의 이미지가 관람자의 뇌리 안에서 자극한 초월적 정서일 수 있다. 에서는 그것을 숭고체험이라 명명한다. 이 매개하는 구석기 동굴벽화의 경험은 회화를 맞대면한 감상자의 내면세계가 반드시 이성과 합리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감상자의 내면의 숭고와 초월의 극장일 수 있는 셈이다. 디지털 기술의 재매개를 통해 회화세계를 다시 방문하는 관객은 결국 자신이 가진 인지와 감각 내부의 다층적 풍경들을 재발견한다. 그 발견은 예술이 범속한 인간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개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은 이미 마음의 극장 안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품고 산다. 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이 사실을 재론한다. “대중은 예술을 숭고한 단독자로 숭배하지 않는다. 예술은 삶의 일부일 뿐이며 개체로서의 예술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분명 다른 무언가가 그것을 대체할 것이다. 그것이 액세서리일 수도, 영화일 수도, 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예술품이 사라진 루브르라고 하더라도 대중은 그 공간을 드나들고 주변을 배회하며 자신만의 미술관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p. 265) 박 선 한국뉴욕주립대학교·영화학서울시립대학교 영문학과의 학부와 대학원에서 영미희곡을 전공하고 미국 캔자스 대학에서 영화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비서구 영화의 탈식민주의적 담론을 모색하면서도 영미권의 예술적 성취를 곁눈질하는 사유의 분열을 겪어왔다. 영국 선정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윌키 콜린스의 Woman in White를 『흰옷을 입은 여인』(토네이도, 2008)으로 완역한 한편, 『한국영화와 테크놀로지』(근간)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영화학 방법론으로서 인지주의 영화학을 모색하며 의식의 분열성을 생산성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 중이다. 가족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한국의 여성독립영화를 해석하는 영문 저작을 준비 중이다.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교양학부에서 영상제작과 영화이론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