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시대와 철학 2023.05.01]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영화 이미지의 시대 / 박소연(영화연구자, 수원대/성신여대 강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ephilosophy.kr/han/55136/ 영화가 회화의 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카메라 소메티카』의 분석 대상인 영화가 회화를 참조하는 방식은 조금 특별하다. 이 책은 분명 회화, 화가, 미술관 내/외부, 관람객을 소재로 한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만, 회화 작품이나 미술관을 단지 소재주의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데서 그치거나, 영화와 회화의 상호 매체적 관계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분석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세심하게 선별한 영화는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회화 작품이나 이를 구성하는 회화 담론을 매개함으로써, 회화와 영화가 공존하는 접경지대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이고 정동적인 화학작용을 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화학작용이란 영화 속의 관람객, 그리고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주체의 인지적 경험을 말한다. 말하자면, 『카메라 소메티카』는 미술(관)의 관람성과 영화의 관객성을 중첩시킨 영화를 인지주의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포스트 시네마 관객성이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아님을 강조한다. 뉴미디어 시대의 수용자가 신체와 감각을 통해 체험하고 전유하는 정동은 과거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진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적 잔여물과 일맥상통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관객의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이른바 “복제 이미지의 신체화로서 카메라 소메티카”(17)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저자의 이러한 개념은 동시대 맥락에 적용되거나 재고된, 바쟁, 벤야민, 바르트의 개념이나 논의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카메라 소메티카』의 구성을 살펴보자. 회화를 생동하게 하는 영화의 활인화 1장과 2장에서 다루는 <풍차의 십자가>(2011)와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회화가 생산하는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영화 매체의 활인화 사례로서 등장한다. 브뤼헐의 <갈보리 가는 길>을 활인화 한 영화 <풍차의 십자가>는 회화 속 탈중심화된 인물들을 영화적 몽타주 형식으로 소개함으로써, 폭정의 희생양이 된 플랑드르 사람들의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고, 관객이 일방적인 해석이 아닌 개인적인 해석을 가능케 만든다. 저자는 <풍차의 십자가>가 취한 형식적 시도가 회화 작품의 고정성과 폐쇄성을 해체하는 작업이며 이는 바쟁이 제기했던 “재현의 탈인본성(58)”을 구현하고, 나아가서는 완전 영화를 추구하는 사례임을 주장한다. 또 다른 활인화의 사례인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의 회화 속 여성 인물들에 셜리라는 이름과 일관된 정서를 부여하고, 회화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의 배경에 배치하여 관객을 디제시스 세계로 초대한다. 이 같은 방식은 셜리의 내적 정서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연동시키고, 개인과 역사의 교직 속에서 호퍼 그림을 지배하는 고독감을 궁극적으로 에로스적 생명력으로 재탄생시켜 관객과의 교감을 꾀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재매개를 통해 경험을 추체험하기 3장과 4장에서 다루는 <잊혀진 꿈의 동굴>(2013)과 <유메지>(1991)는 각각 동굴 벽화를 남긴 구석기 인류와 화가 유메지의 경험을 영화의 재매개를 통해 추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저자는 유물로서 쇼베 동굴 벽화를 포착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2013)을 분석하면서 이 영화가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동굴벽화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 재현 방식의 인지적 효과”(124)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가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재매개하는 방식은 동굴을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구석기 인류와 현대 인류의 유사성을 인지하게 하고, 나아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인 숭고까지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때, 관객은 영화가 재매개하는 벽화동굴 방문자의 이중 숭고 체험을 통해 쇼베 동굴 벽화를 수용하게 된다. <유메지>(1991)는 화가 유메지가 자신의 창작활동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모습을 줄곧 담는다는 점에서 화가의 전기를 담는 관습적인 화가영화와 구별된다. 더욱 특기할 점은 스즈키 세이준은 유메지가 겪는 창작 불능의 고통을 “현재와 과거, 현실과 몽상, 회화와 영화의 이종적 이미지를 공존”(167)시킴으로써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간극의 공존 속에서 관객은 분산적으로 유메지의 상태를 지각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이 봉건 이데올로기와 서구 지향적 모방 의식 사이(166)”에서 방향성을 잃고 창작 불능에 빠진 예술가로서 유메지가 드러나게 된다.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 5장과 6장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새로운 관객성을 포착한 영화를 분석한다. <뮤지엄 아워스>는 관광지와 미술사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를 통해 지구화 시대의 근대성을 성찰하는 영화다. 특히 저자는 지구화를 근대성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 소요객의 이중적 정체성을 주인공 요한에게서 발견한다. 영화는 소요객이자 노동계급 도시인으로서의 요한을 통해 19세기 예술가 지식인과 구별되는, 근대성에 대한 시선과 자의식을 발견해낸다. 이는 “아우라가 대상에 귀속된 성질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간 정서”(234)로 보는 탈근대적 관점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6장은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과 영국 내셔널 갤러리를 무대로 삼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 <프랑코포니아>와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과 예술 담론의 다층성”(249)과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281)을 드러내는 방식을 주목한다. <프랑코포니아>가 루브르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창작자, 권력자, 민중의 관계망을 영화적인 중첩 서사로 가시화한다면,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 속 예술작품이 독자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기보다 “현재적이고 관계적인 양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구성”(270)되는 풍경을 관찰하고, 제도로서 미술관이 예술성과 대중성 그 사이 어딘가를 지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저자는 두 영화가 각각 미술관의 안과 밖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동시대의 관람객에 대한 해석은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대의 루브르 박물관은 예술품과 관람객의 거리감이 자아내는 아우라가 아니라 예술품과 관람객 사이 내밀한 접촉과 의식을 만나는 공간임을,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의 규율이 설명하지 못하는 관객의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교감”(275)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가 회화를 활인화하거나 재매개하는 관계 속에서 수용자와 내밀한 관계성을 추구하는 영화 매체의 이미지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시차와 논의의 층위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저자의 시도는 전통적인 영화 양식 내에서 인지주의적 접근을 통해 분산적이고 주관적이며 정동적인 포스트-시네마의 관객성에 대한 사유를 이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는 상대적으로 인지주의적 영화 연구가 미진한 국내의 상황으로 보건대 절대 작지 않은 성취다. 나아가, 영화 매체뿐만이 아니라 동시대 영상 매체를 향유하는 관객성을 사유하고 연구하는 데도 좋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