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1.12.18] 서학 개미와 파이어족에게 <피지털 커먼즈>를 권하며 / 임태훈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21616033931543 독점적 빅테크 기업들이 운영하는 플랫폼은 물질과 비물질계 양편을 포획한 자본주의 인클로저가 되었다. 이 문제를 감시 견제해야 할 국가의 공적 책무는 시대 요구에 한참 미달한 수준이다. 이러한 경향은 팬데믹 이후로 더 악화했다. 올 한해 경제계 최고 이슈였던 '메타버스'가 궁극적으로 무엇이 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관련 주식이 오르고 내리는 것과는 별개로) 어둡고 우울한 전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좁다란 양식장 수조를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있던 양식어들이 알록달록한 새 수조로 옮겨진다고 다가올 운명이 달라질 게 있을까? 자본주의 플랫폼 장치가 거의 모든 유·무형 자원을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플랫폼 바깥의 경제 활동은 위축되고 부의 기회 역시 축소된다. 방역 강화로 거리두기와 집합 제한이 연장되고 있는 근래엔 어느 업종이든 플랫폼에 더욱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 메타버스 아니라 뭐라 부르든, 이건 선택지가 아니라 굴레일 뿐이다. 플랫폼 이용자의 활동은 무수한 데이터 발자국을 남긴다. 기업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마케팅에 활용한다. 플랫폼이 이용자의 눈앞에 전개하는 알고리즘 큐레이션은 모니터 화면을 내면의 거울로 착각하게 할 지경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 더 나아가 내가 좋아해야만 하는 것을 클릭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플랫폼은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의 연동에 분리 불가능한 상태로 뒤섞여 있다. 유튜브, 페이스북, 구글, 네이버, 카카오는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도플갱어가 되었다. 택배와 배달 음식을 오토바이에 싣고 운전할 때의 몸뚱이들은 플랫폼의 최말단 생체 장치로 움직이고, 사용자 후기의 별점과 온갖 바이럴 게시물에 울고 웃으며 하루 컨디션이 좌지우지 당하는 수천만 수억의 몸이 디스플레이 화면 건너편에 있다. 이광석이 주창한 '피지털(phygital)' 개념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맞닿아 있다. 현실의 물리(physical) 세계와 비물질의 디지털(digital) 세계가 상호 연결되고 혼합되어, 인간과 사물, 사회 문화 전반의 지형과 배치를 만들어낸다. 온갖 피지털들을 통제하며 막대한 이익을 독점한 권력을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된다. 우리는 뭘 빼앗긴 줄도 모른 채, 피지털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인지 각성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벗어나야 할 이유가 대체 뭐냐고 묻는 이들의 압도적 숫자 앞에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은 위축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는 지금 이 시대의 이상하고 잘못된 것들을, 이상하고 잘못된 것으로 당연히 분별해내고 대항할 수 있게끔 돕는 단단한 책이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플랫폼 기술 질서를 뛰어넘어 시민 다중이 공유 자원을 능동적으로 생산·운영하고, 공생의 가치를 신장하는 일은 분명히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반대로 <피지털 커먼즈>를 결코 읽고 싶어 하지 않을 이들은 누구일까? 플랫폼 자본주의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얘기할 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니까 돈을 못 벌지."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과 대화를 멈추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피지털 커먼즈>의 문제의식과 쟁점이 학계와 관련 활동가들의 회로 안에서만 맴돌지 않으려면, 부자 되기를 꿈꾸는 '개미'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서학 개미들이 올해 나스닥 빅테크 기업에 투자한 금액은 무려 29조 원에 달한다. 글로벌 플랫폼 기술 질서를 주도하는 구글,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메타(페이스북), 엔비디아 등에 집중적으로 돈이 몰렸다. 팬데믹 이후로 이러한 현상은 한층 뜨거워졌다. 서학 개미들은 쿠팡이 나스닥에 상장되었을 때도 환호작약했다. 미래의 아마존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이 회사는 노동자를 살인적인 물동량 처리에 갈아 넣기로 악명이 높다. 쿠팡의 롤모델인 아마존도 노동자들의 분규가 이어지고 있다. 분기마다 1,000억 달러 매출을 내는 아마존에는 노조가 없다. 이런 회사에 투자한다는 것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문제를 고치는 방향이 아니라 이 체제의 수혜자가 되려는 선택이다. 그런 그들이 <피지털 커먼즈>를 읽는다면, 모든 문장이 자신과는 상극(相剋)이라고 질색할 것이다. 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꼭 필요하다고 여길 책은 뭘까?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보면,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부자 되기와 관련된 책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예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자 되기를 꿈꾸는 이들을 '파이어족'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이들은 회사에 자기 인생을 거는 일을 어리석은 선택으로 여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회사는 없다. 평생직장의 신화는 곰이 쑥 뜯어 먹던 시절의 신화일 뿐이다. 월급충의 비참에서 벗어나 궁극에 이르려는 목표는 '경제적 자유'로 불린다. 원하는 만큼 쉬고 여행하고 (경제적 필요와 상관없이) 마음이 이끄는 것을 배우고 체험하는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경제력이 필수라는 인식이다. 파이어족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인클로저를 때려 부술 혁명가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꿈꾼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피지털 커먼즈>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피지털 커먼즈>에 전제된 시간관과 파이어족의 시간 인식을 비교해봐야 할 것이다. 이광석은 금융 시간 체제의 바깥, 기술 통치의 인클로저 현실에서 벗어난 곳에서 시간의 수혜를 누리는 다양한 공동체와 공유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그 씨앗이 될만한 시도를 지지한다. 파이어족의 시간관은 금융 상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도 거래, 선물, 옵션, 스왑 등을 일컫는 파생 금융 상품(Financial Derivatives)은 마블 유니버스의 평행세계 설정처럼 불확실한 여러 미래의 가능성에 베팅한다. 예를 들어, S&P500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파생 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동시에, 반대 상황에 대비해 손해를 벌충할 수 있도록 상승 확률이 높은 시장에 베팅한다. 각종 금융 수익에 대한 기대와 위험을 쪼개고 나누는 파생 상품은 너무 많아서 복잡계의 우주를 이룬다. 이 세계의 계약 관계에 포획된 시간의 총량은 천문학적인 단위이며, 살아있는 인간 누구도 살아낼 수 없는 시간이다. 2020년 9월, 테슬라의 PER(주가수익비율)는 1000에 달했다. 그 시기 테슬라가 달성했던 매출 실적과 주당 순이익을 1000년 동안 유지해야 말이 되는 주가였다. 비슷한 시기에 아마존은 PER이 90, 페이스북은 100이었다. 이 기업들이 한 세기를 넘어 밀레니엄에 이르도록 장기 지속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파이어족은 하늘 무너질까 걱정하는 신경증 환자의 푸념쯤으로 여긴다. 시간이 곧 자본이고, 금융 시장은 시간을 무한 증식, 가속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은 우주로까지 지구 자본주의를 확장하겠다는 비전을 내세우고 있고, 이 과정에 수반하는 비즈니스의 파생 시간에는 온갖 금융 자본이 촘촘히 얽혀있다. 이 복잡계의 최하 말단에 불안,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고용 환경과 수입에 매달려 시간의 자유를 박탈당한 수 억의 인민이 있다. 파이어족은 그 예외가 되고자 돈을 투쟁 도구로 선택한 이들이다. 파이어족들은 금융 투자를 위한 종잣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한 내핍 생활을 한다. 이들의 눈물겨운 고생담은 유튜브만 검색해봐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극단적인 자기 계발 광신도이기도 하다. '경제적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투자 관련 서적을 독파하고 관련 전문가의 미디어 채널을 추종하며, 돈 냄새 나는 정보에 예민해지고 투자에 과감해질 수 있도록 절차탁마한다. 최근 1~2년 사이에 통화량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주식과 암호 화폐, 부동산 시장 모두에서 엄청난 부가 창출됐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호시절은 짧고 거품은 반드시 꺼지기 마련이다. 경기 변동에 맞춰 제때 올라타고 내려서 이익을 내는 일이란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금융 시장이야말로 가장 악랄하고 영악한 플랫폼 자본주의의 한복판이다. 모두가 어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지 자각해야 할 때다. <피지털 커먼즈>처럼 비판적 성찰을 담은 책은 폐허에서 길을 찾는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다. 함께 분노할 친구들을 부르는 매개자가 될 수도 있다. 혼자만 인클로저 밖으로 탈출하여 자유를 누리는 환상은 덧없다. 그 환상이야말로 지배 권력이 우리에게 남발하는 공수표다. 임태훈(林泰勳, Lim Taehun) ∥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조교수.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문학사의 접점, SF 문화와 사운드스케이프 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기계비평들>,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가 있고, 대표 저서로 <검색되지 않을 자유>, <우애의 미디올로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