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3.03.18] 영화관에서 미술관을 읽는 포스트 시네마의 독법 / 신경식(영화연구자)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031611022603302 <카메라 소메티카: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회화와 영화>라는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영광의 무대를 장식하고 떠난, 회화를 향해 쓴 또 한 권의 커튼콜인가. 초반의 흐름은 영화와 회화의 상호텍스트성에 초점을 맞춘 미디어 관점으로 매몰되는 느낌도 들었다. 실제로 새로운 매체에서 옛 매체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재매개' 개념은 이 책을 관통한다. 그러나 역사의 무대에서 똑같은 반복은 있을 수 없다. 이 책은 기존 영화 비평이 다뤘던 영화와 회화 간의 삼투압적인 관계에 대한 재고찰일 뿐 아니라, 근대적 미술 공간의 전시체계에 의한 현대인들의 정서를 영화의 프레임으로 끌어와 재해석한다는 차원에서 각별하다. 그래서 저자가 그림을 거는 장소는 부르주아의 거실도 아니고 유서 깊은 도시들이 내세울 만한 미술관도 아닌, 극장의 스크린이다. 즉 미술관을 영화 속에 넣는 작업이다. 우리의 육안이 아니라 카메라의 렌즈를 거쳐 회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스크린을 누비는 카메라는 그림 하나를 손쉽게 통째로 쓸어 담을 뿐 아니라 해부하듯이 잘게 찢어 관객 앞에 펼쳐놓는다. 게다가 그림을 대하는 관객의 반응까지 신랄하게 포착한다. 벤야민은 카메라의 광학적 무의식(the optical unconsciousness)을 외과 의사의 숙련된 손으로 비유하며 사진을 객관성을 담지하는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책의 핵심이랄 수 있는 감상자의 인지적 효과는 피구라가 움직일 때 더 강화된다. 이제 시의가 지나 퇴색한 이론적 논쟁이 문득 떠오른다. 7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구조주의를 밑그림으로 한 이른바 대문자 이론(Theory)과 이후 등장한 포스트 이론, 즉 실증적인 역사적 연구와 문화연구를 바탕으로 한 인지주의 비평가들과의 쟁론이다. 영화이론의 판세는 실체가 불분명한 주체 혹은 이데올로기의 환영을 쫓느니, 관객의 뚜렷한 신체 경험을 담보로 한 정서에 방점을 두자는 인지적 관점으로 기울게 된다. 인지주의 비평은 포괄적인 데다, 특히 매체 변화에 따른 관객의 정서적 반향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어, 여전히 영화이론 영역에서 그 위세가 강하다. 이 책이 전개하는 인지주의 방법론이라는 넓게 펼친 거미줄에는 역사·문화·사회·예술에서 파생된 등 수많은 담론들이 포획되어 있다. 다만 한 가지, 이 저술에 써지지 않은 행간을 독자로서 발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믿음의 전이'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와 회화라는 일관된 주제 위에 6개의 변주곡(varation)으로 꾸며져 있다. 변주곡은 16세기 바로크음악의 상징인데, 원곡과는 다르지만 원형과 뗄 수 없는 변형의 리듬이 특징이다. 변주곡의 첫 소절이 바로크 미술의 밑그림을 그린 브뤼헐의 <갈보리 가는 길>로 시작한다는 점은 탁월하다. 바로크는 찌그러진 진주의 의미를 갖고 있다. 원형의 진주는 그 중심점이 하나지만, 일그러진 타원의 진주는 중심이 두 개여야만 올바로 설 수 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는 두 개의 중심, 즉 신과 인간의 화두가 함께 얽힌 최초의 시대였다. 문제의 핵심은 예전처럼 한쪽만을 믿을 수 없는 이중구속(double bind)에 있었다. 인간은 여전히 엄혹한 신의 섭리 하에 살았지만, 종교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자(死者)들에게 신의 구원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가 낳은 양가적 감정의 산물이 바로크 알레고리였다. 알레고리는 당장 해석을 요구한다. 이 브뤼헐의 모호한 대작은 종교화인가, 세속화인가. 종교화라고 하기엔 캔버스의 중심을 차지한 예수는 너무 작고 군중은 많다. 세속화라고 하기엔 성스러운 주제의 그늘이 짙게 잠식하고 있다. 아놀드 하우저는 바로크 회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바로크가 지향하는 바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독립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스쳐 가는, 그러나 관람객이 한순간이나마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지니는 장면··· 바로크 예술은 영화적이다."라고. 바로크 시대의 인간은 이제 예술의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가 된다. 저자는 현대 문명으로 개종한 또 한 명의 가톨릭 신자 바쟁을 등장시키면서 변주를 거듭한다. 바쟁은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서 바로크 예술의 경련을 일으키는 '강직현상(catalepsy)'으로부터 회화를 해방한 도구로 영화를 꼽는다. 경련은 회화가 세상을 닮으려고 애쓸 때 생기는 강박인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기계의 눈으로, 인간의 시선이 제거된 가장 객관적인 영화와 <갈보리 가는 길>은 시험대에 오른다. 저자는 사진이 지닌 객관적 총체성과 브뤼헐의 지배양식인 거미의 부감도법 사이의 유사점을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가 없던 르네상스의 끝자락 혹은 바로크인이었던 브뤼헐의 시점은 과연 인간이 아닌 거미가 본 시점으로 귀속될까. 바쟁이 사진의 객관성을 믿었다면 브뤼헐의 믿음은 종교화 안에 세속화를 그려 넣은 것처럼 여전히 신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사진이나 그림 모두 익명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그 의미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그림과 사진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매체와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바로크 회화에 내속된 시선과 마주할 영광의 계기를 포스트-시네마로 하여금 그 무대를 다시 마련한다. 시대적 감정을 읽어내는 저자의 징후적 독해와 영화를 통한 변주는 2장과 3장의 시대의 지배적 감정, 즉 감정 구조를 읽어내 영화를 해석하는 대목에서 한 번 더 빛을 발한다. 저자는 먼저 호퍼 그림의 감정적 요소 중 가장 두드러진 '소외'를 셜리의 움직이는 신체에 전이시켜 해석한다. 고독과 소외는 셜리의 신체의 리듬을 타고 내면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리고 회화로 돌아왔을 때 그림의 주제는 더욱 선명해진다. 풍경이란 내면의 전도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대목은 호퍼의 회화와 이를 활인화한 <셜리>, 그리고 바르트의 '푼크툼'과의 연결이다. 구조주의 기호학자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에 의한 변주는 기호로 점철된 단단한 스투디움(Studium)에 구멍을 내고 멈춘 '피구라'에게 혈액를 주입한다. 온실 속 바르트의 어머니가 숨을 쉬듯, 각자의 셜리는 신체를 통해 보편적 고독을 상연할 때 관객의 몰입은 더 커진다. 회화와 사진에 깃든 이 믿음이 구조주의 탈마법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단지 과장된 수사일 뿐일까. 당장 어느 한 사람에게 어머니 사진을 찍은 후 두 눈을 도려내라고 시킨다면 어떨까. 이 예시는 W.T 미첼의 책의 한 구절에서 빌려 왔다. 흔히 숭고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알프스의 압도적 경관이다. 시각적인 크기에 대한 이성의 경외감이 곧 수학적 숭고이지만, 숭고의 사유가 싹튼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면 리스본 대지진이다. 칸트는 리스본 지진에 관련된 글을 4편을 발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글이 <신정론에서 모든 철학적 시도의 실패>였다. 요컨대 여전히 신을 정당화하고 선과 악의 대립이 존재했던 시대였던 만큼 지진은 신의 뜻으로 볼 땐 악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의 재해를 자연악으로 규정하며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함을 역설했다. 즉 신성의 믿음에 균열이 나고, 이성이 눈뜨는 시대의 감각이 숭고였던 셈이다. 얼핏 숭고는 대상 쪽에서 오는 듯하지만 결국 이성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데 방점이 있다. (이와 유사한 저자의 아우라의 적확한 묘사는 235쪽을 참조하라.) 그렇다면 <꿈의 동굴>의 숭고함은 어디서 연유할까. 저자의 표현처럼 구석기 동굴벽화를 카메라가 비출 때 관객은 일종의 시각적 특권을 부여받는다. 카메라는 아득한 거리에 있던 아우라를 우리의 코앞으로 당겨와 함께 숨 쉬게 한다. 신석기의 농경이 자연에 울타리를 치던 시대였다면, 구석기인의 수렵은 동물과 더불어 살았던 시대였다. 자연을 인간의 척도로 보기 이전, 꿈의 시간을 인간기술이 스크린으로 재 매개할 때 벽화가 숨 쉬는 역설적인 마법이 완성된다. 호퍼의 그림과 <셜리>의 시대 감정이 대공황 이후 생겨난 '소외 혹은 고독'이라면, 3장의 <꿈의 동굴>의 지배 감정은 칸트의 숭고였다. 숭고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벗어난 행위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라 할 때, 오늘날의 숭고는 자본의 가치를 초월할 때 생기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외와 숭고는 다른 결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강화되면 될수록 한 항으로 묶이는 역설적 감정의 구조이다. 종반의 여정은 각각 근대의 키워드인 군중과 소요객, 모바일 시대의 정주자와 이주자, 그리고 노동자가 미술관으로 입장하면서 마무리된다. 저자는 오늘날의 군중, 특히 미술관에 몰려드는 일개의 무리들과, 정주하는 이의 시선을 통해 이방인을 관찰하는 전 지구화한 도심의 세태를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통해 재정의한다. 먼저 군중은 몰개성적인 덩어리로 형상화되던 과거의 군중이 아니다. 특히 예술작품 앞에 선 일개 단독자로서 아우라의 충격과 내면의 각성을 추구하는 성찰의 주체로 거듭난다. 한편, 전 지구화한 도시의 생태 속에 정주인과 이방인은 뚜렷한 경계를 그리는 듯하다. 메트로폴리탄의 관점에선 주변 도시인의 노마드적인 삶이 계급적으로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과는 달리 글로벌화한 도시 안에서 익명성은 여전히 그들을 군중으로 소환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또한 <뮤지엄 아워스>의 요한처럼 자신의 거주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꼭 정주자라고 할 순 없기 때문이다. 군중은 이제 다중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정보를 향해 움직이는 모바일을 장착한 스마트몹이 되었다. 도시 안에 정주하는 자와 이방인 모두 모바일에 앱을 깔고 이름난 카페와 맛집을 탐방한다. 그 모습은 가이드북을 손에 쥔 여행자와 다를 바 없다. 요즘 들어 유행하는 식문화 중 하나가 '오마카세(おまかせ)'이다. 이는 원래 '주방장이 알아서'라는 의미로, 기실 손님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는 노포 주인장과 토박이 단골 간의 은밀한 유착을 내포한다. 그러나 가격별로 적힌 오마카세 메뉴를 받는 순간 도시에서 정주라는 단어는 무색해진다. 미술관에서 노동자를 발견한 날카로운 성찰이 눈에 띤다. 저자는 '노동계급의 소요객'(225)이라는 소절을 통해 미술관의 직원과 주의 깊은 관람자들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구동되고 있는 전시체계에 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이 성찰은 오늘날 미술관을 채우는 군중의 정체를 정동을 생산하는 노동자로 정의한 히토 슈타이얼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슈타이얼의 말대로 미술관은 공장이 되었다. 1895년 공장을 떠난 사람들이 생산했던 기계음이 화이트큐브 안에서 미술품을 보고 탄식하거나 웅얼거리는 군중의 소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어느새 우리는 자본주의가 펼쳐놓은 상품과 시선을 마주치며 가치를 생산하는 문화적 소비 주체로 재의미화되었다. 모두 관찰이라는 인지적 노동을 통해 주목 경제의 회로 안으로 포섭된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내셔널 갤러리의 직원들 간 벌어졌던 논쟁적인 주제를 언급한다. 미술관의 전면을 마라톤 생중계를 위한 디스플레이로 사용할 것에 대한 엇갈린 의견이었다. 어떤 결정이 공공적인 미술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되살릴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결정도 미술관이 백화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옛 방식으로 생산한 수공예품과 첨단의 기술로 만든 디스플레이를 모두 팔 수 있는 곳이 오늘날 미술관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미술관의 회화를 보는 경험이 우선 색달랐다. 이틀 하고도 반나절 책을 읽고 독서가 매개하는 방식으로 그림과 영화를 찾아보았던 행복한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잡고 미술관을 안내한 저자의 꼼꼼한 해석에 감사를 표한다. 역사적 사실에 의한 구체적 사례를 든 인지주의 영화 비평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일은 축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