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2023.02.03] 인간중심주의를 타파하라…모든 존재는 놀랍다 / 이동신(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9817 인간이 변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사실 인간은 항상 변해왔기에 별다른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나아졌다고 하고, 때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꾸준히 변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최근, 특히 21세기 들어 그 말은 새로운 차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어떤 측면의 변화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 자체의 변화를 논의하는 것이다. 바로 포스트휴머니즘의 논의다. 포스트휴머니즘 논의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촉발됐다. 하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등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하는 몸과 정신이 그처럼 고유하지 않을 수 있다고 알리고, 그에 따라 인간개념도 변해야만 할 때가 왔다. 동식물과 사물의 수량변화가 인간 생존에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 역시 독립적 인간이라는 개념에 변화를 촉구한다. 동식물과 사물의 수량변화는 두 번째 이유로도 이어진다. 기후위기와 인류세 논의는 인간이 그 수량변화에 직접적 원인이라고 확인하고, 여기에는 단순한 인과관계의 인식보다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깊은 반성이 담겨있다. 인간을 위한다는 말로 인간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는 성찰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세 흐름』은 인간이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이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는 세 사상가의 작업을 포스트휴머니즘이란 이름 아래 한 줄기로 모으려는 시도다. 캐서린 헤일스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첨단 과학기술이 인간을 정신만의 존재로 만드는 것에 반발해 몸을 지켜내려는 ‘몸부림’이다. 몸은 인간이 물질세계와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결코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캐리 울프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 개념에 반드시 남아있는 동물의 흔적에 대한 ‘상실감’에서 시작한다. 흔적을 되찾는 일은 그 개념의 고유함과 독자성을 해체하여 인간의 모든 제도에 자리 잡은 인간중심주의적 토대를 흔든다.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철학은 하이데거의 도구론에서 시작하여 모든 사물이, 즉 인간을 포함한 사물 전반이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 모든 사물이 ‘놀라움’의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그의 철학은 포스트휴머니즘의 교훈을 전한다. 각각 과학기술, 동물, 사물의 영역에서 시작한 헤일스, 울프, 하먼의 작업을 “몸부림,” “상실감,” “놀라움”으로 정리하여 한 군데 담는 이유는 개별 작업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것보다 그들의 공조가 더 중요하다는 믿음에서다. 학문적 영역은 다르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을 대하는 감정의 차원에서는 세 사람의 작업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믿음이다. 그만큼 21세기 상황이 위급하고, 따라서 어느 한 영역에서만 인간이 변한다고 뿌리 깊고 폭넓은 인간중심주의가 타파될 리가 없다는 믿는다. 물론 굳이 인간 중심주의를 타파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인간만을 위해서도 할 일이 너무도 많은데 비인간존재에 신경 쓸 여력이 있는지 현실적으로 고민해 보자고 할 수도 있다. 다 일리 있는 반론이라 생각하면서도 포스트휴머니즘의 필요성을 다음의 질문으로 대신 말해본다. 오랫동안 인간을 위해서라고 했음에도 아직 할 일이 많은 이유가 어쩌면 ‘인간만을 위해서’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궁극적 목표라던 인간중심주의가 사실 실패의 원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