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2022.11.22] SF로 철학하기, 그리고 아무도 아니지 않은 자로 있기 / 이윤하(철학을 좋아하는 상담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5570 이상형을 만난 인공심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상담사인 나는 상담 장면에서 내담자를 만나는 초기에 다양한 부분들을 관찰하여 나름의 종합적 진단을 내리고 치료적 가설을 세우곤 한다. 그 다양한 부분들을 대략 분류하여 표현해보자면, 감각과 운동영역, 정서와 관계 영역, 그리고 인지와 학습영역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관련 영역의 발달이 골고루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컵에 물을 적당히 따르고 그를 들어 마신다던가 (감각과 운동의 통합 및 발달 정도)라던가, 엄마의 찌푸린 표정을 보며 알아서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던가 (정서적인 유대 형성 능력 및 관계 속 소통에 관한 부분), 그리고 책을 읽고 수학 문제를 푸는 (인지를 바탕으로 하는 언어와 수리) 등의 학습 능력에서의 고른 발달은 우리 생활의 토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서의 고른 발달을 체크하는 이유는, 사람은 자기 신체로 여러 시공간에서 각기 다른 행위들을 영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에 잠에서 깨고, 배변하고, 세수하고, 밥을 먹고, 가족 혹은 친구와 인사를 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거나 직장에서 일하고, 놀이하거나 여가를 즐기고, 다시 잠이 든다. 나라는 신체에는 이처럼 다양한 행위와 관계들의 경험과 시간이 쌓인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디지털 행위자 agent는 얼굴 인식이나 텍스트 번역, 차 운전, 체스나 퀴즈게임 같은 어떤 전문화된 업무에만 한정되어 있다. 실제로 소프트웨어 행위자는 이러한 일들을 꽤 잘 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그램들의 능력은 한 전문 분야에서 다른 전문 분야로 간단히 이전될 수 없다. … 또한 오늘날의 AI 프로그램은 특수한 분야에서는 성공했더라도 가변적인 상황 맥락과 여러 가지 애매모호함을 다루는 데는 여전히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p.102-103)”라고 『탈인지』에서는 말한다. AI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것에 ‘당연히 그렇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건 프로그램을 만드는 코딩 프로그램에 대한 기초 수업 때의 경험 때문이다. 작년에 나는 빅데이터 분석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고, 그 과정 중에 코딩 프로그램 파이선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코딩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남들이 시키는 대로 코드를 입력하며, 그저 파이선과 시간을 보내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이의 과정은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그렇듯이 마치 뜻도 모르는 코딩의 동요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실행 창에 친 하나의 코드에 실수가 있었는지 파이선은 내게 오류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오류를 해결할 수 없어, 같은 오류 알림창을 수 십번 마주해야 했다. 그때의 나는 분명히 꽤 난처한 표정이었겠지만 파이선이 알아챌리 없었다. 파이선은 자신의 소통 방식을 통해서만 움직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정된 방식이 아니면 파이선과의 소통은 불가능했다. 아니 이것을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의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 속 시드니의 말처럼 “DMS(소프트웨어 체계)의 문제는 코드를 통해 대화하는 것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의 고독 속에서,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향한 맹목성 blindness와 무심함 deafness 속에서, DMS는 기묘한 방식으로 시드니에 충격을 줬다.” 사실 파이선 관련 에피소드는 어차피 그것을 잘 모르던 내게 큰 문제상황은 아니었고, 나는 웃으며 “와. 얘 비언어적 학습장애잖아”라는 농담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이후 파이선 언어가 지닌 특성이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고, 그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우리를 모두 반영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인지』 중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DMS 같은 존재자와 결코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도 DMS의 불투명성에 관한 시드니의 이해 같은 것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책 속의 DMS나 현실의 파이선 모두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방식으로만 소통하거나 생활하지는 않는다. 스티븐 샤비로는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은 신조어입니다. 저는 어떤 것이 부정되거나 무효화됨을 함의하는 접두사 “탈-” dis 을 “인지” cognition 라는 단어에 첨가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신조어를 만든 이유는 신경생물학과 심리학뿐만 아니라 심리철학에서도 인지를 강조하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협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는 인지와 그의 도구들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경제. 인지로 인식하고 헤아릴 수 있어 외부에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주류가 되었고, 그로 인해 인지를 벗어난 것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의 자리는 매우 협소해졌다. 인지와 사고로 이루어진 세상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심장을 떠올려보곤 한다. 나의 심장과 그간 쌓인 학문과 전문적 기술들이 만들어낸 인공심장. 나의 심장처럼 인공심장도 뛴다. 하지만 이상형을 만난 인공심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상형을 인지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까? 심장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에게 인공심장은 매우 고마운 존재겠지만, 우리가 모두 인공심장을 달 필요가 있을까? 병리학적 역기능의 문제 해결과 초인적인 능력 증강요법 사이의 경계는 필요할까? 우리는 어디까지 인지와 그 산물을 적용하고 활용하며 어디는 남겨두어야 할까? “이 탈인지라는 신조어를 인지를 교란하며 인지의 제한을 초과하지만, 그러면서도 인지를 지원 subtend 하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말한다. 또한 “나의 작업에 담긴 가정은 허구와 우화가 감수성의 기본적 양태이며, 인지 자체는 그것들로부터 파생되어 그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저자는 이 책에서 감수성에 대한 사변 ― 허구와 우화 ― 을 다양한 SF소설의 서사를 살펴보며 감수성의 잠재력과 그 함의를 제공하고 있다. “생명의 특수한 사례와 본질 및 전반적 개념으로서의 ‘생명’ 사이, 그리고 생명의 이러한 모든 반복과 그런 생명을 포착하고 개념화하려고 하면서 그 자체로 살아있기도 한 사고 사이에는 여러 모순이 있다. 비록 이 시점에서는 직감에 불과하지만, 나는 감수성을 생명의 속성으로써 여기기보다는 감수성이나 느낌의 관점에서 생명에 접근하는 것이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샤비로의 『탈인지』와 함께라면, 철학자, 컴퓨터, 아바타, 인간 존재자, 살인마, 외계인, 점균이 되어 느껴보는 새로운 체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윤하는?고양이를 사랑하고, 철학책 읽기를 좋아하는 심리상담사. 최근 개인을 넘어 인간 존재의 치유와 회복을 도모하는 시공간과 방법을 자꾸 고민하게 되어서 속이 좀 시끄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