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문화 다 2022.04.28] 다양한 소수의 감각과 사물의 어셈블리지를 향해 / 김보섭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e_text&ps_boid=317 우리는 흔히 감각은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며, 사물은 내 밖에 있는 별개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감각으로 여겨진 것들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사물들은 내 의식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느낀 것은 어쩌면 이미 주어진 대로 느낀 것일 수 있고, 내가 어떤 사물과 상황에 놓여져 있는가에 따라 내 생각도 바뀔 수 있다. 내가 가진 확실한 것이라고 믿는 정체성, 의식, 도덕, 신념과 같은 것들은 사실 감각과 사물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활성화하거나 침잠시킨다. 나는 내가 놓여진 공간이나 사물과 별개일 수 없고 내 의식은 내가 감각하는 주위의 모든 것에 퍼져있다. 김은성의 『감각과 사물』은 인간과 사회 사이를 연결하는 감각과 사물 사이에 놓인 현장을 중심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예민한 이슈를 파고든다. 먼저, 저자의 ‘사물'은 구체적인 것이다. 인문학에서 ‘사물'은 자연에 대한 추상적 사물에 가깝고 과학에서 ‘사물’은 자연 현상 자체를 말한다. 기존 학문들은 우리 주위에서 생생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물건들을 ‘진지한’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저자가 밝혔듯 이 책의 제목을 푸코의 『말과 사물』을 본따 지은 것은 추상적인 ‘말과 사물’을 구체적인 ‘감각과 물건’의 세계로 병치한 것이다. 구체적 사물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과 감각으로 투영하는 사물들은 감각-물질적 권력을 작동시킨다. 『감각과 사물』에서 제일 반가운 점은 기존 학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간과해 왔던 ‘사례'와 ‘현장'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생생한 감각과 구체적 사물들을 탐구하기 위해 책상에 머무르는 대신 『감각과 사물』을 위해 맘카페에 ‘잠입'하여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전국의 능선과 바닷가를 누벼 풍력발전기를 둘러싼 주민의 이야기를 청취했으며 가락시장의 경매사들과 중도매인의 표정과 몸짓을 읽었다. 또는 사회 운동의 현장에 참여해 활동가를 인터뷰하고 때로는 법과 제도에 대한 자료를 성실히 추적했다. 저자는 스스로를 ‘현장 연구자’로 밝히며 국내 현장 연구의 부족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천으로 이 연구는 8년 간에 걸쳐 현장을 발로 뛰어 현장의 사람들을 만나 직접 취재한 결과이다. 저자는 이론은 세상을 보는 도구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론을 잣대로 세상을 끼워 맞추지 않겠다는 연구자로서의 의지와 태도로 읽힌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론적 도구로 삼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과 신유물론도 그에게는 실천적 행위를 위한 지도가 될 뿐이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과 신유물론 등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지만 코로나19, 아파트 층간소음, 풍력발전, 사회운동, 경매장이라는 사례 연구와 접목하는 시도는 저자의 진심 어린 실행적 태도를 느끼게 한다. 신유물론의 이론이 무한하고 다양한 네트워크를 꿈꾸는 만큼 저자는 사례와 현장의 다양한 감각을 수집하고 재구성했다. 『감각과 사물』이라는 제목은 일면 다채로운 감각적 수사와 흥미로운 사물의 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하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책의 제목과 달리 책의 내용은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그에 따르면 ‘순수한’ 이성과 도덕으로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물질에 의해 영향을 받은 ‘불순한'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내 마음의 순수한 도덕은 사실 마스크와 같은 사물과 특정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 미세먼지를 막기 위해 쓰는 마스크는 도덕적 대상이 아니지만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마스크는 도덕적 인격을 판단하는 사물이 된다. 심지어는 마스크를 쓰는 방법에 따라서 도덕적 인격을 판단한다. 코와 턱에 걸쳐 마스크를 쓴 사람을 보면 불성실한 사람으로 느끼는 예가 그러하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강력한 ‘전염력'을 상상하고 대면과 접촉을 공포로 밀어 넣었다. 코로나19의 도덕은 마스크 쓰기, 손 씻기, 거리 두기, 백신 접종, 이동 동선에 대한 의식에 제한을 가한다. 교회, 클럽, 룸살롱, 피시방, 노래방 등에 가는 행위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당한다. 저자는 인터넷 맘카페를 중심으로 펼쳐진 도덕 담론을 유심히 관찰하며 타인의 대한 비난과 강요, 자기검열에 대한 의식을 대화체로 엮었다. 이들 대화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이기적이라 몰아세우고 자신의 도덕성을 재확인한다. 이들 비난 앞에서 각자의 사정과 특수한 상황들은 모두 다 밋밋한 것들일 뿐이다. 우리가 모르는 상황에 놓인, 마스크를 쓸 수 없는 사람이나 그런 동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나 소수의 감각들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쉽게 무시한 것은 아닌가. 우리의 존재는 사람과 사물,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물질적 배치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나’는 하나가 아니다. 그저 여기저기에서 달라지는 나일 뿐이다. 그러한 다양한 세계를 만끽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지만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저자가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인 구성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신유물론의 입장에서 존재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물질적 집합체, 어셈블리지의 변화에 주목할 뿐이다. 그 어셈블리지는 각각의 독립된 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닌 그 약간의 관계적 변화에도 수많은 다양체가 생성될 수 있다. 타인과 나, 사물들의 무한한 다양체를 상상하는 것, 현장에서 저자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도덕의 물질성이 만들어낸 자유에 대한 권리와 사회적 편견에 취약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다. 코로나19의 도덕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성소수자들, 택배근로자들, 콜센터 노동자, 청각장애인 등이 느끼는 도덕은 다를 수 있고, 그러한 어셈블리지는 또 다른 세계이며 우리가 가진 도덕의 어셈블리지는 강요될 수 없다. 저자가 밝히듯 다원적 세계, 감각과 사물이 만들어내는 아주 미세한 소수의 세계를 주목할 때 새로운 사회의 어셈블리지를 꿈꿀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