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22.01.09] 백인 영웅 서사로부터 벗어나…아래로부터 바라본 대항해시대 / 이라영 예술사회학자 기사 원문 보기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10616152105928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지배자의 영웅적 서사를 바라볼 것인가, 이름 없는 다수의 목소리를 찾을 것인가. 주로 해양사를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역사를 써온 마커스 레디커의 <대서양의 무법자>는 <노예선>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다. <노예선>에서 레디커가 담았던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창의성"이라는 주제는 <대서양의 무법자>에서도 이어진다. <노예선>이 노예무역에 초점을 맞춰 당시의 정치적 배경, 노예선의 구조, 항로, 노예선 안에서 벌어지는 일, 아프리카인들의 저항 등을 다뤘다면, <대서양의 무법자>는 대서양을 오가던 여러 무역선 안에서 선원으로 일했던 노동자, 바다를 휘젓던 해적, 그리고 노예선에 실린 노예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무역선, 해적선, 노예선이 모두 대서양에서 분주히 오갔던 18세기가 주요 배경이다. '위로부터의 역사'가 위대한 백인 남성의 역사라면 아래로부터의 역사에는 잊혀진 다양한 얼굴이 등장한다. 노예들을 무력한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고 이들이 저항하기 위해 뭉치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약탈자인 해적도 다른 관점으로 생각한다. 단지 해상에서 다른 선원과 배를 납치하거나 약탈하는 악인이 아니라, 그들이 해적이 되기 전 배에서의 억압에 이골이 난 선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해적선 안에서 그들은 나름의 평등주의를 실현했고, 해적 사회가 당시로서는 대안적 사회 구조를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레디커는 바다 위를 오가는 이 노동자들을 '세계주의적' 시민으로 자리매김 시킨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명명한 ‘대항해시대’인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우리에게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스쿠 다 가마, 페르디난드 마젤란, 제임스 쿡 등이 널리 알려졌다. 이들은 '탐험가'이며 '최초'의 개념을 독식한다. 곳곳에 이들의 이름을 딴 기념일이나 건물, 도로명 등이 존재한다. 설탕과 차, 각종 향신료를 유럽으로 들이는 수많은 무역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육지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바다 위의 한 마을이나 다름 없는 배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돌리면, 잊혀졌던 수많은 인물들이 드러날 것이다. 육지중심적 관점은 영토를 중심으로 한 국가, 그 안에 거주하는 특정 인종을 중심으로 '인권'을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육지 바깥의 바다에서 '떠다니는 섬' 같은 함선 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레디커는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을 언급하며 선원들의 '허풍'에 문학적 위상을 부여한다. 실제로 17세기 후반에서18세기까지 가장 인기 있는 문학 장르는 해양 문학이었다. 허풍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출판으로 이어졌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바다에서 돌아온 뱃사람이 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시작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인 대니얼 디포도 상인의 아들이었기에 여러 곳을 돌아다닌 선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 이야기들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뱃사람의 허풍은 문학만이 아니라 해양과 다른 나라에 대한 지식의 재생산도 도왔다. 나아가 전투에 관한 허풍은 피지배계층에게 저항의 방식을 가르치고 저항을 향한 심리적인 추동력을 줬다. 대항해시대 수많은 노동자들은 육지에서 아무런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뿐인 이들이다. 대부분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무학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무학이 지식과 경험이 없음을 뜻하진 않는다. 해안가는 '문화적 접경지대'로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는 최전방이었다. 이 해상 프롤레타리아들이 만들어낸 문화는 지배계층의 문화에 은근히 스며들었다. 반 세기 동안 바다를 돌아다닌 선원 에드워드 발로우는 많은 그림과 글을 남겼다. 바다에 나오기 전에는 쓸 줄 몰랐다는 그는 배에서 문학과 예술을 독학하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전했다. 그러나 "무학자의 보고"에 의존하기를 거부했던 지배계급은 이들의 이야기를 폄하했다. 노예선에서 노예들의 저항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노예들은 선상 반란으로 선원들을 제압하고, 식사를 거부하거나,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진다. 노예는 상인에게 하나의 상품이기에 그들이 죽으면 상인이 손해를 본다. 노예가 먹기를 거부하면 노예선의 선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먹이려고 한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적 구속이 덜했던 여성 노예들은 노예선 안에서 반란을 계획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 노예가 뭉쳐서 선장을 죽여버린 사건도 있었다. 1839년 뉴욕 해안에서 25마일 떨어진 곳에서 무장한 흑인 수십 명이 탄 수상한 함선이 발견되었다. '검은 해적'으로 여겨진 이들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는 언론을 타고 일파만파 퍼졌다. 사람들은 아미스타드호라 불린 이 함선에서 흑인들이 백인 선원들을 죽이고 상당한 양의 금품을 약탈했으리라 믿었다. 배에서 발견된 이들은 재판을 받아야했다. 그들이 노예로 돌아가야 하는지, 미국 땅에 들어오지 않은 채 바다에서 발견되었으니 아직 노예라고 할 수 없는지, 아니면 노예였다고 해도 이제는 자유인이 될 수 있는지 등을 논했다. 2년 간의 법적 절차를 거쳐 아미스타드호 반란자들은 공식적으로 자유인이 되었다. 이 반란자들이 재판을 다 받기도 전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살이 붙어 즉각 뉴욕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여러 인물 중에서 아미스타드호 반란의 주인공인 싱케이는 19세기 미국의 대중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싱케이의 모습은 화가들의 손을 거치며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싱케이는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와 비교되었고, 카리스마 있는 '유색인'의 이미지를 얻었다. 이처럼 반란자 노예들의 이야기는 문학, 연극, 미술 등에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저항 정신은 당대의 정치인이나 사상가들이 인권의 개념을 생각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글레디에이터>나 바이런의 <해적>도 연극으로 각색되어 상연되었다. 무려 250만 명이 미국에서 노예로 고통받던 시절에도 노예들의 반란이나 해적의 이야기가 당시에 이미 대중문화 속에 파고들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흑인 노예의 저항은 미국 시장에서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이자 오락거리가 되었다. 피지배계층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노예제가 폐지될 때까지 체제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의 저항은 처절하게 실패하거나 비참하게 마무리될지언정 그 정신은 어딘가로 계속 이어진다. '잡색 부대'라고 호명하는 흑인, 미국 선주민, 아시아인 등으로 이루어진 피지배계층 무리의 저항 정신은 미국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아이티 혁명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가능했다. 레디커는 이 책에서 바다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창작의 장소이며, 여러 인종이 함께 하는 노동의 장소, 급진적 사상의 발생지로 논의한다. 아래로부터 바라보는 역사는 저항하는 인간을 중심에 둔다. 그렇기에 권력의 역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영웅적인 얼굴이 착취의 얼굴이 되고, 안심해도 되는 피해자의 얼굴이 역동적인 저항의 얼굴로 재정의되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민중들은 많은 상류층 사람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예술로 재탄생했다. 이들의 투쟁은 인권의 범주를 넓혀왔다. 각각의 전투는 패배로 끝났을 지 몰라도 어딘가에서 저항의 씨앗이 자라도록 바람을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자. 여전히 싸우고 있는 수많은 소수자와 약자들이 싸움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