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양문학관CYBER 2022.01.13] 해양에 대한 바른 인식의 길잡이 / 구모룡(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oceanis.co.kr/notice/free_list.asp?mode=view&page=1&pageSize=10&seritemidx=&artistidx=&serboardsort=&search=0&searchStr=&idx=31626 내가 마커스 레디커를 처음 접하기는 한국의 해양문학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상선 선원, 해적, 영-미의 해양 세계, 1700-1750』(박연 역, 까치, 2001)를 읽는 데서 비롯한다. 해양과 근대를 몰각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바다만 기입되면 해양문학에 포함하는 이상한 관행을 따져 보는 과정에서 이 책을 접하였다. 역시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선원 계급의 형성이라는 문제를 그들의 역사로 기술하였다. 칼 슈미트가 말한 ‘대양적 전환’(oceanic turn)과 더불어 해양은 해양 경제(maritime economy)와 해양 근대성(maritime modernity)과 연동한다. 이러한 맥락이라면 우리 한국은 1950, 60년대에 이르러 해양 경제가 시작한다. 일본 제국이 바다를 지배한 시기에 해양의 출구는 ‘현해탄’에 지나지 않았다. 대양으로 나아간 시기인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선원 계급의 이야기인 본격적인 해양문학이 등장한다. 가령 천금성의 『허무의 바다』는 한국 사회의 선원 계급 형성과 그 노동의 성격을 원양어업의 측면에서 보여준다. 적어도 그의 초기소설은 사실주의에 기반하면서 해양 세목에 충실하였다. 뒤늦게 해양 세계에 참여한 한국 원양어선 선원 노동자의 모습을 마커스 레디커의 도움을 빌려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서구 해양문학의 출발이 셰익스피어라는 인식도 대학원 수업에서 『히드라』(정남영 손지태 역, 갈무리, 2008)을 읽으면서 가능하였다. 그의 『폭풍』은 씨벤처호의 파선이 동기가 되어 창작되었다. 그는 버지니아 회사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며 항해가나 모험가를 만나서 조사하거나 항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최근 번역된 『대서양의 무법자』는 선원과 해적과 여러 종족이 모인 패거리(잡색부대라고 번역된 motley crew) 선상 노동자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우선 두 가지 시각에서 주목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역사의 주체를 지배자에 두지 않는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해양의 시점으로 인류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선원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매우 집단적인 공동 창작에 가깝다. 해양문학의 기원이 바로 이와 같은 선원 이야기에서 비롯한다는 점은 해양문학에 관심을 지닌 연구자나 비평가에게 매우 종요로운 대목이다. 대체로 대니엘 디포의 『로빈슨크루소』를 그 출발로 삼는 이들은 이 작품을 서구 개인주의의 시발로 간주한다. 마커스 래디커도 지적하듯이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도 이러한 입장이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윤리』도 같은 맥락인데 해양의 집단적인 선원의 역사를 육역의 자본주의와 시민 계급 형성으로 회수한 측면이 크다. 물론 네덜란드의 장르화가 해양 경제의 토대 위에서 꽃 피었듯이 해양문학도 해양 경제의 산물이다. 따라서 개인주의의 형성과 발달은 서구 근대와 별개일 수 없다. 그러함에도 선원의 집단적인 하위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는 해양의 바른 이해는 어렵다고 하겠다. 마커스 래디커의 책은 해양에 대한 올바른 안식과 선원 계급의 형성과 발달에 대한 이해, 세계자본주의의 형성과 이에 동반된 저항의 역사를 제대로 알게 한다. 이는 우리에게 한국 선원 계급의 형성이라는 문제의식을 부여하며 한국 해양문학의 발생론을 재검토하게 한다. 제국의 바다에 갇혀 있다 민족 해방이 해양의 해방이 되면서 한국은 1950, 60년대에 이르러 세계 해양으로 나아가게 된다. 서구에 비할 때에 몇백 년 늦은 출발이지만, 해양에 관한 한 오리엔탈리즘을 피할 수 없다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하였듯이, 서구 따라잡기를 촉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촌 해체와 한국 선원 계급 형성, 그리고 한국 해양문학의 발생에 대한 논의를 마커스 래디커를 통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다른 한편 동아시아 지중해를 횡단하던 왜구에 관한 연구도 괄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남부 세력으로만 바라보던 데서 고려와 탐라 그리고 류쿠 출신이 연합한 세력이라는 연구가 속속 나오고 있다. 캐러비언 해적 못지않은 동아시아 해적의 역사가 있으나 화이사상과 민족주의의 개입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서술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해역 세계의 시각으로 이를 뒤집어 보려는 노력이 최근 들어 많아지고 있으니 왜구에 대한 새로운 역사 서술도 기대된다. 여하튼 우리는 지독한 육지중심주의, 대륙중심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한국사회가 그렇다는 말이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데 마커스 래디커에 상응하는 동아시아 해양 연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