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01.04] ‘구글 정부’ 주장하는 대선후보에게 권한다 - <피지털 커먼즈> 서평 / 안태호(협동조합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315 유력 대선 후보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구글 정부’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은 후보가 관련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한 채 무조건 이야기한다며 비웃었지만, 몇몇 이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정부의 속성에 사기업의 이름을 붙인 것부터가 문제적 소지가 다분했다고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구글은 개인정보 침해 논란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 전 세계 검색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글로벌 공룡 기업이 겪고 있는 논란의 이유는 단순하다. 사용자 개개인의 정보가 곧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구글이 ‘Don't Be Evil’이라는 기업의 모토와는 상관없이 우리 시대의 빅브라더가 되어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구글 정부'는 '국민의 모든 활동을 추적하는 무시무시한 감시 정부'란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1) 그런데 좀 더 무서운 것은 다음 발언에 있는 지도 모른다. 이 후보는 “정부의 시스템 자체도 AI화, 플랫폼화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병원의 병상 배정 문제였다. “얼마전 의협을 갔더니, 병상이 생겨도 누구를 보내야 할 지 판단이 안 선다고 하더라. 병상에 누구를 보내야 할 지 자동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를 가공해서 쓸 수 있도록 데이터화 되어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 발언에서 직관적으로 위협을 느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AI와 플랫폼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사회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진행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 안 하는' 사회, 기우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히고 두뇌 활동을 통해 판단하거나 숙고하던 전처리 과정이 자동화로 인해 자주 생략되고 우리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게 된다. 이들 전처리 인식 과정이 자동화된 데이터 처리 장치로 위임될 수록 사회 현장에 실재하는 의문들은 사라지고 그에 대해 사유하지 않게 되면서 의식적 개입의 여지가 줄어든다. 현실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의심으로부터 자동 면제되면 될수록 인간 의식이 사회적으로 점차 탈숙련화할 수밖에 없다.”(45-46쪽) 사회적인 것의 실종과 함께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정말로 오게 될까. 이것은 소수 까칠한 지식인들의 과도한 우려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은 벌어지고 있다. 아니, 착착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알고리즘에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위탁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문제제기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때 생활의 편의를 가져다주는 플랫폼 기업들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카카오 택시는 길거리에 나가 택시를 잡느라 발을 동동 구르는 풍경을 지웠고, 유튜브가 추천해주는 영상들은 어쩌면 내 취향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걸까 싶은 것들이었으며, 페이스북에서는 나와 취향이 맞고 정치적 지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친구 삼을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제는 이런 서비스들이 마냥 사람들의 편리에만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을 것이다. 플랫폼 기업들이 고객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한편으로, 서비스 제공을 위한 노동을 심각하게 억압한다는 사실들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앱은 기사들을 분 단위로 착취하고 있고,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 산업도 관련 종사자들의 과중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이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대선 후보의 말에서 플랫폼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협을 끌어내긴 했지만 <피지털 커먼즈>가 포착하는 세계는 폭 넓고 촘촘하게 이 세계의 양상을 추적해 낸다. 피지털은 ‘피지컬’(physical, 물질)과 ‘디지털’(digital, 비물질)을 합친 조어다. 플랫폼 자본주의의 디지털의 영향력이 물질계를 좌우하는 역전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할 것인가를 고안하며 전유한 용어다. 피지털은 디지털과 물질의 복합현실을 비즈니스에 응용하던 용어인데, 이를 플랫폼 자본주의의 현실왜곡에 맞서는 무기로 가져온 것이다.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양상을 사람들이 가졌던 호혜의 전통을 사업화하며 파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상호부조와 품앗이 전통은 태스크래빗이, 아는 이들끼리 빈집 잠자리를 함께 나누던 지역문화는 에어비앤비가, 동네 커뮤니티 수준에서 비공식적으로 이뤄지던 카풀은 우버나 집카가, 하숙집의 거주 문화는 셰어하우스 플랫폼이 흡수하거나 대체한다.”(27쪽)는 것이다. 공유경제란 말은 기껏해야 시장에서 거래를 중계하는 서비스에 대한 과도한 용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시가 공유도시를 선언하고 진행했던 사례들 역시 시민들의 역량을 기르거나 관리능력을 배양하는 방향이 아니라 이익을 독점하는 서비스에 치중했다며 비판한다. 서울시 공유경제 서비스의 가장 성공한 모델로 여겨지는 따릉이만 해도, 시민들이 자전거를 통해 에너지에 대해 성찰하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관리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성공한 서비스로만 남게 됐다는 것이다. 정책이 시민들을 소비자로 전락시키면 소비자는 정치적 공간을 상실하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그나마 서울시는 공공서비스로라도 남았다. 그러나 다른 지자체들이 공유자전거를 도입하며 카카오 바이크 등 사업자들에게 독점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상업화시키는 과정을 생각하면 공유경제가 얼마나 오염되고 왜곡된 말인지 실감하게 된다. 플랫폼 자본주의가 이윤 창출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는 것들이 “디지털 데이터로 바뀐 들끓는 정서와 정동, 생체 리듬 정보”(23쪽)라는데까지 이르면 소름이 끼칠지도 모른다. 플랫폼 자본주의 폐해 극복 위한 '커먼즈 운동' 플랫폼 자본주의가 갖는 노동착취와 위험성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시민들 사이에서 서서히 인식이 생기고 있다. 이제 플랫폼 기업들이 시민들의 편의와 공공선을 위해 활동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있느냐는 거다. 저자는 ‘공유의 가치를 직접 실현하고 공통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실천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책 제목이 이야기하는 커먼즈 운동이다. 커먼즈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책에서는 이를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공덕역 경의선 공유지 운동, 민달팽이 유니온 등 청년 주거 공간 실험, 공동체 화폐은행 빈고, 농지 살림 운동, 인천 배다리 공유지, 을지로와 세운상가 일대 도심 제조업 생태계 운동, 예술가 커뮤니티 자립의 공유성북원탁회의, 약탈적 플랫폼 현실에 대항한 ‘플랫폼 협동주의’(platform cooperativism), 성미산 마을공동체 실험”(116쪽)이 호혜와 공유에 바탕한 커먼즈의 단위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커먼즈 논의는 지식 인클로저가 발생하고 있는 지적 재산권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부터 기후위기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을 위한 ‘지역과 장소를 기반으로 한 자원 공동체’가 중심이 된 생태 커먼즈까지 나아간다. 누군가는 무기력한 대안이라고, 누군가는 꿈꾸는 이야기를 한다고 손가락질을 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지금 와서 전세계를 뒤덮어버린 플랫폼 자본주의의 지배력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세상을 꿈꾸는 소수는 언제나 그런 푸대접을 받으며 세상을 구해왔고, 세계를 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서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구글 정부’ 치하에서 감시를 받으며, 모든 사회적 의사결정을 AI의 자동화된 알고리즘에 의탁한 채 ‘무기력한 행복’을 누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1)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윤석열의 '구글 정부론'은 정말 위험하다”(지디넷코리아, 2021/12/26), https://zdnet.co.kr/view/?no=20211226143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