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간

나 자신에게 주는 아홉 개의 교훈
Time for Revolution :
Kairòs, Alma Vénus, multitude

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정남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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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간』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남긴 어두운 과거,그것에 의해 가로막혀온 유물론의 역사를 완전히 혁신하여유물론을 새로운 빛 속에서 새롭게 제시한다.

『제국』 이후에 쓰인 안또니오 네그리의 철학서인 이 책은네그리의 가장 최근의 철학적 사유가 집중적으로 담긴 책으로,독자들의 『제국』 읽기를 돕는 데서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다. 

 

· 『혁명의 시간』은 탈근대를 사는 우리들의 화급한 문제, ‘자본주의에 의해 완전히 포섭된 사회에서 저항을 위한 장소가 여전히 존재하는가?’의 문제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 『제국』이 나온 직후에 쓰인 『혁명의 시간』은 시간과 저항의 철학에 대한 네그리의 지속적인 관심을 반영하며 제국과 다중이라는 두 핵심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한다.

· 『혁명의 시간』은 이미 출간된 『제국』과 곧 출간될 『다중』을 연결짓는 ‘다중의 유물론적 정치철학 개론서’이다.

 

 

간단한 소개

 

『혁명의 시간』은 이미 출간된 『제국』과 곧 출간될 『다중』을 연결짓는 ‘다중의 정치철학 개론서’이다. 

안또니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은 그가 1981년에 쓴 『시간의 구성』(갈무리, 근간)과 함께 1980년대부터 계속 진행해 온 시간과 저항이 갖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성찰들을 담은 철학적인 에쎄이이다. 특히, 『제국』이 나온 직후에 감옥에서 쓰인 『혁명의 시간』은 여러 개념도구들을 제공하여 제국과 다중이라는 두 핵심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제국』의 출간 이후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만큼이나 그의 사상에 대한 비판들이 많았다. 이 비판들은 대개 『제국』의 바탕이 되는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혁명의 시간』은 네그리의 가장 최근의 철학적 사유가 집중적으로 담긴 책으로, 독자들이 『제국』과 곧 출간될 『다중』의 바탕이 되는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제국』을 둘러싼 곡해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혁명의 시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제국』이 결코 온전히 이해될 수 없으며, ‘혁명의 시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국’을 아래로부터의 ‘다중의 공통체’로 변신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혁명의 시간』은 『제국』에 대한 보조적 역할에만 한정될 수는 없다. 이 책에 담긴 철학적 사유는 유물론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 책에서 자신이 하는 작업을 ‘유물론의 재구성’이라고 부르면서, ‘주권’의 옹호자, ‘선험론’의 옹호자, ‘일반의지’의 옹호자들인 홉스, 루소, 헤겔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다. 맑스를 근간으로 마끼아벨리, 스피노자, 푸꼬, 들뢰즈-가따리의 사유를 따라 유물론의 전제들을 혁신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탈근대를 사는 우리들의 문제, ‘자본에 의하여 완전히 포섭된 제국의 시대에 다중의 저항과 혁신을 위한 장소가 여전히 존재하는가?’라는 화급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삶 전체가 자본주의적 생산활동이 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삶들이 생산하는 공통성’을 바탕으로 유물론을 재구성하는 ‘다중의 유물론적 정치철학 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다중의 유물론적 정치철학’은 ‘프롤레타리아의 실천철학’을 정초한 맑스를 이어받으면서도 맑스를 넘어서라는 탈근대 유물론의 요청, 즉 삶 전체를 착취하는 ‘제국’과 적대하면서 다양성의 지반 위에서 삶이 펼쳐내는 공통성으로 유물론을 재구성하라는 요청에 대한 네그리의 아래로부터의 탐색을 담고 있다.

 

“그러면 생산자들의 다중 내에서 혁명적 주체성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이 다중은 어떻게 저항과 반란의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재전유의 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자치를 위한 투쟁을 할 수 있는가? 삶정치적 탈근대에서, 즉 노동력의 변형과 생산적 풍요화가 일어난 국면,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 전체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가 목격되는 국면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이에 대한 대답들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카이로스’와 ‘삶을 부여하는 비너스’ 다음으로 ‘다중’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희망의 재구축을 향하여 (더 정확하게는 「알마 비너스」에서 말한 대로 ‘디스토피아’를 향하여) 벽돌 몇 개를 쌓았다고 할 수 있다.” ― 「서론」 중에서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탈근대의 시기에 세상과 삶, 존재를 새롭게 짜며 척도-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다중의 혁명적 실천의 잠재력을 철학적 층위에서 1부 「카이로스」(‘공통된 이름,’ ‘측정불가능한 것,’ ‘유물론적 장’)와 2부 「삶을 부여하는 비너스」(‘공통적인 것,’ ‘가난,’ ‘사랑’) 그리고 3부 「다중」(‘정치,’ ‘산 노동,’ ‘결정’)등의 아홉 개의  주제들을 연결시키며 깊이있게 탐구한다.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을 통해 국가의 경계를 허물며 전쟁과 일체의 초월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다중의 삶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유물론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결론적으로 네그리는 다중의 삶정치적 힘이 ‘권력과의 적대’와 ‘가난한 이들의 자기가치화’라는 두 개의 근본적인 경로를 따라 착취와 전쟁으로 비롯되는 일체의 혼란과 초월주의에의 유혹을 뚫고 공통적인 것으로 구축됨을 논증한다.

 

"이 텍스트는 ‘초월주의는 이제 그만’을 투쟁의 전제로 삼으며, 그 교훈은 ‘빈자들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 속에 있다. 이 물음은 말하자면, ‘우리를 전쟁으로 이끌지도 않고 노예들과 죽은 자들의 평화로 이끌지도 않으며, 부를 생산하는 자유인들, 영원을 살고 경험하는 데 지치지 않는 자유인들의 공통의 삶으로 이끌 공동의 조직화를, 모든 형태의 죽은 노동에 대한 산 노동의 승리를 빈자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서론」 중에서

 

이 책은, 네그리의 텍스트가 늘 그러하듯이, 단 한 문장에 여러 의미들과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쟁점들을 압축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언제나 문제가 아니다. 이 어려움으로부터 얼마만큼 새로움이 창조되느냐가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통적 맑스주의의 전통에서 가로 막혀진 유물론적 사유와 혁명의 새로운 부활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매우 긴장되고 즐거운 텍스트가 될 것이다. 이 책 『혁명의 시간』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다른 삶을 ‘지금 여기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바로 자기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상세한 소개

 

『혁명의 시간』에서 네그리는  ‘공통된 이름,’ ‘측정불가능한 것,’ ‘유물론적 장,’ ‘공통적인 것,’ ‘가난,’ ‘사랑,’ ‘정치,’ ‘산 노동,’ ‘결정’ 등 아홉 개의 주제들을 연결시키며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가로막혀온 유물론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네그리는 ‘유물론 대 권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탈근대의 시기에 힘을 중심으로 하는 유물론적 존재론을 파악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네그리에게서 핵심적 문제는 오늘날 탈근대적 공통성 위에 수립된 새로운 자유인들의 삶이 어떻게 착취에 대한 적대를 넘어서는지를,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협동을 향하여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네그리는 2부 「알마 비너스」(Alma Venus, 삶을 부여하는 비너스)라는 제목이 달린 세 편의 글(‘공통적인 것,’ ‘가난,’ ‘사랑’)을 집필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삶정치적 탈근대에서, 즉 노동력의 변형과 생산적 풍요화가 일어난 국면에서,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 전체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가 목격되는 국면에서 네그리는 삶을 부여하는(생산하는) 「알마 비너스」를 경유하여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그렇다면 생산자들인 가난한 다중 내에서 혁명적 주체성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이 다중은 어떻게 저항과 반란을 결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재전유의 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자치를 위한 투쟁을 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며 특이한 것이 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방해가 되는 것은 개념들이다. 개념들은 우리 외부에 우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함을 상정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들은 초월적인 것을 허용 혹은 묵인한다. 반면 이름은 단지 우리들이 부르는 이름일 뿐만 아니라 이름부르는 주체성과 이름붙여지는 사물이 프락시스를 통해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그런 내재적 이름이다. 네그리는 이를 앎의 사건, 이름붙이기의 사건, 혹은 더 정확하게는 특이성으로서의 앎이라고 한다. 여기서 앎이란 사건으로서의 카이로스이다. 이런 식으로 이름붙이는 사건 즉 (존재와 시간을 동시에 부르는) 카이로스에 의해 유물론이 이름들로 이루어진 논리적 구축만을 인정하게 된다면, ‘공통된 이름’은 우리의 경험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가 될 것이며 언어의 형태로 제안되는 의지와 지식의 특이한 사건들 및 행동들로 짜여진 직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2부  「알마 비너스」의 앞에, 앎의 사건에 관한 1부 「카이로스」를 놓고 ‘유물론적 장(場)’의 ‘측정불가능한 것’ 안에서 ‘공통된 이름’을 구축하는 것에 관한 글 세 편을 추가한다.

유물론적 앎은 우리의 시간(카이로스)과 사물의 시간이 만나서 매우 구체적인 존재를 ‘동시에’ 실존하게 할 때 이루어진다. 이름붙이기와 이름붙여진 사물의 적실화를 의미하는 이 ‘동시에’가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세계가 해석되는 동시에 그 세계를 변형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자 생산으로서의 시간’이다.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유물론의 존재론적 짜임새로서의 시간성의 차원을 강조하고 생성의 주체화를 강조함으로써 프락시스의 철학, 프락시스의 유물론, ‘다중의 유물론적 정치철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네그리는 ‘공통적인 것의 신비화인 국가’를 통해 전개되지 않는 공통적인 것의 형성 혹은 구성을 둘러싸고 논의를 더욱 심화시킨다. 이는 아직 현재와 같은 권력의 조건에서는 필연적으로 우연적이고 거친 구성이다. 그러나 항상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화살(카이로스)에 열려 있으며, 항상 존재의 가장자리로 이동하는 가난에 의해 갱신되는 그러한 구성이기도 하다. 네그리는 이러한 구성을 세밀하게 논증하면서 3부 「다중」에서 ‘정치,’ ‘산 노동,’ ‘결정’에 관한 글 세 편을 추가한다. 「다중」에서 프락시스로서의 ‘앎’과 ‘삶’을 부여하는 존재론적 경로는 ‘정치’적 경로와 결합된다. 저항과 반란을 ‘결정’하는 다중은 ‘산 노동’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근대에서 코뮨주의의 모험을 시도했던 계급적 주체성이었고, 오늘날의 탈근대에서는 국가로부터의 탈출을 통해 ‘공통성’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삶정치적’ 주체성이다. 다중은 장차 올 모든 코뮨주의의 새로운 ‘유령’인 것이다.

 

『혁명의 시간』은 ‘가난’으로 척도에서 벗어나고  ‘사랑’으로 협동적 충만을 성취하는 새로운 주체성, 이른바 ‘다중’에 대한 깊이있는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오늘날은, 생산은 전지구화되고 정서화되는데 반해 인구의 대다수는 전쟁과 착취로 더욱 가난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네그리는 이러한 ‘가난’과 협동으로서의 ‘사랑’을 다중의 두 속성으로 재구성한다.

가난은 현재에 뿌리박고 있으며, 측정불가능한 것으로 나아가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힘이다. 또한 가난은 삶 자체가 착취되는 탈근대의 시기에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조명하는 힘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빈곤과 고통의 짐을 지고 주체성을 생산하는 힘이다. 이 생산의 힘은 가난이 척도를 부과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자기가치화’의 힘이다. 이 실천적 힘은 ‘척도의 외부’로서 즉 저항으로서 나타난다. 혹은 ‘척도 너머’로서 즉 구성적 힘으로서 나타난다. 어떤 경우든 가난의 자기가치화는 삶으로 하여금 한계, 척도, 부(富)라는 공리체계의 지배로부터 탈출하도록 함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구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세계의 측정불가능성 속에서 가난이 공통적인 것의 구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면, 생성과 협동으로서의 사랑은 실제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활동이다. 사랑은 척도가 아니라 측정불가능한 것이며,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특이한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된 것이며, 시간성의 질체가 아니라 시간의 화살(사건이자 생산인 시간) 그 자체이다. 공통적인 것은 가난과 사랑의 창조적 관계로부터 탄생할 때에 활력을 띠며, 다중이라는 공통적 이름을 부여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중이 공통적인 것의 욕망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고 싶다면 사랑해야 한다.

 

네그리는 ‘맑스와 함께 그리고 맑스를 넘어서는’ 길을 보여준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척도로서의 노동시간에 관해 분석하면서도 『그룬트릿세』에서는 척도를 벗어난 시간을 제기한다.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진행됨에 따라 ‘가처분시간’(disposable-time)이 ‘실제적 부’(real wealth, 완전한 부)의 원천으로 된다는 「고정자본과 사회적 발전」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맑스에게서 부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자본론』에서 중심적 경향인) ‘자본주의적 부’와 (『그룬트릿세』에서의 중심적 경향인) ‘실제적 부’가 그것인데, ‘자본주의적 부’는 양적 개념임에 반해, ‘실제적 부’는 질적인 개념이다. ‘자본주의적 부’는 측정가능한 ‘노동시간(labor-time)’인데 반해 ‘실제적 부’는 척도로서의 노동시간을 넘어서는 ‘가처분시간’이다. 맑스는 ‘가처분 시간’을 사회 그 자체의 발전, 따라서 인간 그 자체의 발전의 시간으로 제기한다.

네그리는 맑스의 ‘실제적 부’를 생산하는 이 ‘가처분시간’을 타인을 위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시간’이 아닌 새로운 질을 생산하는 ‘자기가치화의 시간’으로 재해석하고, 나아가 탈근대에 와서야 열리기 시작한 세상과 삶을 새롭게 짜는 시간, 삶의 생산이자 사건으로서의 시간인 카오스로 혁신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점이 네그리가 “맑스와 ‘함께’ 그리고 그를 ‘넘어서’”는 지점이다. 

네그리에게서 노동의 거부이고, 오성의 거부이며, 한계의 거부로 제시되는 ‘영원한 것’ 즉 존재의 생산은 맑스의 인간 그 자체의 발전을 의미하는 ‘실제적 부’를 스피노자를 경유하여 재구성해 낸 것이다. 탈근대의 시기에 ‘실제적 부’는, 항시 질적으로 동일하고 오직 양적으로만 측정되는 ‘자본주의적 부’인 가치와는 다르게 ‘가난’과 연결된다. ‘실제적 부’는 양으로 측정불가능하며 동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가난’이며 ‘소수자 되기’이다. 따라서 네그리에게 탈근대의 ‘실제적 부’는 역설적이게도 공통성을 향해 열린 ‘가난’이며, ‘가난’과 ‘사랑’에 의해 나날이 공통성을 혁신하며 날아가는 카이로스단자들(사건들)의 목적론인 ‘영원성’에 다름 아니다.

 

『혁명의 시간』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일그러진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긍정의 힘이 샘솟는가를 보여준다.

『혁명의 시간』에는 정통 맑스주의가 ‘가치-척도-시간’의 형태로 부과하는 그러한 착취이론 및 혁명이론을 이제는 유지할 수 없고 더군다나 옹호할 수는 결코 없다는 완숙한 깨달음이 들어있다. 네그리는 가치이론을 이렇게 비판한다고 해서 불명예스러울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패배에 대한 인식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투쟁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진전에 의하여 뒤집어진 시간성(삶 시간의 척도 시간화)에 대한 인식이며, 자본주의적 <권력>의 군사적 지배에 대한 인식이다. 자본주의적으로 뒤집어진 시간은 환상이자 24시로 등분되는 척도로서 제시되며, 결코 사건으로서, ‘여기 이곳’으로서 제시되지 않는다.

정통 맑스주의는 다양성의 범주들을 노동일이라는 ‘척도로서의 시간’ 위에 기초짓는다. 정통 맑스주의에서 ‘척도로서의 시간’에 대한 관례는 너무 견고하고 의심할 바 없이 고정되어서 ‘평균적인 노동일’을 자신의 기초로서 가정한다. 그러나 오늘날 착취의 시간은 하나의 노동일로서 너무나 확장된 바, 생산적 시간과 재생산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서 포섭한다. 또한 노동시장은 삶이 뿌리내리는 공간 전체 위로 시간에 대한 고려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이행은 시간에 대한 두 가지 반대되는 의미들을 강화한다. 초월적이고 신비화된 권력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의 ‘척도로서의 시간’과 삶의 공통성을 확장하는 다중의 ‘삶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착취의 조건들이 이제 전지구적 지형 위에서 다시 위치지워지고 있고, 이 전지구적 지형 내부에서, 착취, 절대적 잉여가치 그리고 상대적 잉여가치의 양과 질을 ‘평균적 노동일’의 ‘시간의 척도’로 환원시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그렇다면 혁명적 주체는 하나의 근원적 대안, 즉 자본의 ‘척도로서의 시간’에 대항한 것으로서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삶의 시간’이라는 대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적대적 조건들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삶 시간이 생산 시간이 될 때, 누가 누구를 측정한단 말인가? 시간과 삶에 대한 두 가지 의미는 더욱더 깊어지고 경직되게 구조화되는 분리 속에서 삶을 둘러싸고 직접적으로 갈등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삶 전체가 생산되는 탈근대의 시기에 착취를 명령하는 권력과 적대하며 공통적인 것을 향해 날아가는 ‘사건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긍정이 네그리의 지속적인 시도이다. 네그리가 『혁명의 시간』에서 진행시키는 것은 실질적 포섭이 완숙에 이르는 탈근대의 시기에 ‘척도로서의 시간’을 부단히 넘어서는 ‘사건이자 생산으로서의 삶 시간’, 즉 척도를 넘어서는 ‘혁명의 시간’을 유물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영어본과 불어본 동시 대조와 친절한 주석을 통해 네그리의 철학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살려낸 책

『혁명의 시간』을 우리말로 옮긴 정남영 교수는 영어본과 불어본을 동시에 대조하며 네그리의 치밀한 개념도구들을 생동감 있는 우리말로 살려 내었다. 또 네그리의 최근 저작인 Negri on Negri 외에 맑스, 스피노자, 푸꼬, 들뢰즈, 푸리고진, 슈뢰딩거 등의 주요한 저서들을 참조하며 영어판과 불어판에 없는 70여개의 상세한 주석을 더했다. 정남영 교수의 이러한 친절하면서도 진지한 노력은 네그리의 텍스트를 올바르고 쉽게 이해하는 데 더없이 커다란 도움을 준다.

 

 

추천사

 

『혁명의 시간』은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하나가 내놓은 주요한 철학적 진술이다. ― 프레드릭 재므슨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네그리를 발견한다. 철학적이고 심지어는 신학적인 문제의식에 깊게 몰입한 네그리이다. 이 책은 필독서이다. 널리 알려진, 전지구적 자본주의인 ‘제국’의 분석에 적절한 배경을 제공한다. ― 슬라보예 지젝

 

공공성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공통성을, 개혁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혁명을, 운(運)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덕(德)을, 권력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활력을, 제도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제헌을, 가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노동을, 법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삶을, 인권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공통권을, 제국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다중을 발견하고 그 운동 속에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접속시키기 위해서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철학서인 『혁명의 시간』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 『아우또노미아』 저자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네그리의 텍스트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 텍스트도 읽기가 어렵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익숙해져 있을 기존의 철학적 개념(도구)들이 별다른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단순한 철학적 지식의 획득을 목적으로 이 텍스트에 접근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읽기에 요구되는 것은 네그리가 “유물론적 수행(修行)”이라고 부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생각이 달라짐으로써 곧 몸이 달라지고 그리하여 새로운 행동을 준비하는 (아니, 이미 시작하는) 수행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이 텍스트의 내용을 정리 혹은 요약의 형태로 다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독자들 스스로 이 텍스트의 빽빽이 밀집된 직물에 뛰어 들어 스스로 겪고 깨달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 정남영, 경원대 교수

 

 

지은이

 

안또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1933~

 

이탈리아 빠도바 출생. 1957년 23세에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9년에 법철학 교수 자격을, 1967년에 국가론 교수 자격을 취득한 후 빠도바 대학 정치학 교수를 지냈다. 1960년대에 『노동자 권력』, 『붉은 노트』, 『노동자 계급』 등의 잡지에 관여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빠도바 대학 정치과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오뻬라이스모와 아우또미아 사상을 발전시켰다. 

1979년 4월 대탄압 당시 알도 모로 수상 납치 살해 및 테러리스트의 수뇌라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 1980년대 초반 프랑스로 망명하여 파리8 대학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잡지 『전 미래』 지 발간을 주도했다. 1997년 자진 귀국하여 약 6년여의 수감과 연금생활을 마친 후 2003년 4월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92년에 착수하여 수감 중에 마이클 하트와 함께 완성한 『제국』으로 영미권을 포함하여 전 세계 지성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맑스에서부터 들뢰즈, 마끼아벨리에서 스피노자를 아우르는 당대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러 저서 중에서 『지배와 사보타지』, 『맑스를 넘어선 맑스』, 『야만적 별종』, 『자유의 새로운 공간』(가타리와 공저), 『전복의 정치학』, 『디오니소스의 노동』(마이클 하트와 공저) 등이 한국어로 출간되었으며 『구성 권력』, 『혁명의 만회』, 『시간의 구성』, 『전복적 스피노자』 등이 출간될 예정이다. 최근 그는 프랑스어 잡지 Multitude의 발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최근에는 『제국』을 둘러싼 국제적 논쟁에 참여하는 한편 2004년 8월 출간예정인 그 후편 『다중』의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옮긴이

 

정남영 Chung Nam Young, 1958~

 

1958년 인천 출생. 서울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현재 경원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문학평론가로서 활발한 비평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저서로는 『리얼리즘과 그 너머』(갈무리, 2001)가 있고 역서로 『문학이론입문』(김명환, 장남수과 공역, 창작과비평사), 『현대철학의 두 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갈무리,1995년),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눈뜨기』(설준규와 공역, 창작과비평사) 가 있다. [http://noolbyun.net]

 

 

『혁명의 시간』 「서론」과 한국어판 해설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발췌

 

혁명의 시간』 「서론」 중에서

‘유물론 대 <권력>’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나는 나에게 가장 익숙한 주제들에 관심을 쏟았다. 스피노자를 읽는 나의 습관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나는 나의 새로운 훈육의 경험 속으로 스피노자의 저작들을 가지고 갔다). 말하자면 나는 힘을 중심으로 하는 유물론적 존재론을 파악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늘날 탈근대적 공통성 위에 (즉 탈근대적 개인들이 자신의 표현능력의 증대로서 경험하는 협동과 생산성 위에) 수립된 새로운 가능성들의 집합이 어떻게 착취에 대한 적대―이는 탈근대적 <인간>의 점증하는 가난에 기인한다―를 향하여 열리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협동적 성좌(星座)들―이는 탈근대적 형태의 사랑에서 즉 생산 및 사회적 재생산의 네트워크 그리고 ‘일반지성’에의 참여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에서 출발한다―을 향하여 열리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알마 비너스’(Alma Venus, 삶을 부여하는 비너스)라는 제목이 달린 세 편의 글을 집필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 「서론」 13쪽

 

유물론이 그 존재론이 전개되는 바로 그 지형에서 그 나름의 논리학을 조직할 수는 없는 것인가? 유물론이 충분히 논리적이고 논리학이 충분히 유물론적일 수는 없는가? 이런 프로그램을 염두에 둔다면, 관념론과 선험론의 기억으로 가득 찬 ‘개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유물론에서 공통적인 것의 상징은 오히려 ‘이름’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즉 실재적인 것(the real)의 파악을 위한 명명적 배치이며 그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공통된 이름’(the common name)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이름은 새로 구축되어야 한다! 만일 유물론이 이름들로 이루어진 논리적 구축만을 인정한다면 ‘공통된 이름’은 우리의 경험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가 될 것이며 언어의 형태로 제안되는 의지와 지식의 특이한 사건들 및 행동들로 짜여진 직물이 될 것이다. 유물론적 경험은 존재를 계속적으로 얇게 베어내어 소통과 창안의 열려진 배열 속에 모으는 칼날이다. 특히 언어의 경우에 그렇다. 부분들에 앞서서 전체를 전제하고 경험에 앞서서 진리를 전제하는 개념적 형식은 이런 식으로 모두 사라진다. - 「서론」 14~5쪽

 

여기서 앎(유물론적 장 안에서의 에피스테메episteme이며 논리)이란 카이로스(Kairòs)다. 즉 앎의 사건, 이름붙이기(naming)의 사건, 혹은 더 정확하게는 특이성(singularity)으로서의 앎이다. 이는 논리적 혁신과 존재론적 창조를 교직한다. 카이로스는 화살을 날리는 행위를 나타내는 고전적인 이미지이다. 여기 탈근대에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특이한 존재론적 계기로서, 진공(the void)을 대면하면서 존재에 이름을 붙이고,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예상하면서 구축하며…그리하여 이름을 사건에 적실하게 하고 정당화를 (공통적인 것의 위에 혹은 너머에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안에서 구축한다. 유물론적 지식이론은, 과학적 경험에서 일어나는 바이지만, 존재를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구축(構築하는, 모험적인 동시에 절대적인 행위이다. 이는 발본적인 인식론상의 전환이다. - 「서론」 16~7쪽

 

이 글에서 논의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형성 혹은 구성을 둘러싸고 진행된다. 현재와 같은 <권력>의 조건에서는 필연적으로 우연적이고 거친 구성이다. 그러나 항상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화살에 열려 있으며, 항상 존재의 가장자리에서 갱신되는 구성이다. 여기서 (이것이 3부 「다중」에서의 나의 추측이다) 존재론적 경로는 정치적 경로와 다시 한번 결합된다. 결정하는 다중이란 근대에 코뮨주의의 모험을 시도했던 주체성과 강력하게 닮았고 지금 탈근대에서는 탈출(exodus)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주체성과 강력하게 닮았다. 다중은 장차 올 모든 코뮨주의의 새로운 ‘유령’인 것이다. - 「서론」 21쪽

 

자본주의는 삶 전체를 감싸버렸다. 그 생산은 삶정치적(biopolitical)이다. 생산에서 <권력>은 사회를 통하여 팽창되고 재생산되는 것의 ‘상부구조’를 이룬다. 사회적 조직의 ‘훈육적 체제’는 (푸꼬의 용어를 빌자면) ‘통제 체제’로 대체되었다. 생산자―노동자 혹은 프롤레타리아, 지적 혹은 물질적 노동력―가 점증적으로 두뇌라고 불리게 되는 생산도구를 재전유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노동력이 변형되었다고 했을 때 이를 이미 말한 셈이다…. 그러면 생산자들의 다중 내에서 혁명적 주체성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이 다중은 어떻게 저항과 반란의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재전유의 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자치를 위한 투쟁을 할 수 있는가? 삶정치적 탈근대에서, 즉 노동력의 변형과 생산적 풍요화가 일어난 국면,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 전체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가 목격되는 국면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이에 대한 대답들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카이로스’와 ‘삶을 부여하는 비너스’ 다음으로 ‘다중’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희망의 재구축을 향하여 (더 정확하게는 「알마 비너스」에서 말한 대로 ‘디스토피아’를 향하여) 벽돌 몇 개를 쌓았다고 할 수 있다. - 「서론」 22~3쪽)

 

한국어판 서문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중에서

재구성된 유물론 즉 새로운 유물론은 완전히 내재적인 의미의 공통적인 것의 철학이기에 초월의 완전한 추방, 모든 수준에서의 추방을 필수적 요소로 한다. 이에 따라서 사유를 구성하는 기본개념들도 완전히 새 것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새롭게 정의된다. ‘공통적인 것,’ ‘가난,’ ‘사랑,’ ‘측정불가능한 것,’ ‘결정,’ ‘변신,’ ‘삶정치’ 등등 새로운 개념들이 창출?정착되고, ‘특이성,’ ‘탈가치화,’ ‘일반지성’ 등의 개념들은 새로운 맥락에서 활용되며 ‘물질,’ ‘영원,’ ‘시간,’ ‘공간,’ ‘착취,’ ‘잉여가치’ 등의 개념들은 새로이 정의되어 사용된다. 아니, 네그리는 철학의 기본 표징처럼 되어있는 용어인 ‘개념’조차도 ‘(공통된) 이름’으로 대체한다. 1장의 맨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개념을 안다, 개념을 통하여 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개념’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싸움에 의하여 그리고 매우 상이한 해석들에 의하여 남용되었다. 우리는 개념이라는 단어를 ‘이름’으로 대체한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 사유를 구성하는 세포 자체를 갈아버린 셈이다. 아니, 세포 수준에서의 초월성을 추방한 것이다. ‘이름’에 의하여, 특히 ‘공통된 이름’에 의하여, “부분들에 앞서서 전체를 전제하고 경험에 앞서서 진리를 전제하는 개념적 형식”(「서론」)은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61~2쪽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유물론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것은 물질 개념의 재정의이다. 유물론(materialism)이라는 이름은 물질 개념의 중심성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의 물질 개념의 혁신성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시간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 단순한 시간성이 아니라 창조의 시간성이다, 물질은 카이로스(kairòs, ‘시간의 화살’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에 의하여 매 순간 측정불가능하게 되고 매 순간 새로 창조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물질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일정한 법칙에 종속되어 운동하며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새로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이다. 물론 물질은 영원하다. “유물론의 길잡이 불빛은 물질의 영원성이다”(4장 ‘공통적인 것’ 1.1). 그러나 끊이지 않고 지속한다는 의미에서 영원하지는 않다. 네그리에게서 영원은 카이로스의 힘에 의하여 매 순간 혁신되는 현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새로 생성(생산)된 것은 곧 영원한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혁신되고 새로 생성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과 혁신의 이러한 결합은 아마도 철학 사상 최초의 정식화일 것이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63~4쪽

 

‘가난’과 ‘사랑’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할 것이다. 네그리의 텍스트를 직접 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네그리에게서는 시간 그 자체가 곧 저항이며 투쟁이고 혁명이고 창조이며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69쪽

 

카이로스의 복원은 시간이 곧 존재(의 혁신)를 구성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앎과 존재의 상호교직을 의미하기도 한다. 앎이란 곧 카이로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유물론에서는 존재론이 곧 논리학이며, 논리학이 곧 존재론이다. 이러한 양자의 통일성이 일어나는 곳은 카이로스들의 물질적 장인 ‘유물론적 장’(the materialist field)이다. 유물론적 장은 앎이 카이로스를 통하여 존재와 합치되는 곳, 사건이 발생하는 곳이다. 유물론적 장은 정태적으로 파악된 물질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구 사회주의권의 철학인 맑스레닌주의(=변증법적 유물론)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바로 이 정태적 물질 개념의 사례이다. 맑스레닌주의는 ‘물질의 자기운동’이라는 말로 물질이 그 외부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명시함으로써 유물론의 외양을 갖추려고 애썼으나 막상 물질 개념을 정의할 때에는 그로부터 창조적 활동성을 제거함으로써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이 자가당착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가 자연과학에서 처한 운명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쉬뢰딩거는 과학적 방법의 토대를 이루는 두 일반적 원칙의 하나이며 그리스 시대부터 현실적으로 작용해 온 ‘객관화’(objectivation)는 비록 이전까지는 피치 못할 것이었으나 이제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객관화’란 세계로부터 정신을 제거하고 그 결과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물질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인데, 이렇게 구축된 물질세계란 그 자체로 창조적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쉬뢰딩거는 ‘객관적 물질세계’란 실제 현실과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객관화’가 과학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과학은 바로 그 ‘객관화’로 인하여 막다른 골목에 처했으며, 이제는 이와 다른 새로운 과학적 태도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 이른바 카오스론으로 지칭되는 경향에 의하여 공유된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71~2쪽

 

네그리의 재구성된 유물론에서는 물질과 의식, 주관과 객관의 괴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바로 ‘몸’ 개념이다. 카이로스(시간)가 곧 물질을 구성하는데, 바로 카이로스의 육화가 ‘몸’이기 때문이다. ‘몸’ 개념은 ‘물질의 자기운동’이 처한 아포리아를 돌파하여 ‘물질의 자기생산’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몸’은 사유의 능력과 동시에 변신(meta- morphosis, 변형)의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변신이란 새로운 존재를 창출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성하는, 항상 특이한 이행이다. 이러한 ‘몸’들의 집합이 바로 존재가 생산되는 ‘유물론적 장’인 것이다. ... 유물론적 장에서는 진리의 문제가―실천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천할 문제라는 의미에서―그 자체로 실천의 문제가 된다. 이것을 네그리는 (맑스를 따라서) ‘진리의 프락시스’라고 부른다. ‘진리의 프락시스’란 카이로스의 힘의 펼쳐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앎과 새로운 존재를 동시에 발생시키는 행동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진리의 프락시스’에서는 진위를 판별하는 별도의 행위―이는 초월 혹은 매개의 한 형태이다―가 필요하지 않다. 예컨대, (레닌에게서 온) 객관적 진리론은 인식과 실천의 통일을 말하기는 하지만 이는 어떤 발언이 먼저 존재하고 이후에 그 진위(眞僞)―생각과 대상의 상응 여부―가 실천 속에서 판별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통일이다. 이렇듯 인식과 실천이 별도의 두 단계로 설정되는 까닭에 그 통일은 변증법적 방식, 즉 매개―여기서는 시간적 매개―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72~4쪽

 

삶의 창조적 힘과 ‘삶권력’의 싸움의 지형을 네그리는 ‘삶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지형에서 국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사회화의 원리 혹은 사회적 결집의 원리가 바로 공통적인 것의 구축으로서의 삶의 구성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탈근대에서 공통적인 것은 삶에 완전히 내재적이다. 이에 반해 국가는 삶의 외부로부터 삶에 뒤집어 씌워진 사이비 공통적인 것이며, 공통적인 것을 빙자한 초월이다. 공통적인 것은 국가와 적대한다. 그런데 이 적대성은 앞에서 말한 변증법적 대칭관계―이는 상대방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끊임없이 온존시킨다―로 파악된 적대가 아니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76쪽

 

공통적인 것은 보편과 달리 철저하게 역사적인 개념이다. 현실 속에서 실천적으로 구축되는 만큼 존재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가 다르고, 자본주의에서도 근대와 탈근대가 다르다. 이제 역사적 과정은 국가의 계보학으로서보다는 공통적인 것의 확대―이는 탈근대에 들어와서는 양적 확대라기보다 새로운 특이성의 생성을 통해 ‘더 공통적으로 되기’가 된다―라는 관점에서 다시 성찰될 수 있다. 네그리에 의하면 이것이 유물론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다. 세계가 항상 새로움에 열려 있으며, 매 순간 다시 창조되는 것으로 보는 네그리의 ‘창조적’ 유물론에는, 미리 고정되어 있어서 초월적 명령으로 작용하는 (아르케 식의) 목적이란 있을 수 없다. ‘공통적인 것’의 확대라는 방향성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 방향성조차도 물리적 시공간에 고정된 방향성이 아니다. 항상 카이로스의 힘에 의하여 다시 ‘장차 올 것’을 향해, 즉 미지의 것을 향해 열리기 때문이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78쪽

 

네그리는 ‘삶정치’에서 싸움의 성격을 ‘구성하면서 작별을 고하기’라고 부른다. 지배, 국가권력 및 모든 초월적 환상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며, 빈자와 함께 모든 초월적 방벽들을 무너뜨리며 공통적 기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구성하면서 작별을 고하기’가 함축하는 것은 강력한 자율성이다. 국가도 필요하지 않고, 지배도 필요하지 않으며 척도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즉 탈근대의 프롤레타리아인 빈자 다중에게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 이제 혁명의 시기란 따로 없다. 모든 순간이 바로 ‘혁명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 세계는 공통적인 것이 팽창하는 운동 속에서 그 전체가 다시 창조된다”(4장 ‘공통적인 것’ 9.2). 어떤 시간은 수단 혹은 과정으로 그리고 다른 시간은 목적으로 이분화되는 일은 여기서 일어날 수가 없다. 시간들(카이로스들) 사이에 서열이란 없다. 서열은 척도의 존재를 전제하는데, 시간의 힘에 의하여 생성된 존재는 측정불가능한 것으로서, 척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매 순간 전과 다르게 살기, 항상 새롭게 살기, 모두 함께 그렇게 하기―이것이 바로 공통적인 것의 목적론이 내세우는 ‘삶정치’적 구호이다. - 「카이로스의 부활과 유물론의 재구성」 280~1쪽

 

 

목차

 

일러두기 6

서론 9

 

제1부 카이로스(Kairos)

 

1장 공통된 이름(The common name) 29

 

2장 측정불가능한 것(The immeasurable) 55

 

3장 유물론적 장(The materialist field) 77

 

제2부 알마 비너스(Alma Venus)

 

4장 공통적인 것(The common) 103

 

5장 가난(Poverty) 129

 

6장 사랑(Love) 159

 

제3부 다중(Multitudo)

 

7장 정치(Politics) 191

 

8장 산 노동(Living labour) 209

 

9장 결정(The decision) 233 

 

『혁명의 시간』 해설 259

찾아보기 282p

 

 

책 정보

 

2004.6.15 출간 l 139×208mm, 무선제본 l 아우또노미아총서3, Mens

정가 13,900원 | 쪽수 288쪽 | ISBN 9788986114676

 

 

구입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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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기사

 

[조선일보] 매 순간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가라

[한겨레] 자본주의 '제국'에 저항하라

[동아일보] 인문사회 / ‘혁명의 시간’…脫근대 혁명은 ‘다중’의 이름으로

[전남일보] 혁명의 시간/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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