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이 책에서 시도된 나의 연극은 60년대 이후 전개된 서구 문화의 혁명적 형식변환을 실연해 보인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흐름일 수 있다. 이 흐름들은 읽는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무늬의 형상을 비쳐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이 책에서 애써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에 내재한 철학적 한계에 대해 침묵했다. 이런 작업은 이 책이 아닌 다른 기회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제스처는 배우의 그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오직 배우는 연기에 충실할 뿐이다. 이제 막이 내릴 때까지 이 책의 운명은 이 연기의 진정성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을 근거로, 1960년대 이후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도널드 바셀미, 윌리엄 깁슨, 토마스 핀천,, 존 파울즈, 움베르토 에코,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존의 해석을 거부하면서 독특한 분열증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사무엘 베케트, 프란츠 카프카의 그것들과 비교 평가하고, <블레이드 러너>와 <로스트 하이웨이> 같은 영화들을 분석함으로써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가 내포하고 있는 탈주성과 기계적 상상력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저자 서문
묘하게도 내가 들뢰즈란 철학자의 존재를 안 것은 그의 부고가 신문지상에 조그맣게 등장했던 1995년 어느 언저리였다.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당장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이리 저리 방황을 일삼고 있었는데, 대학시절을 문학에 빠져 지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해놓은 것도 없이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 내게 닥쳐왔던 것이다.
돌이켜보자면, 그때는 대학이라는 온실 덕에 감히 사회를 우습게 여길 수 있었던 한 낭만주의자가 이리 저리 자본주의의 쓴맛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남들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차원의 일을 모색해야 했건만 나는 여전히 과거와 현재의 틈바구니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하는 일이라고는 근처 비디오 대여 점을 섭렵하거나 아니면 하루종일 닥치는 대로 이 책 저 책을 읽어 대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뭉그적거리며 백수건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난데없이 들뢰즈가 나타난 것이다.
별일 없이 서점을 배회하던 어느 날 우연히 나의 눈에 들게 된 『안티 오이디푸스』란 제목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문외한을 자처하던 평소의 오기를 은근히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다. 게다가 대뜸 거금을 들여 책을 구입해 버린 결단을 후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나를 압도했던 그 말들의 향연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에 너무도 생소하면서도 괴이하게 매력적이었던 『안티 오이디푸스』의 첫 구절은 아직도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동안 혼란기를 겪은 후, 도대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고 있는 ‘그것(기계)’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차 들뢰즈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세계로 조금씩 머뭇거리며 들어서게 되었다. 『안티 오이디푸스』로 고무된 나의 지적 호기심은 그의 책을 내쳐 모두 읽어나가는 열성으로 발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들뢰즈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이라면 플라톤이나 헤겔을 먼저 떠올렸던 나에게 들뢰즈는 이런 체계의 철학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스피노자나 니체의 의미를 가르쳐 준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남들이 생각하기에 영문학과라는 낙인을 이마에 붙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철학공부란 어딘가 격의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대학원을 철학과로 갔다가 다시 영문학과로 방향을 튼 까닭은 들뢰즈 철학 자체의 탓도 컸다. 말하자면, 들뢰즈의 철학은 기존의 철학이라는 틀로 파악할 수가 없는 독특한 체취를 풍기고 있는 것이기에, 이것을 나는 문화비평으로 얼마든지 전환시킬 수 있다는 외람된 계산을 했던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 자체를 비평적으로 전용해 보고자 했던 하나의 실험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로 문학이론의 지식에 좁게 근거하고 있던 나의 사유를 인문학적 차원으로 개방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 들뢰즈를 통해 나는 비로소 문화라는 거대한 복잡성의 세계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셈이다. 특히 철학의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은 나에게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는데, 철학은 개념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파격적인 그의 주장을 통해 나는 서로 다른 철학적 체계의 개념들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 것인지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들뢰즈와 그의 동료 가타리를 통해 해결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들의 사상으로부터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새롭게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 곧 새로운 사유의 시작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의 경우 누군가의 사상을 가르치거나 배운다는 것은 그 사상가에 대한 충성을 전제하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충성의 맹세는 자주 해당 사상가의 사상을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뚝 떼어 내어서 형식화시켜 버리는 상징화의 과정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 들뢰즈는 분명히 매력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늘날 20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로 칭송되는 이 프랑스 철학자의 모든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철학을 모조리 내 것으로 만들 재주가 없는 나 같은 아둔한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그의 사유방식과 입장을 따라 흉내를 내 보고 그 다음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약소하나마 들뢰즈와 나의 체질 사이에 가로놓인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성찰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루카치의 말처럼 하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사상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는 작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 책에서 들뢰즈의 가면을 쓰고 들뢰즈의 역할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내 자신을 들뢰즈-됨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나는 일단 들뢰즈의 사유체계 안으로 거부감 없이 스며들 필요가 있었다.
이 책에서 ‘나’라는 진술주체를 발견할 수 없는 까닭은 이런 사정에서 그렇다. 게다가 나는 내 자신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를 서로 표시 나지 않게 섞어 놓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나는 진심으로 이런 방식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진의를 존중해 주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감히 이런 짓을 서슴없이 감행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런 맥락에서 나는 들뢰즈의 가면을 쓰고 그의 극장에서 배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궁극적으로 이 책에서 시도된 나의 연극은 60년대 이후 전개된 서구 문화의 혁명적 형식변환을 실연해 보인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흐름일 수 있다. 이 흐름들은 읽는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무늬의 형상을 비쳐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이 책에서 애써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에 내재한 철학적 한계에 대해 침묵했다. 이런 작업은 이 책이 아닌 다른 기회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제스처는 배우의 그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오직 배우는 연기에 충실할 뿐이다. 이제 막이 내릴 때까지 이 책의 운명은 이 연기의 진정성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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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씌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특히 나에게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던 시인이자 비평가인 송주성 선배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와 나누었던 귀중한 대화들이 없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접점에 대한 유익한 성찰을 제공했던 김영민 선생님에게도 감사한다. 개인적 면식은 없지만 들뢰즈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이진경에게 많은 빚을 졌다. 물론 후기 들뢰즈를 중시하는 그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전기 들뢰즈에 방점을 찍고 있는 김재인의 선행연구에서도 많은 영감을 제공받았다. 원칙적으로 정치성과 비정치성의 관계가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활성태와 타성태의 상호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에 대한 다양한 입장 역시 충분히 실천이라는 용광로에서 녹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졸고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도록 해주신 조정환 선생님과 갈무리 출판사에도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들뢰즈의 국내 번역본들을 일일이 참조할 수 없었던 관계로 몇몇 개념들의 역어는 자의적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잘못된 역어로 인해 빚어진 모든 오류는 오직 나의 탓이다.
지은이
이택광 Lee Taek-Gwang, 1968~
부산대학교 영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후 영국 워릭 대학원 철학과에서 발터 벤야민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 현재는 영국 셰필드 대학원 영문학과 박사과정에서 비판이론과 문화이론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리얼리티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을 토대로 문화연구를 수행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씨네 21』 『국제신문』 영화비평을 발표했으며 PBS 라디오에서 <이택광의 문화 읽기>를 진행했다.
지은 책으로는 『이현세론:영웅 신화와 소외성의 조우』(형상, 1997),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이후, 2002)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프레드릭 제임슨-맑스주의,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숀 호머 지음, 문화과학사, 2002)이 있다.
목차
Ⅰ. 서론
Ⅱ. 탈주와 회귀
Ⅲ. 차이와 반복, 그리고 시뮬라크르 또는 강도들
Ⅳ. 사건과 계열, 그리고 됨
Ⅴ. 욕망의 분열 증식과 리좀적 글쓰기
Ⅵ. 욕망하는 생산과 세 가지 종합
Ⅶ. 소수 문학 또는 극장
Ⅷ. 결론
책 정보
2002.3.20 출간 l 152×225mm, 무선제본 l 갈무리 신서 25
정가 8,000원 | 쪽수 168쪽 | ISBN 89-86114-44-5 04100
구입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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